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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398

by 라한
이화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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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겸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한이경

제목: 수상한 비행


이 비행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S급 비행이었다.


“어떻게 이런 명단이 모일 수가 있지?”


연예인들로 치면 연기 대상이었고, 아카데미 시상식과 같았다. 분야로 따져도 그레미급은 되어 보이는 인사들이었다. 문학으로 따지면 노벨문학상, 아니 굳이 장르만 따지지 않아도 노벨시상식을 방불케 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알만한 고객들이었다.


“퍼스트 클래스를 타도 안 부러울 사람들이.”


퍼스트급 좌석을 타도 부족할 사람들이 비행기 안을 가득매웠다. 영광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무슨 어벤져스 출동이라도 있었던 걸까?


“뭐해?”


거의 인턴으로 일 경험과 나중에 뒤에 소개하기 좋을 거 같아서 잠시 일하게 된 항공 승무원이었는데, 이런 기회를 맡을 줄은 몰랐다.


“서울대면 다야?”


서울대 출신에 승무원 출신을 더해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최고의 미인이 되는 목표였다. 미스코리아도 염두해 두고 있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개항하기로 한 항공 승무원 알바를 권하는 이모였다.


“알바? 굳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건 아니었지만, 흙수저 까지는 아니고, 동과 은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수준의 재력은 있었다.


그래서 정식 직업을 가지기 전까지 굳이 고정된 업무 시간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이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나중에 어른이 되는 거다.”


이모의 말은, 어른이란 나이만 먹는 게 아니라, 경험을 통해 지식을 짜낼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네글자로 통합되는 고사성어가 되는 것처럼 고초를 겪고, 삶을 체득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나, 알바 안해도 돈 많이 벌어 이모.”


하지만 문제는, 이경은 서울대였다. 그것도 법대. 로스쿨을 진학하지 않은 법대생이었을 뿐이었다. 의대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지만, 변호사와 의사가 합쳐서 벌 수 있는 돈을 SNS를 통해 벌었다.


그건 바로 ‘감각’이었다. 이경이 부족한 건 하나도 없었다. 외모면 외며, 지성이면 지성, 그리고 초천재들이 가지는 ‘감각’마저 가지고 있었다.


문과의 정점. 예술의 극치까지도 이경은 수렴한 것이었다.


“뭐? 얼마나 버는데?”

“나, 월 수입 많으면 1억까지도 땡겨.”


자신의 SNS에 자신이 입은 옷, 걸친 자켓, 그리고 장신구들을 보여줬다. 걸어다니는 광고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경이었다. 이미 세계가 알만한 브랜드에서 광고모델 제의까지 올 정도였다.


S급 스타만 받을 수 있다는 억대의 출연료까지 받으면서 였다. 이경은 동과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스스로 금박을 해버린 재능인이었다.


“어머, 엄청나네. 그래도 한 번 해봐. 얼마나 좋은 기회야.”


마치, 답정너라는 말은 모를테지만, 이미 그런 생각으로 이경에게 물어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이모는 이경뿐만 아니라 이경의 가족들까지 모두 설득해 이경을 인턴급 승무원으로 일하게 만들었다.


“참!!”


그런데 이제와서 보니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경은 밥 한끼 먹으려면 10억을 써야한다는 인물들이 왜 이 비행기를 타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이 마치 창고에 쌓아둔 거처럼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이모는 이걸 알고 있었던 거야?”


천재들이 모여 있는 이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만으로 인류는 마치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며, 과학자며, 문학자, 예술가들이 한 자리에 있는 건 도대체 무슨 일일까 싶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흔들리더니, 난기류에 빠지기 시작했다. 비행 경력만 10년이라는 선배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이경은 서둘러 지시를 받고 손님들에게 전해주려고 했는데, 마치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하는 순간이 들었다. 진땀이 났다.


비행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렸을 무렵, 가장 먼저 달려든 이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원래는 전투기 조종사로 이름을 날린 강인혁이었다. 주위에선 기장과 부기장이 동시에 사라진 상황이라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강인혁은 침착한 목소리로 승객들을 안심시키며 조종석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예요?”


상황을 살피는 인혁이었다. 그때까지 한이경은 기내 뒤편에서 승객들을 눕히고 벨트를 단단히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이번 비행의 주된 임무는 여객 안전 유지를 돕는 ‘인턴 승무원’ 정도로 시작했지만, 실제 업무 강도는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바깥 풍경도 이상했다. 첫 착륙지부터 익숙한 현대 도시가 아니었고, 시간이 엉켜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장면이 이어졌다.


승무원 하나가 인혁에게 귓속말을 했다. 손님들을 살피느라 듣지 못했던 이경은 도대체 무슨 일일까 싶었다. 그때 인혁이 조종실로 달려갔다.


이경은 뒤늦게 조종석으로 들어섰다. 강인혁이 기장석에 앉아 콘솔을 만지작거리던 중이었다. 그는 해군 특수 비행단 출신으로 알려졌기에, 모두 그의 활약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순간, 계기판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본 강인혁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그 앞에선 과학자와 수학자 등 각 분야의 거물들이 무어라 의견을 던졌다. 어떤 이는 엔진 동력 구조를 분석해야 한다고 했고, 어떤 이는 항법장치부터 재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단 한 가지 사실만은 못 보고 있었다. 조종사로서의 감각이 뛰어나다는 강인혁 역시 조금 전부터 기체가 전혀 그의 조종에 반응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경은 긴장된 얼굴로 강인혁의 어깨너머를 살폈다. 둘 다 조종간을 붙잡아도 기체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이상한 상태였다. 난기류를 지나칠 때도 마찬가지였고, 착륙 과정에서도 차이가 없었다. 순간 강인혁이 낮은 목소리로 이경에게 말했다.


