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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밖 백선생 Nov 03. 2021

봄은 가을을 꿈꾸고, 가을은 봄을 품고

[은교](2012)

[은교](2012)

감독: 정지우

출연: 박해일, 김무열, 김고은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이 영화는 포스터부터가 거부감이 팍팍 들었다.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문예물 중 원조교제라는 주제만큼 우리 사회에서 민감한 알레르기 반응을 가져다주는 주제가 있을까 싶다. 어찌 보면 불륜보다도 더 거부감이 많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스승과 제자가 여고생의 육체를 탐하는 이야기라니! 이런 영화는 시간이 남아돌아도 보아서는 안 된다 생각했거늘! 그러나 나와 감수성이 통하는 언니가 괜찮다길래 언니 믿고 본 영화.


첫째 그 노인이 박해일이어서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일 때는 박해일인지 상상도 못 했다가 그 할아버지가 젊어지는 장면에서 박해일이 나오길래, 처음엔 그가 카메오로 출연한 줄 알았다.

그가 스크린에서 보여줬던 다양한 캐릭터 속에는 늘 어딘지 모르게 앳된 그만의 얼굴로 인해 뭇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하기 충분했는데, 그의 노인 분장은 그만의 얼굴을 완전히 날려버리기 충분했다. 개인적으로 내가 이 영화에서 느낀 최고의 반전이었다.


둘째, 포스터가 이 영화를 망친 듯하다. 이 영화는 원조교제 혹은 스승과 제자의 삼각관계라 설명되긴 너무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람의 내면을 담고 있다. 누구를 겨냥한 문구였는지는 몰라도 이 영화를 홍보하는 문구로는 최악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감수성을, 가장 거부감 들기 좋은 단어를 끌어들여 생매장시킨 꼬락서니이다. 꼴도 아닌 꼬락서니라는 단어가 딱인 포스터.


셋째, 참 아름다웠다. 늦가을에 풍성함을 선물하고 소진되는 자연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이 숙연해하듯, 또한 그 자연이 갖는 고귀한 아름다움처럼. 숭고미와 비장미가 함께 내재한 노인의 내면에 아직껏 살아있는 봄의 피어남, 그때의 간지러움, 풋내. 그건 그리운 게 아니라 그저 갖고 있는 채로 시간만 간 것일 뿐. 누구에게나 아직까지 품고 있는 내 것이다.

그저 그 나이에 맞도록 강제된 관습으로 인해 나이에 맞는 옷을 입고 머리 모양을 하고 말투를 쓸 뿐이지, 우리에겐 늘 내가 끌리고 투혼 할 수 있는 대상이 늘 봄으로든 여름으로든 가을 혹은 겨울이라 할 지라도 다 속에 있을 뿐이다.

노인의 내면에 있는 봄이 은교이고, 은교의 내면에서 달려갔던 늦가을이 노인이 듯. 그것이 공대생에겐 세상에서 규율된 옷과 머리 모양과 말투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고, 또한 우리는 어딘가 다들 조금씩 이 공대생처럼 비열하고 어찌 보면 쉽기까지 한 길을 선택하여 걷는 것이니.

평탄하길 바라는 소시민으로 공대생처럼 살기를 택하길 마다하지 않는 평범한 우리이지만, 우리의 내면에서 아직도 피어나는 봄, 강렬한 여름, 풍성했다 소진되는 가을, 모두 떠난 겨울을 보며 다들 아름다운 것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감수성. 그게 있기에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를 일깨우는 영화.


난 <은교>를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로 보았다. 그런데 포스터 꼬락서니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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