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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밖 백선생 Nov 02. 2021

우리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스쳐갈 뿐...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6) "소유냐 존재냐"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6) "소유냐 존재냐"

감독: 시드니 폴락

출연: 메릴 스트립(카렌), 로버트 레드포드(데니스)

 

 

  36년생인 로버트의 86년 영화이므로 당시 로버트의 나이는 50 정도가 되었을 것 같다. 얼굴의 주름이 꽤 자글자글했지만, 그 선명한 푸른 눈에서 풍겨져 나오는 귀족적인 외향은 애니메이션 [들장미 소녀 캔디]에 나오는 안소니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49년생인 메릴 스트립과 13년이나 차이가 나지만, 젊고 활기 넘치는 짱짱한 외모의 메릴 스트립과 깊은 잔주름 속에 고혹적으로 빛을 발하는 그 그윽한 눈빛, 음성이 참으로 잘 어울렸다.


  정말 할 말이 많은 영화이다. 이 영화는 시간을 잡아 놓고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뜯어보고 싶은 대작이자 명작이자 수작이라 여겨진다. 물론 영화 속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 침탈, 원주민에 대한 지배/피지배 구조, 백인 우월주의 등 봐내기 불편한 장면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건 차후의 논외로 하고, 이 영화를 처음 본 사람으로서 가장 크게 가슴을 두드리는 하나에만 집중하고 싶다.


  로버트가 연기한 데니스라는 인물은 흔히 말하는 '나쁜 남자'일 수 있다. 한 여성의 마음에 훅 들어와서는 자신이 편할 대로 왔다 갔다 하는 바람 같은 남자. 농장을 일구고, 사람들을 보살피며 정착하기를 원하는 카렌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데니스. 그는 탐험가이다. 비행기를 타고 자유롭게 비상하다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잠시 머물고, 다시 탐험을 떠나는, 정착이라는 것을 도통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농장과 비행기로 상징되는 카렌과 데니스가 추구하는 삶이 서로 충돌하는 지점에서 나왔던 그 주옥같은 대사들은 바로 우리가 살면서 '소유'한다고 믿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정체감을 묻게 만든다.

 

  "우린 소유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스쳐갈 뿐이지..."(데니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로의 '소유'가 되지 않길 원하는 데니스의 이 말은 참으로 나쁜 남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되씹으면, 나라고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했던 적이 있었던가? 다시,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내가 그 사람의 소유가 된 적이 있었던가? 부모든, 자식이든, 배우자든, 친구든, 연인이든 간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 "존재"할 뿐이지, 그 대상을 "소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사랑하는 마음이 강렬하기에 대상을 소유했다고 착각할 뿐이며, 그 착각 속에서 부리는 대상에 대한 욕심이 모든 마찰의 불씨가 되고, 마찰로 인한 투쟁의 불을 장렬하게 태운 이후에야 사랑의 대상에 대한 소유가 착각임을 자각게 되는 것이다. 그런 투쟁을 통한 조정의 과정을 겪으면 대상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교류하는 '존재'로서 예우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린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스쳐갈 뿐인 거지. 데니스의 말처럼...


  많은 여성들이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데니스가 카렌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을 꼽으며, 이상형으로 머리 감겨주는 남자를 말한다. 요즘에는 남자 미용사들이 워낙 많아 미용실 가면 남자들이 머리를 많이 감겨주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인지, 난 사실 이 장면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86년 당시는 여성들의 로망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꼽는 명장면은 데니스의 장례식에서 카렌이 그를 추모하며 떨리는 손으로 흙을 한 줌 쥐고 데니스의 관 위에 흙을 붓다가, 나머지 흙을 그녀의 머리에 뿌리는 그 장면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데니스 조지 핀치 햇튼의 영혼을 데려가세요. 우리에게 보내 주셨던 그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고... 우린 그를 사랑했어요. 우리 소유도 아니었고... 내 것도 아니었죠."(카렌)

 

 한용운 시인의 "님은 나를 떠났지만, 난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지구 상의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조물주의 소유이다. 소유할 수 있는 주체는 오로지 조물주만이 가능하다. 데니스 역시 조물주의 소유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내주는 것도, 다시 그의 품으로 데려가는 것도 모두 조물주의 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단지 보내준 소중한 존재를 통해 기쁨을 얻고, 사랑을 나눌 뿐. 그러나 그 '존재'는 영원히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는 내 것이 될 수 없고, 내게 남은 건 그를 사랑했던, 아니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마음뿐인 것이다.


  따라서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은 가고 없는 이 어마어마한 '상실의 장소'에, '아직까지 존재'하는 나의 사랑하는 마음에 같은 흙을 뿌리며... 그렇게라도 '내 속에 존재'하는 '사랑'과 '상실감'을 모두 위안하고 싶은 그 처절한 존재의 아픔, 그 속에서도 궁극적으로 내 것이 아니라고 고백해야 하는... 실존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뼈아프게 생각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장면. 보이는 것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이지 않고 감각화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움직이는 동력이 됨을 다시 한번 깨우치게 한 명장면이다.


  소유냐, 존재냐. '감각화되어 내 곁에 고정'할 수 있는 것이냐, 실체도 없이 '오로지 느낄 수만 있음으로써 내 안에서 존재화'되는 것이냐. 영원한 내 것이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소유란 상실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상실은 없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보다 오히려 훨씬 더 강력하게 존재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스쳐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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