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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384

by 라한
한가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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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현가영

제목: 마지막 프로포즈


흙먼지를 내뿜고 달리는 차를 바라보는 가영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담겼다.


“고 놈 참, 멋드라 지네.”

“여자애가 말을 예쁘게 해라.”

“얼굴만 예쁘면 됐지, 말까지 예쁘게 하면 남자들 뽕가서 안된다.”


아버지가 카센터를 운영하는 영향이었을까, 가영은 처음에는 레이서가 되고 싶었지만 운전의 재능은 동생에게 졌기 때문에 양보했다. 대신 동생이 타는 레이싱 카는 아니었지만 다른 차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가 되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반 승용차 보다는 반트럭이 가영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때마침 전기차, 수소차 열풍이 불어서 더 이상 발전할 게 없어 보였던 자동차의 디자인도 완전히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가영은 아버지 카센터 옆 야외 테이블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반트럭의 엔진 룸 디자인을 그리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 어느새 저녁놀이 벌겋게 내려앉아 빌딩 사이를 물들이고 있었다.


“너 또 거기 있었냐?”


동생 현우가 기름때 묻은 작업복 바지를 툭툭 털며 다가왔다. 오늘도 엔진오일 교체 작업을 도와주다 온 모양이다.


“작업 꽤 길었나 보네, 얼굴이 다 새까만데?”


가영이 쓱 웃으며 동생의 얼굴을 핸드타월로 대충 훔쳐주었다.


“누나야말로 여기 계속 앉아 있는 거야? 그러다 모기한테 뜯긴다.”

“더 뜯길 건덕지도 없어. 아이디어가 안 나오잖아.”


가영은 다시 스케치북에 시선을 떨구었다. 한 장, 두 장, 얼마나 그려댔는지 이미 수십 장이 흩어져 있었다. 모터스포츠를 좋아하긴 하지만, 작정하고 ‘레이싱카 디자인’에 몰두하는 동생에 비해 가영의 도화지는 언제나 반트럭과 그 변형 모델로 가득 차 있었다.


동생은 디자인을 떠나 직접 운전하고 몇몇 대회에서는 수상도 했다. 그랑프리 대회에 나가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후원도 부족했다.


가영은 자신이 성공해서 동생의 멋진 후원자가 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다. 누구보다 동생을 질투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그만큼 비례하여 응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너도 참 이상하다.”


현우가 투덜댔지만, 가영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이상해도 어때. 내 마음도 반쯤 트럭인 걸.”

“뭐래…”


현우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방금 끝낸 작업의 잔열이 남은 손으로 물병을 따서 마셨다. 가영 역시 주저 없이 현우 손에서 물병을 빼앗아 들이켰다.


“으음, 시원하다. 아버지는?”

“센터 안에서 결산 중. 곧 누나 찾을 거다.”

“뭐, 매번 그래. 얼른 마무리해야지.”


가영은 뒤척이는 스케치들을 정리하며, 이날 따라 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요즘 가슴속을 어지럽히는 건 단순히 디자인 시안이 아니었다. 반트럭의 미래를 책임질 디자인 콘테스트가 얼마 안 남았는데, 그곳에 함께 출품하게 된 동료가 있었다.


자동차 디자이너 팀에서 만난 후배, 정민.


가영의 유학 시절, 둘은 온라인상에서만 간간이 프로젝트 자료를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이번에 정민이 한국 본사로 들어오면서 오프라인으로 같이 일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어째, 회사에서 마주칠 때마다 정민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누나, 지금 웃었지?”

“내가? 아니, 나 원래 웃고 산다.”

“아니야. 뭔가… 묘하게 달달한 표정이더라고.”


현우의 예리한 지적에 가영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스케치북을 슬쩍 가렸다. 아마 정민을 떠올리는 순간, 얼굴에 붉은 기가 올라온 듯했다. 반트럭 보단 아니었지만 정민을 생각하면 설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걸 동생한테 들키는 게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에이, 재수가 없어. 놀리지 마라.”

