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라

-3

by 라한

작은 꿈 하나가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다가 잠에 들었다. 그 꿈을 품은 채 꿈꾸는 소년도 함께 옆에서 잠이 들었다.


소년의 꿈에선 소녀와 함께였다. 보고싶었던 소녀는 어느새 소년의 옆으로 다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현실에서는 가장 먼 두 사람이었지만, 꿈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깨지 않고 싶은 꿈”


행복은 이 순간이 영원이 되길 바라는 일이 아닐까, 소년의 꿈은 ‘행복’이라는 단어로 모두 설명이 되었다.

소년의 이름을 부르며, 소년의 행복을 깨부수는 아침이 왔다.


“야 최시훈 일어나!”


소년을 닮은 소녀. 소년이 꿈에서 본 소녀는 아니었다. 소년, 최시훈은 이불을 듸집어 쓰며 자신을 발로차고 있는 소녀를 째려본다.


“야 최시연, 너 듸딜래?”

“듸딜래가 뭐가 뒤질래겠지? 안 일어나면 엄마한테 니가 듸질텐데?”

“아, 됐어, 아침밥 안 먹어”

“먹을 시간도 없어 난 간다. 깨웠다. 참고로 오늘 뒤질 게 아니라 내일 뒤질거야”

“뭔소리야”


시훈은 조용히 이미 중천에 떠오른 태양을 보고, 시계가 7시 45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한다.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10분. 준비하고 밥먹고, 씻고 하는데는 최소한 30분의 시간이 필요하다. 등교시간은 8시. 엄마는 보통 6시 30분 정도에 두 소년과 소녀를 깨우고는 했다.


“이런 C.”


그러고 보니 집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학교에서는 서로를 피하는, 길거리에서는 못 알아 보는 척 하는 시연이 시훈을 깨웠다는 건, 분명히 엄마와 시연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었다. 엄마는 외출 중이었다. 회사일 때문에 가끔 이런 일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두 아이를 키워낸 훌륭한 워킹맘이었다. 그렇다고 아빠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아빠는 엄마보다 더 바빴다.

“아아아악!”


씻을 틈도 없이 주섬주섬 교복으로 갈아 입으러는데, 다행히 시연에게는 들키지 않았지만, 축축한 이 느낌. 설마하고 아랫도리를 확인하는데, 하필이면 지금. 어쩐지 달콤한 꿈이었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꿈이었다.


“이런...진짜.”


학주한테 혼나든, 담임한테 찍히든, 이대로 학교로 갈 수는 없었다. 시훈은 화장실부터 들어가 씻는다. 집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챙피한 게 아니야..”


아무한테도 말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했던 게 선덕선덕하거나, 두근두근 거리는 그런 로맨스가 끝이 아니라 그 뒤의 단계. 몽정이라는 사실을. 얼른 뒤처리를 끝내고 그는 방안으로 들어온다.

햇빛으로 가득한 방안은, 온통 연보라색으로 가득하다. 꿈속의 그녀, 지희가 좋아하는 색. 지희가 좋아하는 캐릭터들, 물건들을 어쩌다 자신도 모르게 모으게 되면서, 시훈의 방 안은 어느새 연보라색으로 가득 찼다.

시연의 시비로 인해 빼앗길 뻔한 적이 한 두 번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냈다. 언젠가 전해줄 수 있을까 해서. 오기는 할까, 오매불망 기다리지만 소식 없는 이야기였다.


“미안해..지희야”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낀 시훈은, 얼른 교복으로 갈아 입고 학교로 향했다.


*


점심시간, 시훈은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몰래몰래 지희를 쳐다본다. 그때 지희와 시연이 인사를 하는 게 보인다. 지희에게 깍듯한 시연의 모습이 보인다. 지희를 쳐다보던 시훈과 눈이 마주치는 시연, 냅따 시훈에게 달여간다. 시훈이 놀란. 시훈의 친구들은 시연을 반가워한다.


“오, 공주님 오셨어요?”

“오빠들 안녕? 야 너 지각했다며? 내가 그렇게 깨워줬는데?”

“웬일로 아는 척이냐?”
“됐구, 너 지희 언니 왜 그렇게 쳐다보냐? 언니가 물어보잖아 너랑 아는 사이냐고”

“...?”

“뭘 그런 눈으로 보는데?”
“그래서 뭐라했는데”

“알긴 뭘 아냐고,”

“야..”

“너. 그 방에 연보라들 전부다.”

“????”

“하여간,”

“왜. 시연아, 뭔데 나도 알려줘”

“오빠는 왜 이런 애랑 놀아요?”

“왜. 시훈이 멋있잖아”
“네???”


전혀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꾸겨지는 시연의 표정이었다. 시훈이 발끈하고, 친구 한 명이 시훈을 끌어당긴다.


“시연이. 이대로만 잘 커서 오빠한테 시집 와”
“내가 왜 오빠한테 가”

“에이.”

“야, 놔 봐. 아씨 진짜 이 쪼그만 개 말하는 거봐”
“왜? 나 엎어서 키웠다 그 말하게? 한 살차이가 무슨 엎어키워”
“엎어키운 건 맞아 기억 안나? 너 맨날 울 때 시훈이가 달래주고 엎어줬잖아”

“에베베 난 그런 기억없는데”

“그래. 없어도 돼. 이 오빠가 기억하니까. 우리 시연이는 이렇게만 크면 돼”

“오빠나 얘나, 진짜 즈질들이야. 암튼 지희 언니가 이거 주래”

“어..?”


시연이 내민 연보라색 손수건을 건네받는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없다. 아까 아침에 늦어서 운동장을 돌다가 잊어버린 물건이었다.


“칠칠치 못한놈. 이거 한정판이라며. 어떻게 샀냐. 지희 언니가 그거때매 너 좀 괜찮게 본 듯?”

“오..?”

주변에서 난리였다. 나는 그 순간 시연을 넘어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있는 지희를 보았다.

“난 연보라 제일 좋아해”

“응..?”


학생회의 회의 때, 백문백답이 유행일 때, 가장 좋아하는 색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시간이었다. 그때 지희가 했던 말을 기억하는 시훈이었다.


“왜..?”
“가장 강한 색이지만, 가장 약한 색이기도 하잖아. 배려하면서도, 성숙한, 강한 그런 느낌..? 그리고”

“그리고..”


활짝 웃는 그 날의 지희.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는 연보라 하나 남기고 떠난 그 날의 지희가.

시연을 넘어 시훈을 보고 있었다.

친구들의 웃음소리도 모두 끊기고, 오직 지희의 시선만이 시훈에게 보일뿐이었다.


“라일락의 꽃말은 기대거든, 꽃향도 좋고”


지지직하며, 들리지 않는 지희에 반론하는 다른 학우의 목소리.


“라일락 꽃말은 대답해주세요야”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쳐다보는 시간,

누군가의 눈빛에서는 기대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대답해달라는 이야기가.

서로가 눈치채지 못한 채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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