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을 보고 써보는 글

그대는 나아가시오, 나는 한걸음 물러나니

by 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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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ImOABnXP0mI



“작금의 조선을 낭만의 시대라고 부르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때 들었던 말을 잊지 못하는 유진이었다.

낭만의 시대라 불리고 있는 지금의 조선은 옛것이 지고 새로운 것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시오?”


대답이 없었던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가 허공에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시선 안으로 유진의 입술을 가리고 있었다.

유진도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입술을 가렸다.


어젯밤 보았던 복면 속의 그녀와, 그가 서로인 것을 확인하는 두 사람이었다.


“같이 걸을까 하여.”


함께 걸었던 길을 떠올리며 그녀와 조선을 떠올리는 유진이었다.


조선이란 이름이 대한으로 바뀌면서.

대한에서 또 새롭게 바뀌고 있는 나라였다.


오래된 골동품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새로운 것들이 매웠다.


썩은 고동 나무 기둥이 뿌리박혀 있던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엔 신식 기술로 돌과 석유를 섞어 만든 시멘트라는 벽이 세워졌다.


길었던 머리는 짧아지고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졌던 신분은 사라졌다.


그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해 미국인이 되어야 했던 남자. 그게 유진이었다.

종놈으로 태어나 어머니와 아버지가 양반의 손에 죽는 걸 숨어 봐야 했던 유진이었다.


“아버지…”


그렇게 모든 것이 바뀌고 있었던 조선. 대한이었다.

바뀌고 또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고 있었다.


나라마저도.


“내 아버지 요셉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유진은 간절하게 빌었다.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리 새로운 숨을 들이켜도 애신이 남긴 숨결은 자리를 틀고 앉은 그대로여서 한 결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부디 살아만 있게 하시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지평선을 수없이 넘어 도착했던 미국을 만나면서도. 이렇게 빌어 본 적은 없었다.


삶의 가장 큰 소원이었다.

하늘에 뜬 둥글 달에서도,

그달이 담긴 둥근 차의 반사 빛 속에서도


그녀의 마지막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그녀가 있었다.


애신.


유진은 그녀의 이름처럼

그녀의 충성스러운 사랑이 되고자 했다.


*


“정말 나랑 같이 미국에 갈 생각이 없는 거요?”


애신의 눈에는 오직 유진밖에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흔들리는 눈빛으로 유진만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곳은 대한을 삼켜버린 제국.

미국대사관이 있는 일본의 어느 길가에서였다.


“그렇게 나만, 나 혼자서만 살아남았으면 좋겠소?”


애신의 부모님의 흔적을 찾아 떠났던 기억이었다.

그곳에서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다른 길을 걸어야 했다.


같이 걸었던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난 그랬으면 좋겠소.”


애신이 살기를 바랐던 유진이었다.

그래서 함께 살기 위해 미국으로 가자고 말했었다.


“여기선 방법이 많을 거요. 내가! 내가 꼭 찾겠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대답이었지만 애신의 이어지는 말에 유진은 그녀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을 내가 안 해봤을 것 같소?”


유진의 손을 잡고 높게 오른 시멘트 건물들이 즐비한 뉴욕의 한복판에 서 있는 애신이었다.


“가 보지도 못한 미국의 거리를.”


말도 지붕도 없는 마차를 타고 가는 두 사람 사이에 애신은 어쩐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매일 걸었소. 귀하와 함께.”


조선에서 볼 수 없는 거대한 공원에서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유진과 애신의 중심으로 푸른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나란히.”


애신의 눈 속에 담긴 유진의 얼굴이 보였다.

유진은 애신의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공원에 흰색과 검은색의 배열이 있는 작은 조랑말이 꼬리를 흔들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서 공부도 했고. 얼룩말도 봤소.”


유진과 애신이 한 침대에서 서로를 보듬고 앉아 있다.


“귀하와 함께 잠들었고. 자주 웃었소.”


모든 상상의 퍼즐들이 한 조각씩 떨어졌다.

떨어진 곳에는 죽어가는 조선의 인민들이 웃고 있었다.

이미 죽어 다시 볼 수 없는 미소도 있었다.


“그렇게 백 번도 더 떠나 봤는데……”


서로의 시선으로 서로를 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 백번을 난 다 다시 돌아왔소.”


애신이 천천히 유진에게 다가왔다.

어느새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유진은 애신의 심장도 자신처럼 뛰고 있는 걸 느꼈다.

사랑이었을까. 헤어지는 두려움에서이었을까.


