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만난 사람]1. 이쁜 할머니들.

경북 예천군 은풍면 서사마을. 2021.6.10. 목. 오후 5시경.

by 집밖 백선생

오후 인터뷰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도중. 일찍 끝났다기보다는 바쁜 틈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께 더 시간을 끌기 미안해서 평소보다 훨씬 적은 분량의 시간에 압축적으로 담을 수밖에 없었던 터라, 살짝 아쉬움을 뒤로하며 저녁 인터뷰를 기다리던 중. 시골의 작은 교회가 보이길래 평소 궁금했던 차, 차를 잠시 주차하고 마을 주변을 거닐었다.

평화로운 농촌의 풍경에 골고루 퍼지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서서히 걷는데, 마을 회관 앞 정자에 앉아계시는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누구신가 하는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신다. 시골을 방문하면 흔히 있는 일. 이럴 땐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여행하고 있어요. 안녕하세요?"

젊은 사람이 먼저 웃으며 인사하면 시골 어르신들은 언제나 그렇듯 마음의 빗장을 금방 해제하신다. 너털웃음으로 끄덕끄덕. 이렇게 호의적이시라면 또 직업 정신 발휘되지.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선생인데요, 옛날이야기 들으러도 다녀요. 혹시 옛날이야기 잘하시는 어르신이나, 전쟁 얘기 들려주실 분 계실까요?"

"저기 앞에 할머니가 이야기 잘해요."

"네, 감사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앞 집에 할머니 한 세 분이 앉아계신다. 내가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셔서인지 내가 누군가 싶어 쫑긋 바라보신다.

"안녕하세요? 저는 학교 선생이에요.(시골 어르신들은 학교 선생이라고 하면 일단은 신뢰하시는 고로) 옛날이야기 들으러 다니는데요, 여기 할머님께서 이야기 잘하신다고 들어서요."

"그래? 일루 와."

"제가 저기 교회 앞에 차를 대놨거든요. 요 앞으로 옮겨 올 동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얼른 근처 슈퍼에 가서 아쉬운 대로 비타 500 한 상자를 사들고 회관 앞에 주차를 한다. 할머니를 소개해주신 마을 회관 앞 할아버지들께도 한 병 씩 권하면서.

"아이고, 뭘 이런 걸 주니껴! 고마우이더."

인사하고 다시 할머니들께로 간다. 음료수를 건네자, 시골 할머니들 정이라는 게 그 하찮은 음료수 한 병도 그냥 못 받으신다.

"여기 이 할매(가운데)가 나이가 101세라."

101세. 이야기를 잘 하시든 못 하시든, 101세 할머니가 이렇게 건강하게 앉아계시는 존재감만으로도 이야기이다.

"어디서 왔니껴?"

시골 어른들이 꼭 묻는 말씀. 어디서 왔느냐고. 천안이라고 얘기해야 하나, 대전이라고 얘기해야 하나. 천안이 살고 있는 곳이긴 하지만, 천안에 대한 소속감이 별로 없어서.. 일단은 대전이라고.

"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들 이야기를 듣고 책을 쓰기도 합니다. 옛날이야기해주세요."

옆의 할머니가 귀가 잘 안 들리는 101세 할머니의 귀에 가까이 입을 대고 큰소리로 옛날이야기를 하라고 하신다.

옆의 할머니께서 말씀하신다.

"교회 다녀?"

"네. 남편이 목사예요."

"어이? 결혼했어? 난 아가씬 줄 알았네."

"감사합니다."

"아이구, 이쁘네. 우린 옛날에 일만 해서 이쁠 틈이 없었지."

현지 조사 가면 늘 나를 부끄럽게 하는 말. 그네들의 삶 속엔 이쁠 틈이 없었지. 밭일하려 손도 거칠고, 자외선에 주름도 깊게 패이고. 늘상 할머니들은 나를 보며 젊고 이쁘고(절대적인 미의 기준이 아닌, 어르신들이 보기에 젊으면 다 이쁘다고 하는 인사치레 말씀), 또 배울 수 있는 시대의 사람이라는 데 대한 부러움. 할머니들의 이야기 욕구는 사실 여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 부분을 건들면 대하소설감의 이야기들이 주렁주렁 열리지. 그날은 일단 101세 할머니께 집중하기로 하고. 101세 할머니 하시는 이야기들은 설화류는 아니고 그간 살아온 이야기 소소하게...

옆의 할머니들은 계속 내게 이쁘다고 하신다. 어느 현장을 가나 할머니들은 우리 젊은 여성 연구자에게 이쁘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이게 늘 맘 한 구석을 서걱거리게 한다. 이건 순전히 그대들의 세월에 대한 희생을 딛고 시대의 수혜를 받은 우리 세대의 누림이리라. 늘 그게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흙 한 줌 만져보지 않았던 고운 손을 우리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한 저이들의 숭고한 희생에 늘 감사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이 일에 매력을 느끼고 그만 두지 못하고 지금껏 이어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노인은 그냥 스토리텔러가 아니다. 101세 할머니의 저 건장한 앉은 자세 자체가 스토리이고, 나의 고운 손을 이쁘게 바라봐주는 할머니들의 따뜻한 눈빛이 스토리이다. 우리가 험한 생을 살아서 니들 손이 그리 고운 거라는 꼰대 마인드가 아니라, 우린 험한 생을 살아도 니들 손은 고와서 다행이라는 엄마 같은, 할머니 같은 마음.

그래서 이들의 인생을 꼭 담아내겠다 결심했다. 현장에서 겪은 시대, 배경, 사건, 사람, 사랑 모두 모두 다 풀어서 담아내겠다고. 이 원석을 꼭 의미 있는 보석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지가 벌써 20년이다.

눈앞에 닥친 것들 처리하느라 이들의 사랑과 사람과 삶을 많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채로 세월이 너무 흘러, 내 20대의 손을 잡으며 이뻐해 주셨던 할머니들은 다들 고인이 되셨다. 이젠 나도 결심할 때가 온 것 같다. 현실에 치여서 내 인생의 과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걸. 101세의 할머니를 보면서 다시 다짐했다.

이야기판을 정리할 무렵, 유독 내게 호의적이셨던 왼쪽의 할머니분께서 말씀하신다.

"거길랑은 앞으로 늙지도 말고, 지금처럼 이쁘게 있으셔."

눈물이 뚝 떨어질 뻔. 여성은 젊으나 늙으나 계속 이쁘고 싶지. 할머니들도 거울을 들여다보실 때는 다들 당신들의 가장 이뻤을 나이의 얼굴로 들여다보시고 계실 터인데, 시대가 세월이...

"할머니도 이쁘세요."

경북 예천군 은풍면 서사마을. 101세 할머니와 또 다른 할머니들의 이쁜 모습을 꼭꼭 담을게요. 할머니들 정말 이쁘게 사셨구요, 그래서 감사합니다. 할머니들 이쁘셔서 제가 할 일이 앞으로 더 많아졌네요.

정체성이 많이 흔들렸던 요즘. 이쁜 할머니들 덕분에 내 길을 좀 더 확실히 정할 수 있었던 2021년 6월 어느 날 오후의 오마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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