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열심히 사랑했잖아. 그리고 열심히 잊었잖아.
[싱글즈](2003) 열심히 잊었잖아...
[싱글즈](2003)
감독: 권칠인
출연: 장진영, 이범수, 엄정화, 김주혁
정말 간만에 킥킥 웃었다. 내가 원래 영화 보는 취향이 하나를 집중해서 돌려보는 스타일인데 결혼 전에는 이 영화가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주로 틀어놓고 자는 쪽이긴 했지만. 무료 영화에 뜨길래 옛 생각도 나고 해서 다시 보게 된 영화.
결혼 전과 결혼 후 이렇게 감상이 다를 줄이야! 결혼 전에는 동미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캐릭터이었다. 너무나 자유분방하다 못해 친구의 아이를 임신하고 홧김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창업을 해버리는. 영화니까 가능한 캐릭터라 생각했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12년을 산 지금에 와서야 동미가 참 순수하고 성숙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결혼 전에는 성에 대한 억압된 사회적 인식이 있었고, 내가 당시에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과하게 개방적인 동미나 나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었던 같다. 여성으로서 성차별이나 성희롱당하는 모습보다는 이 여주인공들의 과한 개방성이 더 불편했던 당시. 나 역시 얼마나 큰 성차별과 성희롱에 노출되어 익숙했으면 그랬을까.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짓거리들을 과감 없이 보여주는 직장 성차별과 성희롱 모습이 이제 와서야 더욱 불편했던 것은 우리 세대가 젊을 때 겪어내야 했던 동종의 분노를 웃어넘기며 삭여 익숙해져야 했던 이중성이 갖는 모순과 상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장신영과 김주혁이 참 그리웠다. 급하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당시 싱글즈들에게 유행시키기도 했었지. 자신만을 사랑해주고 자신의 성장을 응원하며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는 김주혁의 캐릭터는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의 로망이 되는 사기 캐릭터일 것이다.
나 역시 당시 저런 남성 없나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맘이 끌리는 남자로는 들어오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소개를 받는 자리에서나 개인적 친분의 자리에서 느껴지는 오만함이 아마도 당시 그런 남성들을 걸러내는 거름망으로 작용한 듯.
어떠한 인간관계든 불공정한 거래는 뒤탈이 있기 마련. 나난이 김주혁을 따라 미국에 갔다면 아마 패션 공부하기 어려웠을 것은 명약관화함이 기혼자인 내겐 보였으니!
미국서 아이 낳고 애 키우다가 시간 다 보내고, 남편은 육아가 뭔지도 모른 채 공부시켜주려는데 왜 안 하냐고 한심해할 것이고, 나난은 자신을 비관하며 우울하게 지내겠지.
이런 그림이 결혼 전에는 안 보였어도, 불공정해 보이는 남녀관계는 시작도 안 했던 건 정말 잘 한 일인 듯. 그땐 불공정해 보이는 거래라 나난의 선택이 이해됐다면, 지금은 현실적인 이유에서 나난이 현명했다 느껴진다.
같은 이유로 동미도 멋지다. 남녀관계에 대한 현실적인 기준을 정하고 그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동미. 나에게 온 생명을 소중히 하고 사회적 편견에 연연하지 않으며 과감히 미혼모의 길을 선택하는 동미. 그리고 그 든든한 지원자 난.
재고 따지기보다는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잊어주는 동미와 난.
17년이 지나도 여전히 명화인, 오히려 세월의 경험에 빗대어 보면 더욱 빛나는 영화, <싱글즈>. 내가 15년 전 이 영화에서 나오는 김주혁의 이 대사를 참 좋아했다.
"그 사람... 열심히 사랑했잖아... 그리고... 열심히 잊었잖아..."
그 당시 나를 폭풍 오열하게 만들었던 그 명대사를 말하던 김주혁. 참 그리운 오늘이다. 장신영의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