“눈치가 3초 만에 왔다 가네.”


현우의 말에 억울하다는 듯이 가영이 눈을 흘겼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차라리 낫겠건만, 집안 식구들은 웬만하면 남 일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누나.”

“응?”

“그 정민이라는 선배, 아니 후배, 뭐 그런 사람. 레이싱카 좋아하던데, 누나는 반트럭에 빠져 있고. 둘이 합의점이 있을까?”

“그게 뭐 어째서.”


정민을 떠올 린지 어떻게 알고 현우가 그런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가영은 괜스레 머쓱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만났을 땐 레이싱카만 이야기하는 정민이 좀 지겹게 느껴졌는데, 최근에는 의외로 트럭 시장에도 관심이 깊어 함께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영이 어찌나 들떠서 설명을 하던지 정민이 그 반짝이는 눈빛에 조금씩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있을지 없을지, 뭐 직접 찾아봐야지.”

“근데 표정 보니까 벌써 찾아놓은 것 같은데?”

“에휴, 너도 참.”


그때, 카센터 안쪽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영아, 현우야! 이리 좀 와 봐!” 두 사람은 네, 하고 대답하곤 뒤를 돌아 함께 걸어갔다. 그날따라 저녁놀이 더 붉게 타오르는 듯했다. 가족들이 모두 차를 좋아했다. 어머니만 빼고. 원래 엄마도 아버지의 차에 관련한 멋진 모습에 반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했다. 거기다 운명이란 게 무서운 건지 자식들 마저도 차에 빠져서 자를 더 질투했다. 가영은 그런 어머니의 질투심도 닮았던 것이었다.


며칠 뒤, 가영은 사무실에서 마감 작업 중이었다. 이번 디자인 콘테스트에 제출할 반트럭 도안은 외형이 거칠고 투박하지 않으면서도, 신기술인 수소연료전지와 태양광 패널을 적용한 참신한 콘셉트였다. 쓰고 또 고쳐보고, 계속해서 수정을 거듭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지도 벌써 사흘째.


그때, 사무실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정민이 들어왔다. 손에 테이크 아웃 커피 두 잔을 들고서였다.


“가영 선배, 아직 퇴근 안 했죠?”

“…언제 간 적 있나? 나 여기 자고 있어.”


가영의 너스레에 정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미소가 평소와 달랐다. 조금 더 어색하고, 조금 더 긴장된 눈빛.


“이거… 같이 마시면서 이야기 좀 할래요? 오늘도 밤 샐 거 같은데.”

“좋지.”


가영은 정민이 건네 준 커피를 받으며, 무심코 상대의 손을 바라보았다. 삭막한 디자인실 안에서 늘 동료 혹은 선후배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던 그가, 왠지 오늘은 좀 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었다. 문득 정민이 입을 열었다.


“저, 요즘 가영 선배 도안 보면서 진짜 많이 배웠어요. 솔직히 말하면… 선배가 반트럭 가지고 얘기할 때마다 그 집중력에 놀라기도 했고.”

“그렇지, 내가 또 꽂히면 끝장을 보는 타입이라.”

“그건 잘 알고 있어요.”


정민이 씩 웃으며 가영을 바라봤다. 커피 향이 풀풀 나는 사무실 구석에서,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동공과 동공 사이에서 수많은 문장이 오갔고, 가영의 가슴은 서서히 뜨거워졌다.


“있잖아요, 선배. 이번 디자인 콘테스트 끝나면… 꼭 같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정민의 목소리는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머금고 있었다.


“어떤 일? 설마 레이싱팀이나 가자고 하는 건 아니지?”

“아니요.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정민은 서둘러 대답을 회피했다. 가영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중에’라는 말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콘테스트 당일.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발표를 준비하며 행사장이 붐볐다. 가영은 품 안에 도안 파일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지금껏 밤낮없이 달려온 결과물. 심장이 쿵쿵대고, 손에 땀이 배어 나올 정도로 긴장되었다.


