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383
공유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공유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지한결
제목: 낯선 하루.
사람들은 마치 오늘 하루를 위해 일년을 버텨온 것처럼 모든 행복을 쏟아 부은 모습이었다. 이 행복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각자의 방법과 그리고 비슷한 결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곁에 홀로 걷고 있었던 한결이었다.
“다들 행복해 보이네.”
한결은 그들을 보면서 어쩐지 자신 혼자 외딴 섬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행복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데 자신만은 그렇지 못했다.
혼자 걷는 이가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으로 겪어 보는 솔로 크리스마스였다. 하필이면 매년 그녀가 바랐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펼쳐지고 있는 풍경인데, 정작 매년 함께 였던 그녀는 이제 옆에 없었다.
조금만 손을 옆으로 옮기면 항상 부딪쳤던 그녀의 몸도, 그렇게 들렸던 목소리도 이제는 상실되었다. 잡을 곳 없이 허공을 맴도는 손이었다. 그녀의 따뜻한 촉감대신 차가운 한기가 손가를 멤돌뿐이었다.
“깨끗이 잊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결국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유언대로 가끔은 질투도 느꼈던 존재의 옆이었다. 하나님의 곁에 묻어 달라고 했던 약속을 지켰던 한결이었다. 그렇게 기일이 아닌 이상 찾지 말라고 했던, 한결을 걱정한 그녀의 유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결과 다른 이유로 성당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성가가 울리고 있었고, 수천년이 지난 후에도 축복받는 아기 예수의 탄생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럴 노랫말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가희야.”
성당 옆, 그녀의 가루를 담고 있는 대성당의 지하로 들어온 한결이었다. 납골당 안에 몇명의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들은 위층의 살마들과 다르게 한결과 같은 뜻으로 이곳을 찾았다.
오늘처럼 행복이 전염되어 퍼지고 있던 날, 그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보고싶다.”
한하게 웃는 가희의 얼굴이 보였다. 기억과 사진 속에만 있는 표정이었다. 기억에서는 목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냐며. 보고 싶어서 그렇다고 대답해주고 싶은데, 정작 어떤 질문도 한결에게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가희를 보다가 성당밖으로 내렸다. 가희가 매년 소리쳤던 화이트. 하얀 눈들이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다.
“네가, 내리게 하고 있는 걸까.”
그녀가 떠난 후 에서야 내리는 눈들이 야속했다. 그녀가 그렇게 찾을 때는 오지 않았으면서, 이렇게 그녀가 가 버리고 나자 오는 게 싫었다.
그렇게 쌓여가는 눈들을 밟으며 성당을 떠나는 한결이었다. 한결의 발자국들이 깊숙이 새겨지며 주변에는 행복한 사람들의 여러 발자국이 함께 찍혔다.
눈이 점점 더 거세졌다. 성당을 나오며 한결은 생각했다.
‘이렇게 내리는 눈을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해마다 가희가 그토록 바랐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정작 가희가 떠나버린 이후에야 차갑게 쌓여만 가는 풍경으로 한결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성당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눈밭에서 아슬아슬하게 미끄러지는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비명이 들렸다.
“앗… 조심하세요!”
한결이 급히 손을 내밀었다. 눈 길 위에서 균형을 잃고 휘청대던 그녀가 가까스로 한결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살짝 얼어 있던 한결의 것보다는 조금 더 따뜻했다.
“감사해요… 정말 아슬아슬했네요.”
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부끄러워했다.
“괜찮으세요? 발목은 안 다치셨어요?”
“네, 잠깐 놀라긴 했는데… 신발이 미끄러워서 그만.”
“다행이네요.”
눈 위에서 가볍게 숨을 고르며,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같은 성당에서 나왔다는 걸로 보아, 어쩐지 닮은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스쳤다.
그녀가 한결의 등 뒤에 있던 고딕풍의 성당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사람 찾아오신 거예요?”
