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외
- 오래 되어도 낡지 않는 마음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우리는 보내게 될까? 여기서 나는 ‘남사(남자 4)’라고 불린다. 남자 여덟과 여자 여덟의 우정이었다. 함께 보내온 시간은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이었고, 이제 우리는 모두 서른을 넘겼다. 우리는 만나면 아이가 됐고 바보가 됐고 멍청이가 됐다. 때로는 걸리버였으며 때로는 콜럼버스였다. 어느 때는 흥선 대원군이었고, 어느 때는 인디언이었다.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뭐든 되고는 하였다.
처음엔 남사 여이로 여섯 명이서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16명, 짝도 5:5로 맞게 되었다. 아마 중학교 때부터 그렇게 된 거 같은데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최소 일 년에 한 번, 많게는 일주일에 일주일을 우리는 그렇게 정기적이면서도 비정기적으로 모였다. 여러 가지 이유였다. 하늘로 떠나는 누군가를 함께 배웅하기도 하고, 가족의 결혼과 입사, 승진, 제대 등을 축하를 해주기도 하면서였다. 심지어 기르는 강아지가 죽어서 슬픔에 빠진 누군가 있으면 언제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위로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였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모금통장에는 매달 돈이 나가게 되고, 어느 정도 쌓이게 되면 부른 돼지의 배를 갈아야 한다며 또 모였다.
모두가 다 모인 날은 최소 일 년에 한 번, 한두 명 빠지거나 해도 과반 이상 모이는 날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가끔 이 중에 비밀 커플이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다. 남남, 여여, 남자와 여자, 모두 매력이 넘치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은 돼지의 배가 터지기 직전이라며 남일(남자 1)이가 파티를 주최했다. 특별하게 장소를 빌렸다. 나는 그 장소에 마치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자로서도 네 번째, 전체로도 네 번째로 도착했다.
“이름 값 하네 자식”
오자마자, 와인 잔에 붉은 술을 따르며 내게 건네는 남이(남자 2)가 있다. 우리들의 별칭처럼, 우리가 남이가를 자주 시전하며 내 기억이 맞는다면 모든 자리에 참석한 녀석이다. 바꿔 말해서 우리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친구다.
“한참 재밌을 때 오네, 야 빨리 와라, 여자 둘(들?) 오기 전에 끝내야 해”
무슨 얘기인가 보니, 여자를 만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남삼(남자 3)의 이야기였다. 녀석은 그런 녀석이다. 항상 옆에 여자가 있었다. 때로는 한 명 이상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이야기겠지 싶었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남이(남자 2)가 건넨 술잔을 한 모금 마시면서 셋을 보는데, 입을 열고 있는 친구는 남삼(남자 3)이 아니었다. 남일(남자 1)이었다. 녀석의 이야기라니? 나도 궁금해져서 가까이 갔다. 수많은 고백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여자친구가 없었던 녀석이기에 고자가 아닌가 의심했었던 친구였다. 또는 취향이 이성이 아니라 동성인 거냐며, 장난으로나마 가까이 두면서도 멀리 두었던 친구였다.
내가 그들에게 가까이 갈쯤, 여팔(여자 8)이 왔다. 남삼(남자 3)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둘을 본다. 남자 1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설마 하는 눈빛으로 나도 둘을 봤는데 하이파이브를 자연스럽게 하는 둘과 우리였다.
여자 8이 자리에 앉고 남자 6이 도착했고, 여자 2와 여자 4가 들어왔다. 각자 어떻게 지냈는지 하고 있는 일은 잘되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중에 어느새 16명이 모두 도착했다. 단독주택을 빌려 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파티는 한동안 즐거움을 유지할 것이다. 우리는 만나기만 해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며 행복이 되었던 사이였으니까 지금도 그럴 것이다. 라고 마냥 생각했는데, 오늘이 어쩌면 이 모임의 마지막 날인지도 모르겠다.
남자 1이 여자 8에게 고백을 받았다.
남자 1은 사실 여자 2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고백을 거절했다.
