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밖 백선생 Nov 18. 2021

잔혹동화 속 도련님의 현타 수기

슬로우 웨스트(2015)


감독: 존 맥클린

출연: 마이클 패스벤더, 벤 멘델슨, 로리 맥간, 코디 스밋 맥피


  옛말에 물가에 애 내놓은 것 같다는 말이 이 영화 속 제이 같은 경우를 가리킴이라. 보는 내내 저 순진한 어린 남자가 어찌 될는지 꽤나 쪼여들게 만든 영화.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서부영화를 좋아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난 정작 끝까지 본 건 없다. 늘 지루했기에 보다가 얼마 안 돼서 자기 일수. 내겐 아주 두꺼운 철학책 독서가 차라리 더 나을 정도로 서부영화는 잘 모르는 분야.

그래서 처음에 다 보고 나서는 이게 뭐야, 별 싱거운 놈 다 봤네 하며 시간이 아깝다고 욕을 바가지로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잔상이 강하고 장면 장면이 불쑥 툭 튀어나오는데 뜨악. 영화 관계자들에게 평가가 좋은 게 이런 이유에서였나?

  저걸 실사로 본다면 내 평생 다른 소원이 없을 것 같았던 밤하늘 속 별들의 향연. 무슨 서부의 황무지가 저토록 아름답지 싶었던, 땅의 생명력이 가득한 대지와 자연.

아이들 동화책 배경 같았던 그 아름답고 멋들어진 배경 속에서, 배경보다 더 동화 같은 남자가 튀어나와 여행을 떠나는 초기 장면까지는 영상미를 선사하는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 동화는 인디언을 사냥하는 군인들의 살벌한 총질과 그를 아무런 감정도 없이 쏴 죽이는 한 남자의 등장에서 확 깬다고 해야 하나? 어이, 동화 속 도련님아, 정신 차리소! 여긴 서부개척시대의 무법천지라고! 도저히 정신 차릴 생각 없는 이 도련님은 동화 나라에서 꿈을 꾸고 있고 보는 관객은 한편으로는 깝깝하면서도 이 무법천지를 헤쳐가는 이 동화 속 어린 왕자 같은 도련님이 직면할 상황이나 해법이 궁금하다.


사실 이 동화 속 도련님 제이가 나 같았다. 나 역시 현실감 제로인 몽상가이다 보니 주위의 현실주의자들에게 질책당하거나 외면당하거나 단절당하기가 늘 일상이다 보니. 영화다운 반전을 기대하여 몽상가의 승리를 기대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토록 동화적인 배경이나 주인공을 내세웠음에도 철저히 현실적으로 동화와 몽상가를 죽여버리는 영화. 어찌 보면 내게도 정신 차리라고 말하고 있는 영화로 느껴졌다. 그러니 그리 얻어터지고 있는 게야 하면서.


  그녀가 그토록 동경하던 애인에게 총 맞아 죽고, 그의 곁에서 처음에는 불순한 목적으로 경호를 자청하다가 그의 순수함에 변화되고 있었던 사일러스가 그의 애인과 결혼하는 결말은. 해피하지도 씁쓸하지도 않은 채. 그냥 다 그런 거 아냐하며 냉소케 하는. 그래서 처음에는 욕을 바가지로, 나중엔 계속 되새겨지는 마력을 발휘한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욕을 바가지로 했던 이유는, 아마 이 영화가 지닌 아직까지도 나를 견인하는 큰 힘인 동심 파괴 서사구조와 결말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계속 생각난 이유는 이게 현실인 줄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아직껏 어른이 되지 못한 채로 어른 혹은 기성세대로 불리며 살아가고 있는 내가 보기엔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은 영화였던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