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死)

번외

by 라한

- 사(死)


사랑한다고 말하진 못했지만 사랑이었다. 처음 그녀를 마주한 기억은 평생 중에 남은 시간을 모두 써도 지워지지 않을 얼룩이었다. 꿈처럼 다가와 꿈처럼 사라진 그녀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가 왔었던 날이었다. 처음 마주했던 날은 봄과 함께 찾아온 여우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그녀는 한 방울의 빗줄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처음이 있었던 만큼 마지막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마지막은 삶의 끝이라 생각했던 재성이었다. 사랑에 끝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재성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채로 서로의 곁을 서성거렸다. 재성은 자기 혼자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저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기만 하였을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가 갑자기 가까워진 날은 처음의 그 날처럼 비가 내렸던 날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건물을 나설 때,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가방 안에 우산이 있었기에 걱정은 없었지만 조금 기다렸다.


이 시간쯤 같은 건물, 다른 호실에서 수업을 끝내고 나올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왔던 신입생 오티 때처럼, 그녀는 천사의 날개와 같은 흰 가디건을 걸치고 나타나겠는지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다. 매번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건물 정문 뒤에서 그녀를 기다렸던 재성이었다. 그녀도 매번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한동안 학교에 핀 꽃이며 나무며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인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저녁 색이 깊어져 모든 색이 비슷해져 갈 때면 사라졌다. 매번 그녀가 사라진 후에야 자신도 떠나는 재성이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때로는 오지 않을 친구를 기다리는 척하면서였다.


둘의 거리가 가까울 때는 비가 내릴 때였다. 그래서 재성은 비 내리는 날이 좋았다. 처음 봤던 날도 그런 날이었으니까, 더 좋았다. 비가 내린 날이면 반드시 피어날 무지개를 기다리곤 하였다. 무지개가 피어나면 재성은 저 무지개를 함께 바라보는 상상을 하고는 하였다.


무지개가 아직 피지 않았던 날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거세서 먼 거리는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녀가 재성에게 다가왔다. 걱정스레 물었다.


“우산 없으세요?”

“네, 니요.” 우산은 있었기에 있다고 대답했어야 했나, 우산이 없다고 했어야 했나, 재성은 순간 돌이 되었다. 꿈으로 꿨던 상황이 현실이 되자 좀처럼 걸리지 않았던 버퍼링이 걸렸다. 대답을 한 거 같은데 했나, 싶었다.

“없으면 같이 쓰실래요?”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상황이 좀처럼 파악되지 않았다. 함께 우산을 쓰자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앞으로 함께할 모든 날을 상상하고 만 재성이었다. 손을 잡고, 입을 마주하고, 여행도 가고, 결, 혼도 하고.


자신의 질문을 받았지만, 대답이 없는 재성을 바라보는 그녀였다. 조심스러웠던 그녀의 검은 두 눈동자에 재성의 당황한 얼굴이 뚜렷이 비췄다. 비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면서 주르륵 내리는 마찰 소리가 자신의 심장 소리보다 커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재성이었다.


“아, 네!”


뭐가 네! 일까? 그녀가 조금 전보다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재성의 신호를 해석하는 중이었다. 재성은 잘못된 신호를 보낸 것을 곧 눈치채고 “아니요, 아니, 네, 우산이 있었던 거 같은데, 없네요.” 라고 변화된 신호를 다시 보냈다.


그녀가 웃었다. 눈가에 웃음의 주름이 잡혔다. 재성이 귀엽다는 표정이었다. 저 주름이 할머니 주름이 되어서도 그 주름을 계속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으로 가세요?”

“그쪽으로요”


어느 방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있는 모든 방향이 목적이었고, 길이었다. 그녀가 ‘푸하하’ 웃으며 재성의 어깨를 쳤다. 재성의 볼이 붉어졌다. 심장의 소리는 빗소리로 숨길 수 있었지만 부끄러워 붉어진 두 볼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두 볼도 붉어져 있어 쌤쌤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할 거였어요?”


뛰던 심장이 갑자기 멈췄다.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네”


그녀가 우산을 재성에게 내밀었다.


“들어요.”


재성이 얼떨결에 우산을 잡자, 곧장 다른 쪽 우산을 들지 않은 재성의 손을 붙잡았다.


“가요. 그럼.”


그녀가 재성의 심장의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로 가까이 붙었다. 재성은 이제는 감출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들켜버린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그동안 지켜봤던 서로에 대해서 말했다. 이런 날이 오는구나 생각하며 행복에 빠진 재성이었다.

그녀는 재성에게 데려다 달라고 했다. 가뜩이나 요즘, 자신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어서 불안했는데 재성이 이렇게 있어주니까 든든하다고 말했다.


