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

난 절대 안 미안해

by 집밖 백선생

13년 차 부부인 우린 어차피 싸움이 되질 않는 남편의 인성으로 인해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일 년에 한두 번 정말 장미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이 벌어질 때가 있다. 어제가 딱 그런 날이었다.

원인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늘 그렇듯. 대전에 강의를 가야는 나와 대전에 모임이 있던 남편이 한 차로 가기로 했다가 어딘가에서 틀어져서 각자 가게 되면서, 내 마음은 이미 법원에 가서 이혼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수업만 아니면 난 아마 법원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재산분할, 아이 양육권 등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면서 대전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분할할 재산이 얼마 없다는 사실에 살짝 울컥했다. 혹여 남편 애들 양육권, 친권 자기가 갖겠다고 버티면 어쩌지 하는 우려감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야 혼자가 돼도 다신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갈 일은 없을 테지만, 저 사람이 혹여 누굴 만나서 재혼했단 소식 들려오면 약 오르는 거 어떻게 견디지? 재혼하는 사람은 무조건 친권, 양육권 포기한다는 조항을 넣을까? 애들이랑 새롭게 살 거처는 어찌 장만하지? 대전으로 다시 갈까? 아님 아예 아무도 함부로 못 오는 제주도나 강원도 두메산골이면 어떨까?

대전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난 맘으론 이혼녀가 돼 있었다. 무언가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나처럼 결혼과 맞지 않는 사람이 엄마라는 책임감으로 오래도 버텼다. 결혼한 그 해, 난 이건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하고 계속 이혼을 요구했지만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바로 임신을 해서 쉽게 빠져나오질 못했다. 한 남자 사랑해서 결혼했을 뿐인데, 그게 무슨 죄라도 되는 마냥 그 남자의 옆자리에 있는 여자를 함부로 대해도 양심에 거리낌 없는 자리 혹은 사람이 당연한 희한한 구조가 이 땅의 기혼녀들의 설 자리를 뿌리째 썩어 들어가게 하고 있다는 현타. 나만 경험하는 건 아닐 거다. 한국 가족과 친지 문화의 구조적 병폐이자 적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해했던 남편이 희생적으로 잘했던 것도 한몫을 해서 13년 결혼생활을 어찌 연명하곤 있지만, 아마 이 적폐가 또 화산 폭발을 하는 날엔 아마도 난 오랜 준비를 실행에 옮길지도 모를 일이다. 간혹 오늘같이 그 잘했던 남편마저 속을 썩이면 기다렸다는 듯 난 바로 이런 상태가 돼버린다.

강의를 하고 대전 지역 대학들을 돌아다니며 할 일을 하다 보니 아침의 그 울분은 어느 정도 잊어버리게 됐지만 이혼 서류는 챙겨가야겠다는 일념 하에 천안 법원을 네비에 찍고 달리는데, 천안에서 일 보다 보니 이미 공무원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도 오늘 일정에 진이 빠져 일단 집으로 퇴근.

집에 와서 다시 2차전이다. 늘 내 기분 맞춰주면서 다 내가 옳다는 남편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늘은 이성적으로 차근차근 따진다. 평소 내가 남편보다 더 이성적이긴 하지만, 남편과의 관계에서만큼은 내가 우기고 막무가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건은 내가 잘못한 게 맞긴 한 거 같다. 그래도 잘못했다고 하기 싫어서 우기고 신경질 부리는 거까지 큰애가 보고 검도관에 갔다.

남편도 화가 났지만 늘 그렇듯 차분히 쌓인 설거지를 한다. 나도 양심이란 게 있는지라 미안하다는 말은 못 해도 남편에게 백허그를 한다. 순간 느껴진다. 남편의 안도의 한숨을. 내가 툭 던진다.

"뒤 돌아."

기다렸다는 듯 뒤를 돌아 안아주는 남편. 그런 와중에도 끝까지 미안하다고 안 하고 남편을 몰아세우는 나.

"앞으로 또 그러면 용서 안 해줄 거야."

"미안해."

내가 미안할 일이지만 늘 사과는 남편이.

"미안해? 자꾸 그러니까 내가 못 되지잖아."

"그게 당신 매력이야. 당신처럼 이쁜 여자는 못 돼도 돼."

요즘 내가 제일 듣고 싶은 "이쁘다"는 말을 해줬다. 이쁘단 소리를 들어서 기분이 좋아진 게 아니라, 요즘 내 정서 상태에 관심 가져주고 이해해준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당신도 나쁜 여자 좋아하는구나?"

허허 웃는 남편. 한 시간 후 검도를 마치고 온 큰애는 다시 화기애애해진 집안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뭐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이젠 이미 익숙해져 버린 부부싸움의 패턴화.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도 모르지만, 늘 남편이 미안한 싸움. 아무리 내가 잘못해도 난 절대 미안하다는 말 안 하는 싸움. 진짜 내가 미안할 때는 그냥 백허그 한방이면 다 알아듣고 남편이 미안하다고 말하고 끝나는 싸움. 남편한테만큼은 아껴두고 싶은 말. 미안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모두 다 엊그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