하지만 남자 1은 여자 2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여자 8의 고백을 받아줬는데,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던 여자 2가 남자 1에게 고백을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 전 여자 2의 고백을 받아준 남자 1이 있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취한 건지 취한 척 하는 건지, 우리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남자 2가 남자 7에게 넌 어떻게 됐냐며 묻는다. 애써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분위기였다.
“어? 나, 나는 안좋아하는 것 같아서 포기했어”
“왜 포기해 인마!”
“고백했는데, 답이 없다.”
“어떻게 고백했는데?”
“편지로.”
안타까운 표정으로 남자 7을 바라보는 남자 2, 무슨 생각인 건지, 시선이 자연스럽게 남자 1로 향했다. 취한 상태로 여자 2와 여자 8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세 사람은 가까이 붙어 있었다. 위험한 상황은 아니겠지? 하는데, 셋 다 웃고 있었는데 남자 1이 여자 2와 여자 8의 손을 모두 잡고 있었다.
남자 2가 “너넨 뭐냐” 하니까, 다자연애라고 답하는 셋이었다.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이 함께 사귀는 사이라고 한다. “그게 무슨 시나락 까먹는 소리냐” 묻는 남자 5였다. 그러자 번쩍 손을 들고 여자 6은, 남자 3과 여기 없는 다른 남자 두 명과 네 명이서 연애 중이라고 했다.
이 무슨 동물의 왕국인가.
그 사실을 알았던 남자 2가, 남자3을 통해 남자1에게 조언을 하고 있었던 상황을 내가 목격한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됐다. 나는 바보인가. 눈치는 보지만 눈치는 없던 게 나였었나 보다 끊었던 담배가 생각난다. 남자7에게 “어떻게 아예 답장이 없어?” 라고 크게 물었다.
남자 7이 머 쩍게 웃으며 뒷목을 긁었다. 괜히 물었나, 미안해지려는 찰나에 목소리가 나왔다.
“사실 여기, 답장을 가져 왔다. 오늘 아침에 왔더라고.”
편지지를 들어 올리는 남자 7, 주변에서 환호성이 쏟아진다. 이 자식, 사람 놀리나 하는 마음과 함께 궁금했다. 저 안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다들 어서 편지를 뜯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남자 7이 편지를 들어 올려 읽었다. 그냥 안부 인사였다. 차인 건가, 차이지 않은 건가 했는데 그가 씩 웃으며 연필로 편지를 꼼꼼히 색칠했다. 무슨 미친 짓이지 싶었다. 그랬더니 꾹꾹 눌러쓴 차마 색이 칠해지지 않은 흰 모양의 글자들이 드러났다. 이 무슨 시그널인가.
“나도 이렇게 고백했는데, 대답도 이렇게 왔네”
안부 편지인 척 고백을 하고, 안부 편지인 척 답장을 한다는 건가. 이 무슨 미련한 짓인가.
“뭐라고 고백했는데?”
답장을 보여준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좋아합니다.’
“내가 쓴 말 그대로?”
“오오.”
이 모임, 재미가 없어졌다. 내 짐이 어딨더라, 취한 몸으로 수영을 하는 몸을 일으키려는 때였다. ‘이것들 여기가 무슨 동굴의 왕국이냐!’ 누가 말했다. 속이 시원하다. 내가 했어야했는데, 해서 궁금해서 쳐다보니 남자 5가 그랬다. 그랬더니 남자 2가 가슴을 툭툭 치며, ‘왜, 너는 어떻게 됐는데’ 묻는다. 쟤도 뭔가 있나. 오늘은 모두의 오픈데이인가. 그러자 남자 5가 반쯤 취한 채 대답을 회피하려 했다.
“뭘 어째”
“왜, 최근에 설렌 적 있었자나”
“아씨, 그거 비밀이랬잖아”
남자 5가, 남자 2를 원망스럽게 보다가 씩 웃는다.
