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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밖 백선생 Nov 10. 2021

연기의 신들린 리스트!

[디 아워스(The Hours)](2002) 특정 시간 속에 갇혀버린 사

[디 아워스(The Hours)](2002) 연기의 신들린 리스트!

감독: 스티븐 달드리

출연: 니콜 키드먼(1923-버지니아 울프), 줄리안 무어(1951-로라 브라운), 메릴 스트립(2001-클라리사 본)


  정말 미쳤다. 메릴 스트립과 니콜 키드먼은 잘 아는 배우이지만 줄리안 무어는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된 배우이다. 엊그제 본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메릴 스트립의 연기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의 연기에 다시 한번 반하게 된.


  최근 멋있다는 말을 듣는 여성이 참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직업, 위치, 능력에 대한 객관화된 긍정 표현의 말이 '멋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그녀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느끼는가에 주관화된 긍정의 표현은 무엇인가가 딱히 없는. 이쁘다? 귀엽다? 글쎄... 그런 말이 듣기 좋을 줄 알았지만, 막상 옆구리 찔러 겨우 나오는 말 듣고 나면 더욱 기분 더러워지는.


  여성에 대한 '멋있다'는 표현은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직업여성을 매우 외롭게 만드는 말이기도 했다. 이런 느낌을 남도 아닌 가족도 몰라줄 때도 많기 때문에, 콕 찍어서 말을 해야 겨우 '그런가?' 싶은 무딘 사람들 속에서 갑갑하고 더욱 외롭게 느껴지는 말이 바로 '멋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난 이 영화에서 보여준 이 세 여배우의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미치도록 멋있다'는 말 이외의 표현이 찾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런 영혼 없이 툭 던지는 '멋있다'는 표현에 외로웠던 것이지, 진심 어린 애정으로 '멋있다'라는 말을 해준다면 아마 이 표현은 정말 최고의 찬사가 될 수 있겠구나 싶은, 따라서 '멋있다'는 단어에 대한 재성찰을 다시금 하게 된 세 여배우의 연기였다. 즉 우린 영혼 없이 내뱉는 인사치렛말, 진심 없이 터져 나오는 우스갯소리로 쓰이는 단어들에서 느껴지는 쓰레기 같은 기분 때문에, 너무나 좋은 단어들 역시 휴지통에 너무 쉽게 구겨 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미치도록 멋졌던 세 여배우의 연기였다. 이들의 연기를 모아놓은 이 영화는 가히 '연기의 신들린 리스트'라 할 만했다.


  이 영화는 어떤 특정 시간 속에 갇혀버린 사람들에 대한 영화라고 느낀다. 시간은 흘러 쌓이는 것처럼 보여도, 어떤 특정 시간에 갇혀버려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사람은 그냥 거기에 묶인 채 시간을 흘려보내며, 아무것도 변하지 못한 채로 늙어간다. 나를 찾기 위한 투쟁의 시간들이라고 느꼈던 그 어마어마한 불멸의 고통과 함께한 '시간(hour)'은 쌓이고 쌓여 궁극적으로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시간들(hours)'로 점철된다. 어떤 특정 과거에 갇혀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찾아오는 그 고통에 만신창이가 된 채로 종일 두들겨 맞고 마무리하는 하루. 또 하루, 또 하루. 이렇게 반복되는 하루들로 인해 아침이 되어 눈을 뜨는 것마저 두려운 지경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하루가 그냥 그 사람의 일생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누군가는 상처 받은 과거에 갇힌 채로, 누군가는 정체모를 괴로움에 고통받는 현재에 갇힌 채로, 누군가는 불안한 미래에 갇힌 채로. 그렇게 시간이라는 감옥에서 끝도 없이 고통받으며. 궁극적으로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선택하는 길. 고통뿐인 고문 같은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 바로 삶을 버리는 것.


  [세바시]에 출연한 이지훈 변호사는 우울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과거의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살 수 없는 상태"라고. 거의 근접한 정의이지만, 조금 더 추가하고 싶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더 나아가면 미래를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 것 즉, 미래를 불안해하기라도 하면 어느 정도 여지가 있는 상태이다. 나 역시 20대 때 매우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었고, 궁극적으로 이로 인해 다시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주님 안에서 우울증을 완치했던 이력이 있는 고로(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에스라 성경강좌'를 통한 성경 공부로 인한 우울증 완치였다), 이 병을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우울증은 내겐 사실 매우 두렵고 겁나는 모습이고,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기독교의 진리에서는 자살은 용납될 수 없다. 자살이야말로 악령의 뜻에 자신을 던져버리는 행위이고, 따라서 이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기본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 역시 사랑이다. 사랑을 주고받으며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사람의 삶이므로 사람의 삶이란 궁극적으로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주체이기도 하고 대상이기도 한 사람이,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를 둘러싼 사랑의 관계망을 너무나 처참히 부서뜨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배반인 것이다. 한 사람의 자살은 이런 사랑이 관계망을 부수고, 그 관계 속에 배반이라는 상처의 독을 심는 행위이며, 그의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퍼뜨리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매우 무책임하고, 부도덕하며, 몰상식한 것이다.  따라서 고통과 마주하고 직면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협의한 적 없이 태어났고, 내 의지로 접해진 세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뜻 없는 존재란 없고, 사명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나의 존재적 가치와 사명을 깨달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난 다시금 스물아홉 살의 10월 가을의 한 새벽이 기억이 났다. 하나님 없이 살던 내 20대는 늘 우울증으로 인한 고통의 '시간'의 연속이었고, 다들 인생에서 가장 이쁜 꽃다운 시절이라는 20대는 내겐 다시는 돌아가기 싫은 '시간들'일뿐이었다. 그 시간들의 끝자락에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았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기적이었던 것 같다. 이런 우울증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보면 꼭 그 가을 그 밤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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