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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blue Apr 15. 2022

슬기로운 공주 읽기 1탄 : 백설공주_20

20화 : 각성

[지난 줄거리]

마리아와 윌리엄은 다시 만났다.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운명은 두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정원에서 마신 차에는 독이 들어 있었고, 접견실에서 윌리엄을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 피를 토하고 주저앉았다.

왕비는 있는 힘껏 접견실의 비밀문을 열어 윌리엄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끝내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고백한다.


20화 : 각성


—-



“또 허튼수작 부렸다간 가만 두지 않겠다. 피오나 공주가 머무는 동안 얌전히 시키는 대로 니 책임을 다 해라.”


아르델 국왕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윌리엄에게 재차 쏘아댔다. 피오나 왕국의 공주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괜히 흠이 잡힐 만한 일을 남길 수는 없었다.


이븐 왕국 왕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마음이 한껏 후련해졌다. 부디 피오나 왕국과 정략결혼은 이븐 왕국 때처럼 애를 먹지 않기를 바랐다.


“국왕 폐하, 피오나 공주님과 수행 사신 두 명이 성문에 도착했다는 전갈입니다.”


국왕을 가운데에 두고 오른쪽에는 윌리엄이 왼쪽에는 필립이 자리했다. 윌리엄은 며칠 전부터 반쯤 넋이 나가 횡설수설하는 일이 잦았다.


필립은 정략결혼이라는 무덤을 스스로 파고 들어오는 어리석은 공주를 어떻게 비웃어줄지 고민하느라 입주변이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피하려 한다면 빗겨갈 수도 있었을 텐데 던진 미끼에 냅다 물린 피오나 왕국의 꼴이 기가찰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피오나 공주님 들어가십니다.”


솔르와 도나우는 접견실 안으로 들어서 조심히 뒤로 물러섰고 그 사이로 피오나 공주로 변장한 시리우스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피오나 왕국의 공주, 아르델 왕국의 국왕 폐하와 두 분의 왕자님께 인사올립니다.”


시리우스는 자연스럽게 손 끝으로 치마를 들어 올리고 고개를 사뿐히 내렸다 지그시 올려 맨 처음으로 왕을 그리고 윌리엄, 필립을 연이어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두 분 왕자님과 함께 지낼 마리아 인사올립니다.


국왕은 물론이고 윌리엄과 필립 모두 순간 깜짝 놀랐다. 공주로 변장한 시리우스의 모습에서 세 사람 모두 성에 처음 들어온 날의 마리아를 떠올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몸이 움츠러들었던 시리우스는 정체를 들킨 건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어..어서오시오, 피오나 공주. 먼 길 오느라 수고하시었소. 오늘은 우리 왕국에서 마련한 만찬을 즐기고 편히 쉬시게나. 앞으로 사흘을 머문다고 하셨으니 그리 서두를 필요 없네. 여봐라, 저녁 만찬을 준비하라.”


무겁고 지루할 줄 알았던 저녁 만찬 시간은 의외로 유쾌하게 흘러갔다.


아르델 국왕은 재치있는 입담을 자랑하는 솔르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시리우스는 윌리엄과 필립 왕자가 번갈아가며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바람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도나우도 덩달아 신경을 예민해졌는지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몰랐다.


—-


“야.. 아르델 왕국은 접견실도 그렇고 공주 쓰라고 준 침실도 겁나 으리으리하다… 아, 맞다! 아까 시리우스 처음 봤을 때 두 왕자 눈 봤어? 아주 우리 공주님한테 제대로 넘어갔지? 시리우스 덕분에 형제가 한판 주먹다짐 좀 하겠던데 분위기가.. 안 그래?


솔르는 여전히 혼자 제일 신나서 떠들었다. 도나우는 솔르에게 도끼눈으로 눈치를 보냈다.


“라오스 삼촌이 백설이 갇혀있는 감옥.. 안내해준다고 했는데. 라오스 말로는 한 명 밖에 못 간다고 하니까 시리우스, 너가 다녀 와. 오늘 밤 늦은 시간에 신호를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기다려보자. 그때까지 눈 좀 붙여. 너 아까 너무 긴장해서 내가 다 … 손에 땀이 나더라..”


“어..나 잠깐 눈 좀 붙일게..”


도나우와 솔르는 라오스를 만나기 위해 조심히 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시리우스는 의자에 기대어 누운 채 그대로 잠들었다. 그 방에 낯선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기척에 놀라 순간 눈을 떴다. 눈앞에 필립이 있었다.


“일어났소? 깨웠다면 정말 미안하오.”