“난 뭐 그냥 설렌 채지”
“왜, 뭐가 설렜는데”“야 우리도 좀 같이 설레자”
여자 5가 남자 2에게 시선을 주니 남자 2가 여자 7을 들춘다. 여자 7이 한숨을 쉬며 그래 말한다 말해, 하며 말한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자리가 있는데도 내 앞에 서 있는 모습에 설렜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내가 꼬셨지, 뭘 어쩌긴 어째. 나한테 고백안하고 지가 어찌 버텨"
"올, 역시"
"야 너도 최근에 누구 좋아 하는 사람 있었자나"
취해서인지 누구 목소리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있었지, 근데 나 안좋아해서 포기했어"
"차였냐?"
"그건 아니고, 거절을 하더라고"
"뭘?"
"영화랑 연극이랑 전시회랑 또-"
"장르별로 차였네, 차였구만 뭘 안차였데"
"세번이나 말하게 했으면 너한테 질렸겠다"
"어떻게 거절하든?"
"바쁘데 시간이 없데"
"연애세포 죽었다는 말보단 낫지"
"그게 진짜 죽었겠냐 니 앞에서만 죽었겠지"
고민하던 목소리와 재밌다는 반응들이 뒤섞여서 들린다.
"제대로 차였네"
"진짜 바쁜 거 아냐?"
등짝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바뻐도 관심있는 사람한테 답장할 시간과 전화할 시간, 놀러갈 시간은 다 있는 거란다 꼬맹아"
"그치, 사랑에 이유가 어딨냐"
"그정돈 양반이지 난 대놓고 둘은 어색할 거 같다고 불편하다는 말 들었어"
이것들이 하는 표정을 짓는 남자 5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보니...
금세 관심을 빼앗기자 약간 토라진 남자5를 다시 남자2가 주목하게 만든다.
들려달라는 아우성에 남자 5가 못 이기는 척, 다시 시간을 빼앗기기 전에 입을 열었다.
“그냥, 다른 데서, 모임을 갔는데, 내가 고기를 굽는데 막! 상추 들고! 고기 들고! 입에 넣어주고!”
그게 그렇게 설렐 일 인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가 그만, 고기를 굽는다고, 고기를 놓친 거야. 손에.”
응.. 그래..
“그걸 못 주워 먹잖아. 근데 다른 쪽 한 손으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는 거야. 그래서 손에 키스하며, 먹었지.”
여기 살인도구처럼 쓰일 게 없나 한 번 둘러보게 되는 건, 그냥 내가 취해서겠지.
“그리고 게임을 하는데, 마피아 니들 다 해봤지? 거기서 내가 범인처럼 보이는 두 명 중 한 명을 누굴 고를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걔가 나한테 빨리 고르라고 닦달을 하는 거야. 그래서 짜증 나서 걔를 찍었더니. 마음에 드는 사람 말고! 이러는 거야”
그게 설렜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게임이 끝나고, ‘이번 게임으로 알 수 있었던 건 남자 5은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 이렇게 말하더니, 내 옆자리로 오더라?”
번쩍, 언제나 자상한 남자 6을 한 번 째려보게 됐다. 눈앞에 보이는 물을 마시는데, 왜 이렇게 쓰냐, 풉, 뱉어낸다. 내 옆에 여자 3을 본다. 왜 물컵에 술이 있냐는 눈빛을 보낸다. 어쩐지 안 취하더라.
여자 3이 남자 4를 바라본다.
그러자 주변에서는 ‘둘이 뭐야’ 하는데, 뭐긴 뭐야. 밑잔담근년 검거하는 중이지.
남자 5가 내가 가져간 시선에 질투를 느꼈는지 재빠르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내가, 뭐지 하고 연락을 했는데, 탄생화 꽃말을 따서 고백하는 글을 보냈더니 읽고 답을 준다더니 안 주는 거야. 그때 너한테 이렇게까지 말한 거잖아. 그래서 안 좋아한다 생각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있었는데?”
