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수도 없이 스쳐 지나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게 의미 없다. 아무 의미 없던 사람을 알게 되고, 그 알게 된 사람 중 특정한 누군가가 특정한 의미를 갖고 내 시간의 어느 곳을 치고 그 사람과 나는 특정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대부분은 지인이다. 그러다 동료도 되고, 이웃도 되고, 친구도 되고, 연인도 되고. 혈연관계처럼 애초에 내가 선택하지 못한 채로 주어지는 인간관계가 아니고서는 대체로 필연 같은 우연이나 우연 같은 필연으로 서로를 선택하면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나와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지인들은 이런 공간에서 우연히라도 만난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지 못한다. 인사라도 하고, 입엣말이라도 나중에 밥 한 번 먹자고 하며 헤어진다. 단순한 지인을 넘어서는 인간관계들은 당장 밥을 먹으러 갈 수도 있다.
나의 인간 관계망에 들어온 사람들은 인연 에너지가 특별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매일매일 다니는 공간에서 매일매일 스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우린 그들을 알지 못하고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한 채로 흘려보내는데... 도대체 어떤 인연이기에 나와의 지인들은 이 기하급수적인 무한대에 가까운 확률로 만나서 아는 사람이 되었을까?
이렇게 머물다가 흘러간 인연들도 많다. 대부분 잠시 머물다 떠난다. 학교를 졸업하거나, 직장에서 퇴사를 하거나, 모임이 깨지거나 하면 동창, 동료들은 자연스럽게 내 인생의 한 장면 사진으로 그렇게 그곳에서 정지한다. 가끔씩은 아주 애석하게도 상호 손절하는 관계들도 있다. 연인들이 연애를 하다 헤어지는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들도 의리를 상하는 경우라면 손절한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인연들이야 후일을 기약하며 순간 희망을 갖고 결국에는 잊은 채로 지낸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면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진 지인들의 모습이 참으로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기억하는 그들은 과거에 서로 머물던 시간 속의 한 장면으로 기억된 채 이후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았는데, 서로의 모습에서 역력한 세월의 흔적과 그로 인해 내가 알던 사람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 그들을 보면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말문부터 탁 막힐 수밖에 없음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동창회에 나가거나, 중년이 되어 어린 시절 첫사랑을 보며 실망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난 동창회도 나가지 않고, 과거의 사람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이 든 내 모습을 보며 실망할 그 내면이 살짝 두렵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인연일 줄 알고 손절했던 인간관계가 내 안에서 흘러가지 않고 있을 때는 정말 난감하다. 이미 과거의 사람이고 과거의 인연이라 지금은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과 멀어진 채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을 붙잡고, 난 과거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을 갖고 난 왜 그랬냐고 계속 묻고 있고, 그 사람은 과거에는 말하기 싫어서 대답 안 했을 테고, 지금은 기억이 안 나서 대답을 못할 테고.. 무엇보다 서로 안 보니까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미련 맞은 짓을 홀로 다하고 있다고는 해도 이건 내 나약한 자의식의 표상이며, 이미 멀어진 그 사람과는 어떠한 관련성도 찾을 수 없는 허상이다.
따라서 내게 손절이란 죽을 때까지 보지 않는 것이다. 죽은 후에도 보지 않는 것이다. 내 인생에 그 인간관계는 현재 이후론 없는 것이다. 그러나 흘러가지 않은 채로, 자꾸 나를 그때 그 시간, 그 공간에 갖다 놓고 거기서 머물게 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 해결력이 부족한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해법이란 그냥 묻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철주야 삽질이다. 이래서 삽질이구나...
인간 역사가 시작한 이후 그렇게 많은 시대가 있었어도 같은 시대에 태어난 동시대 인연도 정말 큰 에너지이거늘, 그 동시대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 우리에게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일진대... 그 극소수끼리 왜 그렇게 평안하질 못했을까? 그건 악한 운명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왔던 카리스마 여인 미실의 대사가 떠오른다.
"약하디 약한 인간의 마음으로 푸르디푸른 꿈을 꾸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