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일
설날.
내게 있어 설날은 많은 의미들을 되새겨볼 수 있는 날이 아닐까 한다. 많은 세월 속에서 기억이 닿는 가장 먼 어린 날 나에게 설날은 손꼽아 기다리는 날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여러가지 이유로 외가집에서 살게 되었던 나였다. 처음에는 동생과 함께였지만, 곧 동생은 여자라는 이유로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고, 나는 그런 엄마를 볼 수 있는 설날을 무척이나 기다렸다. 그때는 지금보다 도로 사정이 안좋을 때라서 내 기준 저녁 밤이 다 되었는데도 도착하지 못하면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해보라고 할머니한테 쫄랐던 나였다.
설날이 지나가면, 처음엔 내가 잠든 사이에, 그리고 점차 조금씩 성장했을 때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할 수 있게 된 채로 만나고 보내야했다.
그렇게 나는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기다리는 걸 얻을 수 없다는 걸 세월을 통해서 배웠다. 처음에는 어린 날의 설날로, 그리고 아픔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이별들로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기다리는 사람들을 존경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한다. 그게 현실이 아닌 가상의 캐릭터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끝내 해낸다. 내가 해내고 싶었던 이야기의 끝자락을 그들이 맞이하면서 끝내 내가 해내지 못한 부분을 채워 가는 게 아닐까 한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어느 기다리는 날이었다. 상대가 내게 말했었다. "누가 기다리는 거 진짜 못한다고 했는데" 나를 지칭하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더니, 주변을 둘러보고 앉을만한 게 하나 없는 그곳을 둘러보더니 "다음부턴 앉을 수 있는 데서 만나야겠다"라고 했었다. 그렇게 내가 기다리면 왔던 사람마저 그런 얘기를 할 정도로 나는 기다리는 걸 정말 못했다. 지금은 주변에 다른 것이 있으면 둘러보기도 하고, 어쩌면 '잘' 기다릴 수 있게 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난 어떤 기다림도 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까지 모든 기다림에 실패한 이유도 있고, 기다린다고 해서 오지 않는 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날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들을 나는 떠난다. 이미 얼룩진 경험들 사이로 꾸역꾸역 묶어놓은 아픔들을 들추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다. 나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 사람을 나도 기다리게 하지 않으려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다.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르는 이야기라 또 기다리고 있지 않고 있다.
어쩌면, 내게 꼭 올거라는 말 한마디를 남겨준다면, 평생을 써서, 내 생을 다 써서 기다릴 수 있을 거 같다. 이미 많이 기다려본 경험으로. 준비된 발전으로.
언젠가 나를 찾아 올 그 미래, 나는 그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미래가 마냥 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을지 몰라도, 나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준비하겠지만. 기다리지 않으려 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