빈 물통, 물컵들을 확인하고, 물을 찾아 부엌으로 갔다. 떠들썩한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중이었다. 다들 잘 노는구나, 저렇게 다들 무언가 있었구나, 사실 나도 있었으니까, 할 말은 없다. 그래서 항상 몰래 찾았던 그녀의 얼굴을 보러 친구들 사이를 찾아보는데, 보이지 않는다. 옆에서 화기애애한 남자 6의 모습만 보일뿐이었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이렇게 남들 시선 없을 때 몰래 보는 게 삶의 낙인데,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니까. 혹시라도 들키면, 이 모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거고. 사실은 거절당하는 게 너무 싫으니까. 그냥 혼자 하면, 거절도 없으니까. 그런 거지만. 하는 순간이었다.
“은재 뭐해”
“!”
내 눈이 찾았던, 내 마음에 있던 그녀가 부엌에 가까이 오며 물었다.
“어, 어어,,”
그러니까 내가 지금 뭐하냐면, 음, 물을 찾으며.
“물이 없어서”
“여기”
그녀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컵에 든 물을 내민다. 나는 이걸 받아야 하나 생각한다. 얼른 받아 마시는데 비었다.
“아 맞다. 내가 다 마셨지 참”
하며, 냉장고 문을 여는데, 옆에 있던 우리의 브이로그를 위한 삼각대가 넘어진다. 놀라 삼각대를 잡는데, 부러진 듯 보였다. 애써 맞춰보려 해보지만, 취해서인지 잘 안된다.
“어,, 이거 잘 안되네”
그녀가 다른 옆에 있던 물건들 보다가 ‘이거 세워놓으면 안 되나?’ 하는데, 두근거리는 마음에 답을 내지 못한다. 내가 뭐라고 한 거 같은데 뭐라고 한지 기억이 안 난다.
카메라 비친 우리의 모습들이 있었다.
지금 카메라 밖에 있는 우리가 있었다.
그냥 냉장고에 삼각대를 기대어 놓는다.
그녀가 아직 서 있었다.
나보다 한 발짝 먼저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쉬웠다.
더 얘기 나누고 싶었다. 내가 이 모임에 계속 나오는 이유였다. 혹시나 볼 수 있을까 해서. 그런데 얼마 전 그녀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고 모인다는 자리에 나는 나가지 않았다. 그 좋은 소식이 내겐 안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안 나가?”
내가 해놓고는, 내 마음과 반대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보지 못하는 눈물이 조금 흘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천만 가지인데,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거였다.
“가야지”
그녀가 먼저 나갔고,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몰래 보았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까 남자 7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처음부터, 새겼다는 말. 나도 그랬는데, 정확히 기억난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 약속에 늦었던 날, 천사와 같은 옷을 입고, 천사보다 예쁜 미소로 수줍게 웃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4학년, 11살 때, 놀토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여겼던 날이었다.
바라보는 사랑은 힘이 들어 한 명만 온전히 사랑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만큼 사랑한 사람은 있었어도 그녀보다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남자 1이 여자 8을 사랑했던 것처럼, 나도 똑같다. 여기 있는 친구들 모두가 마치 내 얘기인 것 같았다. 우리니까. 그럴 만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 1이 여자 2를 받아준 것처럼, 나도 그렇게 될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밖으로 나가니, 여전히 남자 5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그때, 자신을 설레게 한 그 사람과의 모임에서의 이야기가 아직 한참 진행 중이었다.
거기서 미션을 했는데, 자기 미션은 누구 챙겨주기였는데, 챙겨주는 미션이 또 있는 건 아닐 텐데 그 사람이 자신을 챙겨줘서, 혹시 나를 좋아하는 건가, 그래서 설렜는데, 알고 보니 똑같은 미션이 두 개였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지금은 설레지 않는다고 말하는 남자 5였다.
착각은 책임이 없다. 그래서 우주와 같다. 한없이 크고 위대해진다. 그 우주를 깨기 위해서는 책임지거나,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상상으로 쓰여지는 이야기에 책임이 있을 수 있기가 힘들겠지. 그래서 별처럼 빛나는 그 광활한 우주를, 그 빛이 좋아 계속 상상하게 되는 거니까.