“우리 인연은.”


두 사람의 가까워진 모습을 비추는 창문 속 거울이었다. 물줄기가 두 사람을 비추는 사이로 떨어져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있으나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요.”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이었다.

애신과 유진.


조선의, 조선이 아닌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떠나는 중이지만 귀하는 돌아가는 중이니까.”


유진은 다시 조선에 들어왔던 그때를 떠올렸다.

미국의 대위의 신분으로 종놈으로 도망쳐온 조선의 땅을 다시 밟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조국, 미국으로.”


다시 멀어지는 애신의 얼굴이었다.

유진은 자신의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써서 애신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애신을 위해 차마 그러지 못했다.


“부디, 잘 가시오.”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잘’ 살 수 있는 것인지 그대 없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말이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보다 더 큰 결심을 해야 했다.


자신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그녀를 위해

애신을 떠나는 선택을 해야 했던 유진이었다.


유진은 두 눈을 뜨며, 그날의 이별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는 두 번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한바탕 총격전이 일어난 직후였다.

애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대한으로 온 유진이었다.


이번엔 미국 장교의 신분이 아니었다.

자유인으로서였다.


한때는 미스터 션샤인이었던 그였지만, 이제는 오래전 잃어버린 이름 ‘유진’이었다.

유진 초이로 조선을 밟았던 유진은 이제, 최가의 유진이 되어서 돌아왔다.


유진의 선택이었다.


“미스터 션샤인?”


애신이 미국인 유진을 보고 그렇게 불렀다.


“미션.”


유진은 미션이라는 미국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션.”


유진에게 미션이란 말을 배운 애신이었다.

유진은 자신의 미션이 애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애신은 자신의 미션이 나라를 지켜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던 두 사람이었다.


유진이 조선에 왔을 때 머물렀던 호텔이 불타고 있었다.

폭발의 주동자를 구해낸 유진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불꽃으로 살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리 폭발하는 호텔 앞에 서 있을 줄은 몰랐소.’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끝까지 자신의 생을 놓치지 않았다.

빌었던 소원처럼, 살아있었다.


그녀는 잠깐 눈을 떴다.


유진은 반가움과 걱정되는 마음으로 그녀의 피를 닦아주며 물었다.

그러자 애신은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나 누군지”


떠났던 이래, 수년의 세월이 흘렀었다.

자신 앞에 있는 유진을 보고 꿈이라 생각하는 애신이었다.


“알아보겠소?”


애신은 유진을 바라보았다. 여전하구나 생각했다. 작게 미소를 지었다.

헐떡이는 숨 보다, 그를 보기 위해 더 노력하는 눈동자였다.


“수도 없이 꾸었던 꿈이오. 이제 속지 않소.”


애신과 유진의 두 눈에 서로가 담겨 있었다.


“귀하는 조선에 없소.”


유진은 애써 중력의 힘을 견뎌보려고 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눈을 깜빡이며 맞서보려고 했다.


꿈인 양.


“꿈 아닌데…”


애신의 핏기 어린 작은 손을 꼭 붙잡는 유진이었다.

이 작은 손으로 얼마나 큰 시련들과 싸우고 있었던 것인가 싶어 슬픔이 파도쳐 왔다.


“여기 있는데 나.”


애신은 꿈이라 해도 좋았다.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지금 느낀 가장 큰 슬픔을 토해보려 했다.


‘그’니까. 이리 꿈에서 어리광 피우는 모습도 모두 안아주겠지 싶었다.

거의 토할 것 같은 울부짖는 목소리로 얘기하는 애신이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셨소.”


울분이 토해졌다.


“그러니 오지 마시오.”


다행이라 생각됐다.

그가 여기에 없어서.


“조선은 온통 지옥이오.”


보고 싶은 얼굴이 눈앞에 있는데,

곁에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는 애신이었다.


“이리 꿈에도 오지 마시오.”


꿈이 깨어도 생각이 나게끔 더 자세히 유진을 보는 애신이었다.


“하루라도 잊어야”


꿈이라 그럴 수 없겠지만 손을 뻗어 만지고 싶었다.


“내가 살지 않겠소.”


그렇게 꿈인데도 불구하고 시야가 흐러졌다.

힘이 빠져서 눈이 감기는 애신이었다.


그런 애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유진이었다.


*


애신은 깨어나 유진과 다시 오랜만에 재회를 나누었다.

