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뼛속까지 산골 사람이셨다. 시골서 농사만 짓다가 군대 가셨던 아빠는 휴가 때 들른 외갓집 동네에서 우연히 엄마를 보고 첫눈에 반하셨다. 엄마의 친정집은 마을 입구 첫 번째 집으로 아빠의 외가에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는 집이었는데, 담장 높이가 아빠의 가슴 정도였기에 마당에 나와 있는 엄마를 목격하기 어렵지 않았다. 엄마의 친정 마을과 아빠의 친가 마을은 예부터 혼담이 자주 오갔다. 큰어머니도 그 동네분이시고, 할머니도 그 동네 분이시다. 할머니는 두 사돈이 모두 친정 마을 사람인 덕에 사돈 간의 정이 유별나게 좋았다.
엄마의 언니, 즉 나의 이모는 아빠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셨다. 이모는 여자이지만 힘이 장사셔서 마을에서는 처녀 농군 났다고 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경북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에 사셔서 월오 이모라고 지칭된다. 월오 이모는 엄마의 남자 형제라고는 외삼촌 하나여서 농사 일손이 부족했던 외갓집의 농사일을 도맡아 하셨다고 한다.
엄마의 절친이신 수미 고모는 아빠와 외종사촌으로 엄마와 이웃으로 살고있었다. 아빠는 수미 고모에게 부탁해서 엄마를 소개받았다. 엄마는 아빠를 별로 맘에 안 들어했다. 이미 아빠의 고종사촌과 동네에서 혼담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빠는 포기하지 않았다. 휴가 이후 군대에서 엄마에게 하루가 멀다 편지 공세를 했고, 아빠로부터 날아온 편지의 글재주와 필체에 반해 엄마의 맘을 얻어 결혼을 하시게 됐다고 한다.
아빠는 글재주가 좋으셨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로 상을 많이 받고 이 길을 가게 된 건 아빠의 DNA이다. 초등학생 때 글짓기 과제가 있으면 원고지를 들고 아빠한테 갔다. 그럼 아빠가 부르고 내가 받아썼다. 그렇게 상을 받아오기를 수차례. 처음에는 아빠 워딩을 받아썼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빠 워딩이 그대로 내게 학습이 되어 지금 글쓰기의 틀이 잡힘으로써 그대로 내 워딩으로 전수되었다. 따로 글쓰기, 논술을 배우지 않아도 쓰는 거는 잘하는 편인 건 모두 아빠 덕이다.
어린 시절 아빠는 [비망록]이라 적힌 아빠의 일기장에 자주 맘을 털어놓곤 하셨다. 난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했다. 사전에서는 두 가지 뜻이 나온다.
아빠의 비망록에는 고향인 문경으로 언젠가는 돌아가리라는 향수가 짙었다. 그러나 엄마는 시골을 진저리 나도록 싫어했다. 그 지역 일대에서 꽤 명망 있던 영월 엄 씨 선비 집안이었던 외조부는 논일, 들일 한번 하지 않으셨다. 그러다 험한 시절 만나 가세가 기울어 처자식을 가난에 떨게 두시니, 자식들이 너무 고생을 했던 것이다. 엄마는 시골을 정말 싫어하셨다. 그런데 아빠의 친가야말로 농사일이 많아도 너무 많은 집안이었던 데다가, 학교가 너무 멀어 교육 여건이 열악하였다. 이게 결정적인 원인이 돼서 결국 일찍 대전으로 나와 자리를 잡은 외삼촌 댁 근처로 분가를 한 것이다. 그때부터 아빠는 지독한 향수가 주는 우울증과 아무것도 없이 가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스스로를 채근하느라 늘 초조하고 긴장된 삶을 이어갔다. 엄마는 엄마가 주장하여 도시로 나온 터라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자 작은 경제 활동이라도 하셨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좋은 공기 마시며 뛰어놀며 자라서이신지 체력이나 건강이 정말 좋으셨다. 70이 넘은 지금도 아빠는 40대 남편보다도 힘이 세시다. 비쩍 마른 체격인데도 말이다. 엄마도 나보다는 체력이 좋은 편이신 건 아마 시골의 자연이 성장의 동력이 되었기 때문으로 믿는다.놀라운 기초체력과 성실성, 특유의 깡다구로 인해 둘은 무일푼 도시 빈민을 탈피하여 5년만에 내집마련을 기점으로 자수성가를 이루어내셨다.
그러는 동안 아빠가 잊지 않으려 기록했던 비망록의 꿈들은 결국 "비망(非望)" 즉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아빠도 포기한 꿈을 난 도대체 왜 붙들고 있었을까? 나야말로 시골에서 살 수 없는 뼛속까지 도시소녀인데 말이다. 벌레나 쥐, 뱀만 보면 혼이 나가고, 시골 사람들 특유 언어나 생활 방식과 소통이 어려운 사람인데.
난 꼭 시골에서 살고 싶었다. 남편 임지도 서로 안 가려는 시골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나를 시골로는 보내시지 않으시려는 듯하다.
아이들과 마당에 떨어지는 비 구경도 하고 싶었고, 마당에서 줄넘기나 고무줄놀이도 하고 싶었고, 들마루에 누워서 책도 읽고 싶었고, 파라솔 같은 데서 커피도 마시고 싶었고, 여름밤에 누워서 별도 구경하고 싶었고, 아궁이 불멍도 매일 하고 싶었건만. 무엇보다 딸이 초6학년이 되면 딸과 [초록지붕 집의 앤]을 읽으며, 앤처럼 자연을 느끼고 상상하고 글을 쓰고 싶었다.
그건 분에 넘치는 비망(非望) 일뿐이었다. 이젠 다 접어야 하는 내 비망(非望)이었음을. 아빠의 비망록을 보면서 자연스레 내게도 전이됐던 향수병은 허위였다. 내가 그간 살았던 16,300여 일 중 1%에 해당하는 163일도 시골에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태어나서 백일은 지내고 대전 나왔다고 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그것보다는 많은 날일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시골의 살았던 날이란 내 내면에서 원형을 이루고 있었던 시골에 대한 추억을 말하는 것이다. 방학 때 며칠 놀다 왔던 그 추억이 내 어린 시절 대부분을 형성한 도시에서 좋았던 기억을 다 밀어버릴 정도로 강력했단 말인가?!
난 전원생활을 오랫동안 동경해오긴 했지만, 전원에서 사는 인연은 주께서 허락지 않으시는 듯하다. 내 사랑하는 빨강머리앤도 우주선을 타고 사라지고 있다. 이제야 긴긴 잠에서 깨어나 내 현실을 본다. 이루지 못한 나의 비망은 내 본향에서 그 분이 이뤄주시겠지. 난 아마 지금 이별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