“충분히 쉬었습니다. 필립.. 왕자님이시죠?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공주는 헛된 발걸음을 하신게오. 정략결혼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게요?”


“잘 알고 있사옵니다.”


“대체.. 왜 오신 것이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왔습니다. 아르델 왕국도 정복 전쟁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정략결혼을 택한 게 아니옵니까? 저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이 결혼을 택하였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 사람을 살린다고? 그게 무슨 말이오..”


“이 결혼으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겠다는 말입니다.”


“결혼은 당신 전부를 거는 일이오. 아니, 피오나 왕국의 명운이 걸려있는 일이오. 단 한 사람을 위해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그 말을 믿으란 말이오? 허튼 수작을 부리는 거라면 일찌감치 포기하시오”


“왕자님, 사랑에는 한 가지 셈 법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필립은 시리우스의 말에 더 받아칠 수 없었다. 그 자리에 더 버티고 있다간 시리우스에게 자신의 속내를 전부 들킬 것만 같아 말을 잇지 못한 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


“면회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제가 문밖에서 신호를 보내면 나올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아론에게 안내 받아 지하 감옥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시리우스는 어둡고 습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공포를 느꼈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길게 늘어선 통로 끝 한쪽 구석 감옥에 손이 꽁꽁 묶인 채 초점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백설이었다.


시리우스는 참혹하게 망가진 백설의 모습이 너무도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 백설은 오랜만에  시리우스가 이리도 예쁜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난  반갑고 기뻐서 울었다.


백설은 빛도 들지 않는 지하감옥에 갇혀 현실 감각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폐부를 찌를 것 같은 냉혹한 현실이 전해졌다.


“시리우스.. 나 이제 그만 할래. 내가 백설이라고 밝히고 정략결혼, 까짓거 하면 되지. 그게 어머니를 죽게 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잖아. 시리우스 너마저도 이런 모습을 하면서까지 매달릴 필요 없어. 그만하자…그만…”


백설은 왕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분노하고 자신을 자책하며 자신이 자초한 이 모든 상황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잃은 듯한 얼굴을 한 백설 앞에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시리우스는 순간 자신의 할머니가 떠올랐다.


“우리 할머니, 나단 왕국의 공주였어. 할머니는 사실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대. 활을 아주 잘 쏘는 사내다운 사내라고 했어. 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그때 그 남자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고 했어. 하지만 할머니는 다른 나라 왕자와 결혼을 해야만 했지.”


백설은 가만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여기서 이야기 끝..이라면 꺼내지도 않았겠지? 그런데 할머니는 결혼을 하고 한참이 지나서도 그 남자를 쉽게 잊을 수 없었대. 그렇게 사랑했는데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게 너무 후회되더라는 거야. 그래서 다 늙어 노인이 된 할머니가 그 젊은 시절의 남자의 흔적을 더듬어 찾아갔대. 우리 할머니도 참 대단하지?”


“그래서..?”


“응, 글쎄 처음 만났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있더래. 그래서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봤는데 아무도 살지 않는 거야.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거기 노인네 죽은지가 언젠데 누굴 찾냐고 묻더라는 거야. 그래서 그 사람을 붙잡고 다짜고짜 궁금한 걸 막 쏟아부었대. 글쎄, 평생을 결혼 안 하고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거야…”


잠시 두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시리우스는 밧줄에 묶인 백설의 두손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세상에 두 가지 기적만 있다고 믿어. 한 가지는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그 만남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거야.”


시리우스는 백설의 두 손을 꼭 잡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 싸움은 기적을 지켜내는 일이야. 너는 이 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기적을 이루어낼 거야. 백설 너의 기적도.. 나의 기적도..”


밖에서 아론이 보내는 소리가 들렸다. 시리우스는 곧 다시 오겠다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백설은 죽은 왕비와 보낸 시간, 성 밖에 나와 일곱 명의 친구들과 보낸 시간,  그 사이에 만난 피오나 그리고 윌리엄 왕자 함께한 모든 이들과의 순간을 떠올렸다.


어느 누구 하나 끝을 알고 있는 자는 없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거대한 벽 앞에 서서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지 않도록 다치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백설은 처음으로 스스로를 감추었던 그 날 일을 떠올렸다. 차갑고 무서웠던 윌리엄 왕자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백설이라고 밝히는 게 부끄럽고 창피했다.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서 모두를 살리기 위함이라는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백설은 스스로가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략결혼보다도 자신이 그에 걸맞은 여인이 아니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조롱 받을 게 무섭고 두려웠다.


싸워야 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였다.


백설이 싸워야하는 것은 정략결혼도 아르델 왕국도 아닌 이름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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