동시에, 어딘가 설레는 기분도 스쳤다. 곁눈질로 살피니 정민은 이미 발표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 깔끔한 수트 차림에 피곤함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 그저 묵묵히 가영의 발표를 지켜보고 있었다.


“반트럭 컨셉트 디자인을 발표할 현가영 디자이너를 모시겠습니다.”


MC의 목소리에 이어, 가영은 마이크를 잡았다. 수십 장의 도안, 수백 번의 수정. 그리고 홀로 밤을 지새운 기억까지 모두 떠올라 눈시울이 시큰해 졌다. 하지만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디자이너 현가영입니다. 제가 소개할 모델은 하이브리드 수소연료·태양광 반트럭입니다.”


가영 특유의 힘찬 목소리가 행사장을 가득 채웠다. 커다란 스크린에는 미래적인 곡선으로 다듬어진 반트럭 이미지가 뜨고, 좌중에서 작지 않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왜 이 차량이 필요한지, 앞으로 어떤 가치와 가능성을 갖는지, 진지한 태도로 설명을 이어갔다.


발표가 끝났을 때, 짧은 정적 뒤로 박수가 쏟아졌다. 그 순간 가영의 눈앞에는 정민이 서 있었다. 두 손을 높이 들어 보이며, 어느 때보다 뜨거운 환호를 보내주는 모습. 가영은 간신히 울컥하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행사가 끝나고, 수상 결과가 발표되었다. 가영의 반트럭 디자인은 보란 듯이 본상을 거머쥐었다. 팀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축하 인사를 건네고, 아버지와 현우도 멀리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퇴장로로 나가려던 찰나, 정민이 조용히 가영을 붙잡았다.


“선배, 잠깐만요.”

“응, 왜?”

“말씀드릴 게 있다고 했잖아요.”


정민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자신의 상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함이었다. 아무리 봐도 반지 케이스처럼 보였다.


“정말… 갑작스럽겠지만.”


정민은 가영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떨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지막… 프로포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가영은 순식간에 울컥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지만, 둘을 둘러싼 공기는 마치 멈춘 것 같았다.


“이 디자인 콘테스트 끝나면, 내가 꼭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선배랑… 평생 함께 미래를 디자인해 가고 싶다고.”


정민의 손엔 작은 반지가 반짝였고, 그 위로 무대 조명이 스치듯 내려앉았다. 호들갑을 떨 줄 알았던 가영은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대신 심장 소리가 두 배는 커진 기분이었다.


“…그래, 프로포즈라면 받아줘야지.”


늘 반트럭 이야기로만 뜨겁던 가영의 목소리에, 이번엔 사랑이라는 단어가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소란스러운 엔진 소리는 없어도 두 사람의 마음은 마치 질주하는 레이싱카처럼 빠르게 하나로 좁혀졌다.


그 순간, 아버지와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사진 찍자! 둘이 꼭 붙어봐!” 두 사람은 멋쩍지만 환한 웃음으로 다가서며,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바로 그 손 위, 작은 반지가 따뜻하게 빛났다.


이번에는 트럭도, 레이싱카도 아닌 그저 두 사람의 설렘이 행사장을 가득 채웠다. 분명 현실은 쉽지 않겠지만, 고된 길 위를 달리는 것 마저도 함께 라면 즐거울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가영은 운전대를 잡은 적은 별로 없었지만, 인생의 운전석에 정민과 함께 올라탄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둘이 함께 만드는 자동차가 세상 어디든 멋지게 굴러다니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그 옆에 자신들의 사랑도 함께 달리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마지막 프로포즈였고, 또 새로운 출발이었다.


“근데 왜 마지막이야? 처음도 아니고?”

“처음보단 마지막이 되고싶어서요.”

“처음이 아니야?”

“처음이기도 한데. 근데 처음보단 마지막이 멋지지 않아요?”

“아니! 처음도 중요해!! 중요하다고!”


그렇게 꼭 순탄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었으니까.


한국대회에서 수상했고, 이제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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