“네… 그런 셈이에요. 비슷하시군요?”
“…저도요.”
둘 다 말끝이 떨렸다. 아픔의 무언가가 겹쳐진 그 시간 속에 있었다.
“저… 추우니까 일단 나가서 얘기할래요?”
이름도 모르는 그녀가 조심스레 권유했다. 성당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축하의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이 둘은 그 틈에서 살짝 벗어나고 싶었다.
한결은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요. 근처에 잠깐 앉을만한 데가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은 성당 옆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별다른 메뉴 없이도 어쩐지 따뜻해 보이는, 특유의 캐럴이 흐르는 곳이었다.
“정말 눈이 많이 오네요. 저는 한나라고 해요.”
그제야 그녀가 이름을 밝혔다.
“저는… 지한결이라고 합니다.”
“지한결… 이름이 참 멋지네요.”
둘은 벗어둔 코트 위로 기도를 올린 듯한 손을 마주했다. 어색한 첫 인사였지만, 성당에서 이미 조금은 공유된 분위기가 있었기에 대화는 비교적 수월하게 이어졌다.
카페 창 밖으로는 하얀 눈들이 계속해서 크리스마스 풍경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한결은 알 수 없는 울적함 속에서도, 이 하얀 배경을 좋아했던 가희가 떠올라 숨이 잠깐 멎는 기분이 들었다.
‘가희… 네가 원하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하지만 네가 없네…’
마음 한편에 스친 그 문장은 잠시 그를 아프게 했다.
“저… 괜찮으시면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성당에 누구… 가족 분을 모시러 오신 거예요?”
한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결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가족이라 하기엔… 가족 같은 사람, 아니, 내 전부였던 사람이죠.”
“아… 혹시… 사별하신 거군요?”
“네. 좀 됐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요. 그 사람에게 꼭 인사를 하고 싶더라고요. 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왔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던 사람이라….”
한나는 한결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시선을 숨기지 못했다.
“…저도… 사실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면서 애써 웃어보이는 듯했다.
“저도 최근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어요. 그 사람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보다는 따뜻한 걸 좋아했는데… 오늘 같이 눈이 이렇게 많이 오면, 오히려 투덜투덜했던 사람이거든요.”
살짝 입맛을 다신 한나가 덧붙였다.
“그래서… 사실 저도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성당을 찾았어요.”
한결은 왠지 모르게 한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역시 성당으로 간 이유가 결국 ‘혼자가 되기 싫어서’였으니까.
“이런 날… 정말 이상하리만치 모두가 행복해 보이잖아요. 혼자인 걸 더 자각하게 만드는 날이기도 하고…”
한나가 작게 웃어 보였다.
서로의 사연을 조금씩 나누기 시작하자, 어색했던 공기가 풀렸다.
언뜻언뜻 가희를 닮은 구석이 전혀 없진 않았다. 그러나 한나는 분명 가희와 달랐다.
가희는 활달한 웃음으로 날씨마저 따뜻하게 만들었는데, 한나는 조용하지만 살포시 온기를 전하는 타입이었다.
한결은 그런 차이가 오히려 자신을 주춤하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가희와 전혀 다르잖아….’
늘 곁에 있던 가희만 생각하면, 다른 사람은 어떤 모습이어도 선뜻 애정이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나와 주고받는 몇 마디에 마음이 괜스레 편안해지는 건 왜일까.
그 자신이 낯설었다.
“저… 한결 씨.”
한나가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올해는 이렇게 됐지만, 내년에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또 왔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조금 덜 외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까요.”
“글쎄요. 내년… 상상도 안 되네요.”
“하긴, 내년이 되면… 저도 남자친구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한나가 농담처럼 웃어 보이자, 한결도 모르게 같이 웃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네요. 나도 그때는… 좀 다를 수도 있겠죠.”
“분명 그럴 거예요.”
그렇게 한참 카페에서 얘기를 나눈 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거리로 나왔다.