자신이 꿈에서 유진을 봤다고 했을 때 이리 진짜로 나타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거 꿈 아니라고 말하는 유진이었다.


“또. 나를 구해준 것이오?”

“그렇게 됐소.”

“그대는 언제나 나를 구하오.”


애신은 조선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위기에서 구해주는, 그게 자신인지도 모르고.


그러나, 낭만은 둘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애신을 잡으려고 일본제국은 한양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 독립군인 애신의 부모를 사살했고 이제는 독립의 의지를 이은 애신마저 죽이기 위해서였다.


“갑시다. 내가 데려다주겠소.”


유진은 자신의 미국인 신분으로 애신을 지켜주려 했다.


“혼자 가겠소.”

“검문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러니 여기 있으시오.”


애신은 자신과 함께 같은 꿈을 꾼 동료들을 생각했다.


“안전하게. 미국인으로. 내 옆은 위험하오.”


차마 유진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는 애신이었다.


“내가 가려한 길에 저이들의 죽음은 없었소. 또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될까 두려워졌소. 그러니.”

“각오했어야지! 그 누구의 죽음도 각오했어야 하오. 전쟁은 그런 것이오.”


함께 거대한 태극기에 피로 도장을 찍었던 동료들이 있었다.

애신은 그들의 염원을 위해서라도 조선을 떠나 조선을 위해 싸우려 했다.


결국 애신도, 유진이 함께 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사실 속으로 그가 돌아와 너무나, 그러나 표현할 수 없이 행복했던 애신이었다.


그와 조선, 어느 것 하나 잃을 수 없는 애신이었다.

두 사람은 신의주로 가는 기차표를 마련해 탔다.


기차에는 일본군 장교가 있었으나 여차여차한 위기들을 넘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애신의 얼굴을 아는 장교가 있었다.


그는 애신을 수상쩍하게 여기며 살피다 애신을 발견했다.


“내 남은 생을 다 쓰겠습니다.”


유진은 일본군의 철도권 사업을 쥐고 있는 사업자를 기차를 타면서 우연히 알게 됐다.

그리고 그가 일본군의 뒤에 있는 걸 보았다.


그라면, 일본군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신에게 한 발의 총알이 있는 총을 받고, 자신의 총을 준 유진이었다.


“그 총으론 부족해보이오”

“괜찮소.”

“내가 안 괜찮소.”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일본군이 대처하지 못하게 철도관장을 붙잡았다.


“그 모든 걸음을 헛된 희망에 의지하였으나, 살아만 있게 하십시오.”


애신을 만나러 오기 전에 떠올렸던 맹세를 떠올렸다.

다행히 살아 있었다.


하늘이 살아있게 하였으니

이제는 자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그 이유 하나면 전, 나는 듯이 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애신을 쳐다보는 유진이었다.

애신은 유진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곧 터널이 나타날 것이고 그때가 기회라고 말한 유진이었다.


”총알이 몇 발 없소.“


어떻게든 함께 갈 생각을 하는 애신이었다.

유진은 그녀를 보며 천천히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그대는 나아가시오.“


순간 애신이 놀랐다.

저게 무슨 말일까 생각했다.


유진은 가는 길 조금이라도 더 애신을 담고 싶었다.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한 번으로 애신마저 자신의 뒤를 따를 가 두려웠다.

그런 두려운 마음으로 겨우 애신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애신에게 무언으로

‘잘지내시오’라는 말을 전했다.


애신이 놀라 유진을 말리러 뛰어들었다.

유진은 이미 일본군을 위협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기차 칸 뒤로 물러났다.

딱 한 발이 있는 총이었다.


그대로 뒤로 돌아, 명사수의 실력을 떠올리며 그 어떤 때보다 신중하게 기차를 연결하는 연결기를 쐈다.


백발을 쏴 백 한 발을 맞춘다는 실력답게 연결기에 맞았다.

곧 유진이 탄 칸이 애신이 있는 칸으로부터 떨어졌다.


애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두 글자였다.


”유진!“


유진은 소나기처럼 날아든 총알을 받아내면서 한 발도 애신에게 닿지 않기를 바랐다.


유진은 일본군과 터널 속에 남아 빗발치는 총알을 막아냈다.

애신이 탄 기차는 그대로 달려, 깊은 어둠의 침식인 터널을 빠져나갔다.


‘그대는 나아가시오, 나는 한 걸음 물러나니.’


부디, 애신이 조선의 독립을 보기를.

그래서 끝내 살아남기를.


‘불꽃으로 피어오르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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