재성은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비가 아직 그치지 않았다. 가로등 등불에 비친 빗줄기 아래, 두 사람이 우산을 쓰고 있었다. 재성과 그녀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서로의 눈빛에 서로가 담긴 채였다. 하늘에서는 별빛이 지상에서는 두 사람의 눈빛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재성은, 자신의 심장 소리뿐만 아닌, 자신만큼이나 뛰고 있는 그녀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말해야겠지. 그녀가 다가와 줬으니까. 자신도. 말해야겠지. 생각했다. 운명의 다른 이름은 타이밍이라고 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재성이 들고 있던 우산을 잡았다. 재성이 놀라 그녀를 보았다.


“내일도 데려다줄 거지?”


고개를 끄덕이는 재성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그럼 잘 가, 우산은 너 써’ 하며 비를 맞고 집으로 들어갔다. 재성은 그런 뒷모습을 보며, 아차 싶었다. 고작 하루 만에 어디까지 가려고 했던 걸까. 바보 같았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려는 자신이 좀 바보 같았다. 이제 막 시작했는데 너무 조급한 모습이었다. 조금은 차분해진 심장을 부여잡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그녀를 만날 생각에 다시 뛰는 바람에 차분함은 금세 없어져 버렸다. 너무 집 앞에 있으면 그러니까 서둘러 빠져나왔다.


아침이 밝았다. 비가 그쳤다. 비의 흔적은 어느새 붉게 타오는 태양 아래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학교로 갔다. 사람들이 떠들썩하다. 어제 학교의 학생이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는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연락해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설마 싶었다. 기다리면 오겠지 했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집을 찾아갔더니 경찰통제선이 처져 있었다. 학교에서 떠들썩했고, TV 뉴스에서 보도되었던 강간치사살인죄 범죄자의 대상이 그녀라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어제까지는 천국이었는데 단 하루 만에 지옥으로 떨어졌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재성은 모든 것을 잃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숨결이 아직 남아 있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한 채 그녀의 집 앞을 서성거렸다. 반드시 올 그놈이었기에, 결심한 채 서 있었다. 이제 미래는 없어져 버렸으니까, 그래도 됐었다.


사건의 재현을 위해 경찰과 그놈이 왔다. 그놈은 멀리 숨어 있다가 재성과 있던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입을 막고 그녀를 위협하면서 내가 갈때까지 기다렸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붙잡았다면 지금도 그녀는 내 옆에 우리의 사랑을 서로 확인하며 함께였을 텐데, 그러지 않았기에 그럴 수 없게 됐다.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미안했다. 그녀한테 너무 미안했다. 아무것도 주지 못한 것은 물론, 도와주지 못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해서 더 미안했다. 준비했던 도구를 꺼내 그놈에게 달려들었다.


말려야 하는 건 막았어야 하는 건, 그놈의 행동인데, 하늘도 경찰도 사람들도 재성을 붙잡는다. 한 뼘이 모자라 한 마디가 모자라 이뤄지지 못한 사랑처럼, 갈고 갈아 스치기만 해도 위험했던 칼날이 그놈의 목에 닿지 못한다.

경찰의 제지로 인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꿈틀거리는 재성의 모습이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게 이 일뿐이라, 해야 하는 모든 게 복수였는데 그는 사랑도, 복수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살인미수죄로 5년 형을 선고받고, 그놈은 25년 형을 받았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오늘도 비가 온다. 그리고 어제 들어온 소식이 있었다. ‘제발 그놈에게 복수할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이 하늘에 닿았나 보다. 비가 많이 내려 그놈이 있던 교도소가 무너져 내려 임시로 이곳으로 수감 되어 이동해왔다. 그놈이 보인다. 어제까지도 예쁘게 피었던 꽃 하나가 저문 모습이 그녀를 떠오르게 해 나는 온몸에 찬 분노를 표출해 그놈에게 달려간다. 그때처럼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놈을 치려는 때 날 보고 놀란 그놈이 발을 잘못 디뎌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혼자 넘어져 죽어버렸다.


‘내가 죽여야 하는데!!’


그놈이 죽었다. 그녀를, 죽였던 그놈이 죽었다.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통쾌해야 하는데 새까맣게 타버려서인지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무언가 있었는데, 그게 눈물로 다 털어 봇물 터지듯 흘러져 나왔다.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도 없으니까, 나도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가야겠다. 준비하고, 실행해 옮기려는 때, 조금의 시간만 내게 더 주어졌다면 이제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교도관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내 다리를 붙잡아 올려 내가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을 막아선다. 그 뒤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정연’이라고 밝힌 남자였다. TV에서 봤었다. 그 대사가 공감되어 기억한다. ‘사랑의 신을 죽였다.’ 라며, ‘내가 사랑한 그녀를 죽인, 그래서 사랑의 신을 죽였다’ 라며, 너무 공감할 수밖에 없던 대사를 읊은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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