도시가 온통 웃음소리와 축복의 불빛으로 가득했다. 전구가 촘촘하게 장식된 큰 트리 앞에는 서로의 추억을 남기려는 연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결과 한나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함께 걸을까요?”
이번엔 한결이 먼저 제안했다.
“네, 좋아요.”
눈길을 조심스럽게 걸으며, 서로 내리는 눈을 감상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으로 가득 차 보였고, 그와 반대로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이 둘은 서로에게 조금은 기댈 수 있는 친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서는 이 둘을 향한 미묘한 시선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카페 직원, 성당에서 만난 지인들, 혹은 우연히 스쳐 만난 이들이 두 사람을 보며 쓸데없는 설레발을 치곤 했다.
“두 분, 혹시… 연인 분이세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두 사람은 일제히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늘 함께 웃는 연인들만 바글바글한 크리스마스 시즌의 풍경 속에서, 한결과 한나는 서로에게 점점 특별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분명 이들은 서로의 결핍을 위로해 주는 ‘친구’에 가까웠지만, 사람들의 오해(?) 아니, 기대(?) 섞인 시선에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흔들렸다.
“우리, 그냥… 서로의 연인을 잊을 때까지 친구로 지내면 어때요?”
한결이 내뱉은 말에, 한나가 작게 웃었다.
“좋아요. 그러다 보면… 언젠간 괜찮아질지도 모르죠. 새롭게 누군갈 좋아할 수도 있고.”
한결은 순간, 가희와 함께 라면 느꼈을 법한 감정이 지나치듯 스쳐갔다. ‘…뭐지, 이건.’
그는 분명 가희를 아직 잊지 못했다. 그리고 한나 역시 누군가를 마음에 간직한 상태였다.
크리스마스의 밤이 깊어 가며, 다정한 사람들의 소리가 더욱 요란해 졌다.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캐럴에, 새해를 기약하는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때, 소란스러운 인파 사이에서 한나가 중심을 잃고 또다시 미끄러졌다.
“조심—!”
한결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아예 두 손으로 단단히 안아주듯 감싸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곧장 마주쳤다.
한나의 눈에 깃든 슬픔과 따스함, 그리고 잔상처럼 떠오르는 그리움이 동시에 보였다.
그 순간, 한결의 가슴 속에서 낯선 떨림이 일었다.
잊어야만 하는 사람을 잊지 못해 찾아온 하루였는데, 또 다른 사람이 움트고 있었다.
‘이건… 그냥 연민인가, 아니면… 뭘까.’
한나 역시 눈을 살짝 깜빡였다.
말 한마디가 오가기 전에,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불빛이 두 사람을 비추며 강렬하게 반짝였다. 흰 눈에 반사된 빛이 마치 별무리처럼 퍼졌다.
그렇게 서로의 온기를 확인한 채, 새하얀 계절 속에서 손을 맞잡고 서 있던 두 사람이었다.
한결은 문득, 시간이 너무나도 낯설게 흘러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분명 우리, 아직 친구로만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의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졌다. 그렇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내일… 혹시 약속 있으세요?”
한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한결은 살짝 당황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요, 딱히 없습니다.”
“그럼, 우리 그냥… 좀 걸을까요? 오늘처럼.”
“좋아요. 같이 걸어요.”
그러면서도 한결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은, 오늘과는 또 다른 낯선 하루가 될 것 같다.’
알 수 없는 떨림과 두근거림이 어슴푸레 마음속을 스치고 있었다.
가희를 잊지 못한 채 맞이하는 매일이었지만, 언젠가 또 다른 무언가로 나아가게 될지 모른다는 감각이었다.
짜릿한 예감이 크리스마스의 하얀 밤을 갈랐다.
함께 나누어진 상실이, 언젠가 새로운 출발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
그렇게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민 채, 오늘의 낯선 하루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또 다른 내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