책임지는 상상. 나의 생각에 책임지기 위해서, 그녀를 보지 않으려 한다. 외면하려고 한다. 그러나 지구는 둥글어서일까, 외면할수록, 그녀는 더욱 가까이 보인다. 자꾸 걸어가서 다 걸어가서 둥글게 생긴 지구 때문에 나는 계속 그녀에게 굴러간다.
최근 그녀보다 더 많이 생각나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보다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그녀보다 좋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모임이 생길 때마다, 그녀를 볼 때마다, 다시 그녀가 커진다. 물을 만난 스펀지처럼, 평소에는 그렇게 가볍다가,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다가, 보게 되고, 말하게 되고, 만나게 되면 그녀는 한없이 무거워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중력보다 강했다. 블랙홀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아니라, 그게 나였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할 거란 자신은 없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할 자신은 있었다.
그녀가 담긴 내 눈을, 그녀가 있는 내 마음이 들키기 전에 바람을 쐰다며,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
카메라에는 여전히 우리가 있었다. 게임을 한다. 술자리에서 게임을 빼긴 어렵겠지, 그녀가 그곳에 있다. 카메라 안에는 그녀 빼고도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녀만 보인다. 카메라 밖에 있는 내가 볼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었다. 그녀가 게임에 졌다.
그녀에게 가고싶어졌다. 게임을 참여해야지. 생각하는데 그녀가 게임에서 나와, 카메라 밖으로 나와,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멈춰 서야 하는 발걸음인데, 들키기 싫은 마음과 보고 싶은 마음이 서로 싸우더니, 그녀를 안전히 볼 수 있으며 들키지 않는 방법이 있는 쪽으로 걸음이 향했다.
이제 카메라 안에 내가 있겠지, 우리가 있겠지, 카메라는 그녀를 담고 있지 않았지만, 내 눈은 온전히 그녀를 담고 있었다. 내게도 녹화기능이 있으면 좋겠다. 언제든지 이 장면을 꺼내 볼 수 있게,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되면 좋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할 수 있듯이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상상과 착각은 또 광활한 우주를 만들었다. 이로써 만 번째 우주가 만들어졌다. 그만해야지. 하고 상상을 접어보려 시도해보지만, 안타깝게 나는 상상을 접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밤이라고 약속된 시간이 가고, 태양이 우리를 비추고, 첫차의 시간이 온다. 우리는 모이는 날이면 차를 두고 오는 센스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발휘해야하는 사이였다.
그렇게 다들 ‘우리’를 벗어나, 각자의 우리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몇몇 우리처럼, 그녀와 나도 우리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여기 놓고 가야겠지. 그래야, 그래야 또 살아질 테니까.
친구들이 하나둘 원래의 자리를 찾아 떠났다. 그녀와 내가 같은 역에서 전철에서 내렸다. 단둘이 있게 된 건 처음이었다. 조금 더 같은 방향이었으면 가는 길이 같으면 좋겠다 싶었다. 1분이라도 더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운명은 그런 행복을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너무도 다른 방향으로 서로가 가야 했다.
“차라도 한잔할래?”, “해장하고 갈래?”라는 그 쉽지만, 그녀에게 하기엔 어려운 말이 입술을 뚫지 못했다. 애써 남은 미련은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만, 그녀는 내 눈빛 따위 신경을 쓸 리 없었다. 뒤돌아서 간다. 미련을 들킬까 봐 돌아보지 않는다.
원래 내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다시 모일 그날을 기약하며 먼저 떠난 친구들처럼, 나도 갈 수밖에 없었다.
미련에 앞이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미처 앞에 서 있던 사람을 피하지 못하고 부딪친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가려는데, 부딪쳤던 사람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려 나를 돌려세운다. 뭐냐. 싸우자는 건가 싶었다.
“안녕하세요, 한정연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악수를 하자는 듯 손바닥이 살짝 보이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