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더러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이라고들 많이 한다. 직업적 요인도 클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난 머리가 복잡하거나 마음이 무너질 때는 밖에 나가질 않는다. 극단적이다. 너무 밖으로 돌거나 아예 처박히거나. 적당히라는 걸 도무지 모르는.
어느 순간 밖에 나다니기가 싫어 방콕 한다. 사람들도 만나러 다녀야 연구거리도 나오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인터뷰 트기도 쉽지 않은 데서 비롯된 핑계가 이젠 두문불출이 편하기까지 한 지경에 이르렀다. 새로운 사람에 대한 희망이나 설렘도 점점 마비되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게 살짝 두렵기까지 하다.
어쩌다 이리됐을까! 내 정체성이 심히 파괴되고 있는 지금이다. 왜 이리 다들 엉망이 된 거 같을까? 새로운 사람이 두렵고 밖으로 돌아다니기가 귀찮아졌다면, 나의 직업 생명은 응급실행이다.
새로운 장소나 사람에 대해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는 건 이젠 설렘으로 뭘 쓸 때가 지났다는 뜻일까, 아니면 긴급처방이 필요한 병이 든 것일까? 최근 여기저기 원서 쓰면서 보니 최근 3년간 부지런히도 많이 썼긴 했던데, 많이 써서 번아웃이 온 건가?
복합적인 듯하다.
(설레지 않는 나이 + 체력의 고갈 + 마음의병 + 정신적스트레스) × 번아웃 = 정지
그래서 나가기 싫고 나아가지도 못하는가 보다. 자연인처럼 산속에 틀어박혀 있으면 몸과 마음의 건강이 회복될까? 그 누구도 없는 곳에서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거 안 쳐다보고, 황토 구들방 같은 데서 책 보고 음악 들으며 딱 한 달만 쉬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래서들 귀촌을 하나? 귀촌한 사람들은 젊어서 힘 있을 때 귀촌하던가, 늙어서 돈 많이 갖고 귀촌하는 걸 추천한다고 그런다. 젊지만 힘 없는 사람은 돈만 많이 갖고 가면 되나? 내가 생각하는 귀촌은 마을의 사람들이나 문화, 업에 의탁하여 어울려가는 귀촌이 아닌, 자연에 귀의하는 걸 의미한다. 사람들이 귀찮아서 사람 없는 곳에 가고픈데, 조용한 곳에까지 가서 사람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싶진 않은 거다. 따라서 정확히는 귀촌이 아닌 연례적 자연인이 되고픈 소망이라 봐야 할 것이다.
자연인으로서 산속에 한두 집 있는 황토집에 있는 상상을 해본다. 이웃집엔 노부부가 앞마당과 텃밭을 멋지게 가꾸어 놓고 살고 있을 것이고, 무뚝뚝하신 할아버지 곁의 할머니가 가끔 오는 나를 말동무로 반기며 맞아주시겠지? 아마 할머니의 옷에서는 군불 떼는 나무연기 냄새가 나겠지. 할머니 수다의 대부분은 할아버지 흉보기와 도시 나간 자식들 자랑이겠지. 말하고 듣는 것이 직업인 만큼 아마 최선을 다해 들어드리는 나를 아마도 할머니가 많이 이뻐해 주실 거야. 할머니와의 수다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마루에 앉아 맥심 커피 한잔을 타고 산내음에 녹아나는 커피 향을 향미 하며 잠시 달콤한 기분에 취해있늘 무렵. 이쯤에서 드는 현실적인 타격.
자연인이 되면 멧돼지한테 들이받치려나? 뱀에 물려가려나? 독거미나 벌 같은 곤충에 쏘여 죽을 수도 있을까? 어차피 난 자연인이 되더라도 밖에 나가질 않을 건데 멧돼지나 뱀, 곤충들이 집 안까지 쳐들어오지 않는 한 그럴 일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자연인의 삶이란 자연과 어울려 자연 중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사는 삶을 말하는데 난 자연의 일부만을 이용하려 했던 걸 자연인으로 착각한 건 아닐까? 가령, 황토, 산 공기, 흙마당에 떨어지는 비, 구들장, 밤하늘의 별들, 조용한 정적... 이런 걸 누리고 싶어서 자연인이 되고픈 로망을 지녔지만, 멧돼지, 뱀, 벌레는 자연 아닌가? 비만 오면 밀림이 되는 시골집의 앞뒷마당은 어쩔 거며, 고문 수준의 산속 추위야 말로 자연 그 자체거늘! 특히 내가 질색팔색을 하는 새들이 종류별로 있을 것이고, 개나 고양이는 공포 그 자체인 내가 감히 자연인을 하겠다고? 사실 난 자연을 별로 안 좋아하면서 자연인 로망을 갖고 있었다.
방학 끝나기 전에 황토펜션에 한 이틀 묵고 와야겠다. 어쩔 수 없이 9월부터는 나가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내게 내리는 응급처치이다. 꼭 혼자만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