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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밖 백선생 Nov 02. 2021

사랑임을 깨닫는 순간 놔버릴 수밖에 없는 사랑

[아일랜드] (2004) "진짜 중아네."

[아일랜드] (2004)

극본 인정옥/출연 이나영, 김민준, 현빈, 김민정


이중아. 'Jung'라는 글자를 '중'으로도 읽고, '정'으로도 읽기에 그녀는 이름부터가 이중이다. 중아인지 정아인지, 한국인인지 아일랜드인인지... 이 드라마에서 중아가 겪었던 아픔은 불륜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었다. 정체성의 문제였다.

어린 시절 아일랜드로 입양된 중아는 자신의 가족이 눈앞에서 살해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다. 순식간에 가족을 잃어버린 그녀는 무작정 한국으로 온다.


삶 속에서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건 바로 잃어버림이라는, 상실이라는 상처일 것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 즉, 가족, 친구, 애인과의 결별은 이 상실의 고통의 최고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어마어마한 고통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던 중아는 살짝 정상이 아닌 모습으로 한국에 오게 되는데, 이 여린 여성의 비정상적인 모습이 희한하게도 강국에겐 엉뚱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의외성에 하염없이 빠져들게 된 국이 곁에 있음은 당시 잃어버린 가족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 같아 중아는 잠시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게 사랑인 줄 알고 결혼을 했다.


행복한 줄 알았지만 중아는 어딘가 모를 답답함이 국에게 느껴진다. 잘 생기고 착하고 일도 잘한다. 심지어 보디가드이다 보니 여성들이 꿈꾸는 로망, 즉 곁에서 지켜주는 남자, 든든함? 이런 모든 걸 다 해주는 최고의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녀 식의 트라우마 극복을 인정해주지 못했다. 의사였던 중아가 다시 일을 시작하며 자신을 찾으려 하지만, 국은 중아가 다시 피를 보면 가족들이 죽는 장면을 떠올리며 괴로울 거라 걱정한다. 중아에게 친모 만나기는 너무나 어려운 과제였지만, 국은 방송까지 나가서 중아와 협의된 적도 없는 친모를 찾아 나선다.

누가 봐도 국의 중아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었고 헌신적이었지만, 중아는 진정 자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잣대에 맞춰져서 자기 방식대로 중아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려는 국의 사랑이, 사랑인 듯하지만 사랑 아닌 그 무엇을 느낀다.


그때 우연처럼 나타난 재복이. 덩치는 남산만 한 장정이 여자아이들이 쓰는 사탕 끈으로 머리를 묶고, 빨간 리본핀을 머리에 꽂고 다니는 참으로 희한한 남자. 게다가 동거녀 집에 얹혀사는 백수이다. 그 어떤 여자도 딱 질색일 것 같은 그런 재복은 남들 다 있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남들에겐 흔히 없는 딱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바로 마음을 보는 눈이다.

마음을 보는 눈은 주변 사람들의 삶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가능하다. 그저 툭툭 던지며 막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의 마음은 늘 널따랬고, 그의 눈의 포근했고, 그의 말은 참으로 따뜻했다. 비단 중아에게만 그랬던 건 아니다. 동거녀와 그 가족, 주변 이웃들 등. 그의 그 이쁜 품성은 일부러 그러는 척하는 게 아니라 원래 타고나길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국은 어떻게 보이는 데 신경을 많이 쓰는 캐릭터였다. 실제로 멋진 남자인 건 맞았지만 자기식으로 체화된 매력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에 맞춰진 멋이었기에, 타인들의 생각의 평균치를 찾아 맞춰 사는 게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다. 반면 타인의 시선보다는 사람들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재복은 시선이 아닌 마음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의사 가운을 받은 중아는 이제 자기 안에서 조금씩 과거의 상처가 추슬러지고 원래의 업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는 시도를 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런 내면의 발전에 대해 가장 축하를 받고 싶었던 남편인 국에게서 축하는커녕, 오히려 넌 환자인데 라는 소리만 들었을 때. 자신이 과거에 상처가 깊었던 건 사실이지만 국 덕분에 어떻게든 잊을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 이젠 자신의 마음에서 그 과거를 빠져나와 자신의 인생은 살려하는 발걸음에 넌 아직 걸을 수 없다는 식으로 초치는 말은 다시금 상처가 되어 정처 없이 방황하게 된다. 그러던 중 만난 재복. 중아의 의사 가운을 보며 진심 어리게 축하해주고, 그 좋은 거 나도 입어보자며 중아의 의사 가운을 입어보는 장면은 사람에게 매 순간 진심인 사람은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머리에 꽂은 그 이상한 머리핀이나 머리끈도 아마 그 또래의 어떤 아이의 마음을 봐주며 함께 꽂은 것일 수도 있으리라는 짐작에 그 이상한 패션마저 따뜻하게 만드는 재복이.


