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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mb Aug 12. 2024

시작은 산책

끝은 피가 낭자하였으나

걷는 걸 좋아하는 편니다.

그리고 비교적 잘 걷는 편인 거 같요.

그러나 아주 게으니다.


이게 합쳐지면


아주 아주 아주 아주 가끔 어쩌다 나가서

다리가 아작날 때까지 걷고 기절한 뒤에 너무 힘들어서

또 한동안은 걸으러 나갈 엄두가 안 나는

<도대체 뭐 하는 애니?>의 루틴을 반복하게 죠.


그런데 저 루틴을 깨 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니다.


하나는 폭염. 폭염러버인

특히 폭염이었던 낮의 잔재를 여전히 팽팽하게 품고 있는

저녁 공기 속을 헤집고 다니는 걸 사랑니다.

그런 날은 폭염에 대한 사랑게으름을 이기는 날죠.


또 하나는 고민(이라고 쓰고 분노).

천장이 높아질수록 생각 정리가 잘되고

비교적 좀스럽지 않은 결론을 끌어내기가 쉬운 편이며

분노의 정도에 따라 다리에 부스터가 붙는 편이라

아예 천장이 없는, 공원을 맹렬히 걷다 보면

어느새 생각 정리가 끝더라구요.


참고로 대부분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낸다기보다는

부여잡고 있을 필요가 없는 일들이란 걸 깨닫게 돼서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일이 많다 것도

깨달아 가는 중입니다.

인생이란! 이런 건방진 생각도 함께 하면서 먼 산도 봅니다.


어쨌거나 그래서

폭염인데 고민(보다는 확실히 분노)할 게 있다?

그럼 나가는 거요.


모자 쓰고 케이스도 놓고 버즈만 꽂고 전화기만 들고.

전화기도 놓고 나가고 싶은데 하 수상한 세상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대부분 다 걷고 나면 죽기 직전이라

공원 앞 편의점에서 카리 스웨트이부어 주어야 하고

기사님이 그깟 거리도 태워만 주신다면

택시를 타야 할 수도 있으므로 전화기는 들고.



그런데 이번 여름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폭염에도 못 걷고 체력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요.

걸어야 체력이 생기는 건데 아이러니하면서 당연하게도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도무지 나가고 싶지가 않아서

나가자 나가자 나가자 나가라고 이 자식아-만 하다가


얼마 전에 잠깐 도서관까지 한 15분 걸었는데

이거 뭐야? 나 지금 숨 차니? 싶어서  충격받았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제일 싫은 과목은 체육이고

대학교 가서 제일 좋았던 건 체육이 없는 거였던 는,

빗대는 것도 과장도 아닌 정말 숨만 쉬고 살다가

작년 여름 정말 나답지 않게 규칙적으로 많이 걸어서

오 체력이 올라오는 게 이런 느낌이고만!

오 생기가 넘치는 게 이런 거구만!

인생을 건강하게 꾸려나가는 싱그러움 살짝 느끼나 했는데

그새 자만 거죠.


난생처음 느껴본 체력의 여분, 남아나는 기운 그런 것들이

다시 다 바닥난 느낌이라 진짜 예전으로 돌아가기 전에

정말 다시 좀 걸어야겠다고 생각어요.

슬슬 걸어도 되니까 자주 걸어야겠다고 또 생각만 하다가

(게으름뱅이 타이틀은 아무나 붙이는 게 아닙니다.)


일요일 잘못된 시간에 또 피곤이 몰려오길래,

그 시간에 잠들면 한 세네 시간 자다 깨서 밤새 힘들거든요.

큰, 정말 우스울 만큼 크고 큰 용기 내서 산책하러 나갔요.

아치스(발의 아치를 잡아주는 편인 조리. 쪼리?) 신으려다

요즘 디스크 증세가 심상치 않아서 (가지가지하는 중)

신발은 그냥 운동화 신고 운동화 신을 거니까 을-


아잇 양말을 뭐 신지?

이 양말은 이 바지랑 안 어울리는데?

이 바지는 양말이 안 보여야 되는데? 어쩌지?

아아 시간 자꾸 가는데? 이러다 다시 눕는데에!?


오랜만에 먹은 마음 사그라들고 다시 누울까봐

마음이 다급해져서 산책할 거니까, 천천히 걸을 거니까

페이크 삭스를 신었어요. 페이크 삭스여도 잘 안 벗겨,

이미 입은 바지는 정말 양말이 안 보여야 하는 바지라서!


그러고는 마음 바뀌기 전에 부랴부랴 산책을 나갔어요.


딱 내가 좋아하는 밤의 색깔과 폭염 머금은 공기에

너무 많지도 않은 적지도 않은 사람들과

너무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개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이 세 곡.

파리올림픽 개회식에서 얻어놓은 곡들인데

잊어버리고 있다가 연달아 나오는데

 심장비트는 더 이상 제 것이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아주 약간? 신이 났을 뿐이에요.


어느새 슬슬 달리시는 분들도 따라잡아 버렸어요.

왼쪽 뒤꿈치가 조금 따갑기 시작하길래

신발끈을 더 꽈악 묶었어요. 신이 나버렸거든요.

다시 집에 가기는 제 결심이 아까웠거든요.

살짝 쓸리는 느낌이 있었지만 뭐 참을 만했고요.


원래는 세 시간도 걷는데

트레이너 선생님이 너무 많이 걷는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속도를 빠르게 해서 적당히 걷는 게 좋다-라고 하셔서

그나마 저만큼 걷고 마무리.


리는 역시나 아작이 나고 너덜너덜해졌지만

역시 누워있던 것보다 훨씬 좋군-하며 신발을 벗었는데

하얗던 페이크 삭스가 더 이상 하얀빛이 아니었어요.


그 와중에 피가 났다가 말랐다가 그랬는지

아주 다채로운 붉은색과 검붉은 색의 조화와

뒤꿈치는  "유혈이 낭자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시현 중.


울면서 샤워한 건 둘째치고

당분간은 또 걸으러 못 갈 것 같습니다.


도대체 뭐 하는 애니?


그래도 오랜만에 느낀 개운함과 가뿐함을 잊어버리기 전에

가을이 오기 전에 다시 또 나가보겠습니다.

양말 보여도 되는 바지 입고 양말 제대로 신고,

산책은 집어치우고 맹렬하게 한 번 걸어보겠습니다.


+ 아직 폭염 기운이 있긴 하지만

묘하게 더위의 정점에서 내리막이 시작된 느낌이라 서운.

엄마한테 말했더니 더위 먹은 거 아니냐고 했다.

진짜라고. 미친놈처럼 덥던 애가 살짝 점잖아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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