“조종이 먹히지 않는다는 건... 이미 자동비행 모드가 계속 작동 중이라는 뜻이야.”


이경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잠시 굳어졌다. 다들 전투기 조종사가 위기를 타개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강인혁은 적절히 비행 각도만 살펴볼 뿐, 실제로는 기체가 스스로 항로를 잡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은 허탈해 할 수도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어지기 시작하자, 승객들 중 일부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이곳이 내가 머물 곳 같아”


그렇게 말한 이가 몇 있었고, 착륙과 함께 가볍게 짐을 챙겨 비행기에서 내렸다. 시간 착오인지, 공간 이동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가는 길에 별다른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처음부터 그런 결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이경처럼 낯설어 했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살폈다. 그렇게 비행기가 정차해 있었다. 이경은 지금까지 달려왔던 게 무색해지는 게 느꼈다. 그런데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경은 출구 쪽에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몇몇 승객이 떠날 때마다 이상하게도 기내가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재벌로 불린 이 중 한 명이 이착륙할 때마다 기체가 왜곡된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작 떠나는 이들은 대개 차분했다.


조금 뒤 이경은 다시 기내 통로를 오갔다. 남아 있는 승객들에게 담요와 물을 나눠주면서, 혹시라도 혼란을 겪지 않도록 계속 주의를 기울였다. 대다수 인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 내릴 곳이 아니라는 듯 표정을 굳힌 채 남아 있었다.


뒷좌석부터 앞좌석까지 쭉 돌아본 뒤, 이경은 조종석으로 향했다. 강인혁이 여전히 기장석에 앉아 창문 너머의 풍광을 주시하던 참이었다. 그는 마치 진짜 파일럿인 양, 혹은 마지막 남은 도우미인 양 묵묵히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혹시 비행 계획이 잡혀 있어요?”


이경이 낮게 물었다. 강인혁은 헬멧 조절하듯 헤드셋을 만지작거리다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다만 자동비행 장치가 재시동하는 시점만 파악하면 다음 착륙지로 이동할 텐데, 그때까지 모두가 무사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주위에 서 있던 연구자 무리는 ‘자동항법 알고리즘’을 말하며 열을 올렸다. 영제인이라는 정치인은 하차한 이들에게서 연락이 끊기는 바람에 초조해 보였다. 남아 있는 승객 대부분이 어디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이경 혼자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움직였다.


기체가 다시 위로 솟아오를 때쯤, 탑승객들은 두 번째 목적지로 향하는 불가사의한 여행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파일럿이 손 놓고 있어도 비행기 자체가 알아서 뜨고 내린다는 것, 그리고 그때마다 누군가는 내린다는 사실. 슈론 러스크라는 희대의 천재라고 불렸던 누구도, 빌 가트라 불렸던 인물도, 모두가 그 의문에 답을 내리지 못했다.


승무원 복장을 단정히 고쳐 입은 이경은 차분히 방송 마이크를 잡았다. 웅성대던 이들이 모두 시선을 그녀에게 모았다.


“잠시 후 기내 안전 점검을 마치면, 다시 이동할 예정입니다.”


다들 불안한 기색이었지만, 이경의 말에는 최소한의 신뢰감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인턴이 아니었다. 승객들을 안내하고, 내리는 이들을 지켜보고, 다음 착륙 때까지 상황을 관리하는 책임이 주어져 있었다.


강인혁은 조종석 한쪽에 몸을 기댄 채, 자동 비행 계기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조종간과 스로틀이 거의 장식품에 가까움을 알면서도, 만일을 대비하듯 손을 놓지 않았다. 이 경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녀도 자신이 뭘 더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덕분에, 안전하게 이착륙할 수 있네요.”

“그냥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뿐인데요.”


인혁과 이경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이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경은 그것 만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기장은 사라졌지만 기내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매번 새 세계가 펼쳐졌다. 누군가는 그 사실을 믿기 힘들어하며 머릿속으로 가능한 시나리오를 재구성했고, 누군가는 어처구니없는 장난이라고 치부했다.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 이상하게 새로운 세계를 만나면 손님들이 타고 내렸다. 객석은 계속해서 채워지고 비워졌다.


이경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알겠다며 이 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창밖의 색감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시간대가 어떤 ‘과거’인지, 또 다른 차원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음 착륙까지 남은 시간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경은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남은 승객들도 하나 둘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동비행이라는 불가사의한 힘에 맡기기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바퀴가 그다지 멀지 않은 지면에 닿을 때,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진동을 느꼈다. 모두가 숨죽인 채, 다시 열린 도어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내다봤다. 한 번 더, 이 기체를 떠날 이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경은 긴장 속에서도 머릿속이 맑아지는 순간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자각한 듯, 승객들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밖을 확인하러 나가는 첫 사람의 등 뒤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거리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필요한 세계로 가는 걸까, 나를 필요한 세계로 가는 걸까.”


이경은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는, 이제는 기름도 텅 비었을 거 같지만 여전히 이착륙하며 비행하는 비행기였다.


갈 수 있다면 가고 싶은 곳은 고향일까, 아니면 손님들이 새로운 세계에서 내리는 것처럼 이경에게 또한 새로운 세계일까.


지금은 자신이 맡은 일을 우선 수행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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