중아가 이렇게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를 받고 있는 사이 어느새 마음에 자라고 있었던 서로의 사랑을 깨달아버린다. 깨닫는 순간 돌아서야 했던 사랑이었다. 자신의 내면에 자라고 있던 마음을 스스로 몰랐을 때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서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 거, 외롭거나 힘들 때 집에 가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얼굴 보며 위로받는 게 그저 따뜻하였지만. 그게 다 사랑이었음을 깨달아버리면 또한 놔버려야 하는 상실의 고통을 다시 또 감내해야 했던 모순된 사랑이었던 것이다. 진전될 수 없는 사랑이었고, 있지만 비워내야 했고, 처음부터 상실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국도 이 사실을 알게 되지만 국 역시 재복이를 미워할 수가 없다. 그 묘한 매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연적이나 미워하진 못하겠는 재복이의 매력. 그러나 알고 싶진 않다. 국 역시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국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중아는 국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이혼을 감행한다. 재복을 선택하기 위한 이혼이 아니다. 중아가 자신의 상실의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채 홀로 서지 못함을 결혼으로 대신했던 선택이 잘못됐음을 각성했던 결과다. 즉 이 결혼은 시작부터가 잘못됐기 때문에 삐그덕 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아가 남편에게서 정작 원했던 건,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바라봐주고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주면서 함께하는 "우리"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은 중아가 아닌 국에 의해 해석된 중아를 상상하며 진정 중아를 못 봐주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라면 또 중아는 재복이의 따뜻함이 그리울 것이므로, 어렵게 멈췄던 사랑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할 것임을 안 것이다.

열린 결말로 끝이 났지만, 아마 중아는 철저히 혼자서 자신을 찾아가는 길을 갔을 것이다. 그 길에는 아이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을 것이고 그 아이가 힘이 됐을 것이다. 중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물어가며 상처 받고 눈물 흘리고 또한 스스로의 방식으로 치유하며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 열린 결말은 아마 중아가 그런 삶을 살 거라는 믿음을 심어주며 끝이 난다.


이 드라마가 내 인생 드라마로 단연 으뜸인 이유는, 이 드라마는 단순한 멜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한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젊은 시절에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로 고통스러운 상황이 발생하면 사랑으로 도피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도 그런 적이 있었고, 미성숙했을 당시에는 한두 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랑으로의 도피는 너무나 처참하다. 내가 이 드라마를 보며 오열했던 2004년이 바로 그런 때였다. 3년을 만난 남자랑 헤어진 후 그 사랑에 대한 성찰을 통해 나를 성찰했던 시기. 그 사랑이 바로 내 미성숙한 인성의 도피로 시작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끝난 후 내가 깨달았던 문제점이 바로 중아가 느낀 그 마음이었다. 따라서 철저히 나를 부숴버려야 했던 때에 만난 드라마여서 그 누구보다 공감했고, 그때의 내가 결심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벗어난 다른 어딘가로 도망가는 일은 절대 하지 말자고. 특히 사랑으로의 도피는 나에게만 무책임한 게 아니라 상대에게도 죄를 짓는 거라고. 해결되지 못하면 놔둔 채로  묻어버릴 망정 절대 다른 것으로 무마시켜서는 안 되는 거라고.

따라서 반드시 혼자가 돼서 나를 부서뜨린 후 끝까지 남는 알곡만을 갖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그렇게 나의 정체성을 찾고 홀로 선 뒤에야만 가능한 것이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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