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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밖 백선생 Nov 26. 2021

이젠 눈물조차 나오지도 않는다

82년생 김지영


  많이들 울더라고 그러던데, 난 글쎄... 공감도 됐으나 이미 굳은살이 배겨서일까? 페미니즘이고 뭐고 간에, 그냥 이 세계는 그렇다. 자기 아들이 최고인 시어머니, 자기 딸이 안 아프길 바라는 친정엄마. 다들 어머니이다. 이 모성이 "메이드 인 자신"인 경우는 절대적이나, 자기 딸과 아들과 사는 남의 아들과 딸에겐 절대치의 자기 자녀의 편에서 상대적으로 괴롭게 만드는 구조. 딸과 사는 사위는 그 능력에 따라 좀 더 예우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아들과 사는 며느리에겐 한결같은 상대적 괴롭힘. 그렇게 갉다가 맘충으로까지 몰아세우는 담론은 결국 어디서 오는 개어이인지!


  내 자식 소중하면 내 자식이랑 사는 그 배우자는 더 소중히 예우해줘야 하는데. 이유는 내가 키우지 않은 채로 성인이 되어서 온 내 자식이니. 저 자식 낳으려면 누군가 하늘이 노래질 만큼 배아팠을 것이고 안 죽고 살아서 내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누군가의 헌신과 정성과 사랑 덩어리인 것을. 내 자식에 대한 절대치의 늪에서 행여 내 새끼 손해 볼까 싶어 노심초사하며 경계하고 수도 없이 의심하며 각을 세우니 이 땅의 며느리들이 죄다 이 상영관을 눈물바다로 만들게 하는 거 아닌가!


  그러니 무조건 아들로 태어나라는 무언의 압박과 편애로  고 할퀴는 이상한 집구석들을 방치하고 방종하는 것도 시아버지가 장인어른들이었고. 딸 가진 죄인이란 서사는 아마도 이런 무능함이 만든 괴물이겠지.


  많이 울까 봐 못 보고 있었는데 난 오히려 울진 않았다. 내 나름대로 여기에 대해서는 답을 낸 게 있으니. 집안에서 착한 것이  자신과 자신의 배우자, 그리고 그 자식들에게 전혀 득 될 것 없고. 궁극적으로 그 원가족에게도 잘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따라서 김지영이 노발대발하는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앞으로는 울지 않을 사회를 조금씩 만들어가 보는 것은.

내가 가정에서 지금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고 내 아이들의 가정에 그리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


  난 어느 정도 정리된 영역이어서였는지 그냥 차분했다. 단. 갓난아기 때부터 애들을 어린이집 종일반에 맡겼던 내가 정말 잘못된 엄마였는지가 이 영화를 보면서 의문이 들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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