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뿌리지도 않았던 씨앗인데 유독이도 이쁘게 자라주었던 어떤 화초가 마당에 피었을 때. 그 화초에 맘이 빼앗겨 버리며 한 철이 뜨거웠듯이, 계절이 다하여 화초가 지고 상흔처럼 흔적이 남아 외롭게 할 때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잊혀진다. 내가 굳이 사랑하지 않으려 해도 일렁이는 바람맞 듯 그렇게 내 전신을 휘감다가, 내가 굳이 잊으려 하지 않아도 때 되면 맘이 식어진다.
일찍이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 가열차게 열정이 오를 때는 나도 감당이 안 돼서 그 열기를 식히느라 진땀을 빼다가도, 어느 순간 그게 식어버리면 그 열정을 향해 달려갈 어떤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사랑도 그랬고, 일도 그랬다. 누군가에게 쉽게 정을 주긴 쉬워도 쉽게 정을 떼긴 어려운 사람인데. 알아서 차갑게 식어버린다. 어떤 에너지도 없이, 어떤 미련도 없이. 나도 이럴 땐 내가 무섭다.
대학 때 버스를 타고 가다가 만년교 위를 달리는데, 갑천변으로 쭉 늘어선 가로등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그 가로등에서 뿜어오를 열기도 함께 느껴져서 창문을 만지는데, 창문의 차가운 온도와 눈에 보이는 가로등의 뜨거운 열정이 사뭇 모순적이었다. 식어버리다 못해 얼어버린 열정이 그렇게 버스 유리창 뒤로 박제되어 있었다.
그 무렵. 난 어떤 이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정리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대학 때 내 짝사랑의 패턴이 늘 그랬다. 어느 순간 훅 맘에 들어와 버리다가 휙 하고 날아갔다.
말없이 사랑했다가 말없이 보내줬던 내 마음의 순간적인 일렁임 정도였기에 그닥 상처도 남진 않았다. 단지, 그 일렁일 때의 설렘은 그 어떤 달콤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여서, 아직도 그 설렘은 내 속에 남아있다. 대체로 내가 짝사랑하는 남자들에게 애인이 생기면서 내 짝사랑도 끝이 났다. 그냥 멈춰졌고, 그 멈춘 자리에서 설렘으로 인한 열정이 바로 식었다. <겨울왕국>에서 멀쩡하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얼음장으로 변하듯이, 대학시절 내 짝사랑들은 대체로 그렇게 식어서 내 어느 구석에 있다가 알아서 녹아 흘러갔다.
사랑처럼 일에도 그랬다. 나의 맘은 중용이 없다. 늘 끓어오르는 게 있고, 얼음장같이 차갑게 식어 박제된 게 있고. 사람들은 나를 열정으로 기억하고 미친 백민정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건 나의 한 면만이다. 내가 식어서 관심이 자연스럽게 꺼진 부분은 어떤 인간적 온도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식는다. 대체로 내가 많이 사랑했던 대상일수록 더욱 그랬다.
겨울왕국처럼. 내 안에서 다 식어버린 죽은 나라가 있는데, 이게 녹아서 흘러가려고 한다. 아무렇지도 않다. 나도 이 정도로 맘이 닫힐 줄은 몰랐다. 그동안 맘이 많이 다쳐서 그랬는지 닫히는 것은 순식간이다. 어떤 다큐에서 본 남극의 녹은 빙하처럼. 어떤 건 얼음덩이 째 둥둥 떠내려가고, 어떤 건 물이 되어 흘러간다.
며칠 전까지는 너무 아쉬워서 발버둥 치며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브라운관의 다큐를 보는 시청자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다. 한 세계가 무너지고, 내 인생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다. <데미안>의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그래도 괜찮다. 자꾸 내 탓만인 관계 혹은 일이 주었던 지독한 소모전이 이젠 끝난 것 같다. 어쩌면 애초부터 내가 크게 필요치 않았던 걸 나 홀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우스운 자로서의 우스운 위치는 여기까지. 우스운 사람이었다가 우습지 않은 자리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 아마 난 지금 그걸 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