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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교진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399

by 라한
인교진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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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교진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진도성

제목: 폐국신라.


“태자 전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태자는 도성을 쳐다보았다.


“글쎄, 발길이 닿는 곳으로 가야겠지. 너는 그만 나를 따라오거라.”

“전하.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도성이 바로 엎드렸다. 태자는 그런 도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이제 태자도 아니다. 신라는 고려에 항복했고, 이제 신라도 끝이고 태자인 내 신분도 거기서 끝났다.”

“비록 천년 대계의 신라의 명운이 다하였다 하여도. 제 명이 남아 있는 한, 저는 태자전하의 신하일 뿐입니다!”


태자는 도성의 진심 어린 눈물에 의해 가슴이 아팠다. 신라의 모든 신하가 이런 태도였다면 결코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애초에 후백제를 이끄는 견훤에게도 그렇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오래전 전한이 있고, 다시 후한이 있듯이 한 번 망해도 다시 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왕권은 궁예로부터 찬탈을 했지만, 궁예또한 신라왕족의 후손이었고, 그런 궁예를 찬탈한 왕권에게 전통성이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도성의 말만 들으면 그 말이 옳을지 모르나, 이제 신라왕이 고려왕에게 항복하였으니 그 말도 틀린 말이 되었다.



그 말이 떨어진 뒤로, 한동안 적막이 감돌았다. 바람은 서늘하게 불어 폐허가 된 궁 담장 사이를 스치고, 먼동이 트는 도성의 하늘가에 실낱같이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태자는 오래된 성벽에 손을 올렸다. 가만히 쓸어보니, 칼자국인지 파손인지 알 수 없는 흔적들이 얽혀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전란의 상흔과 멸망의 흔적일 터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성의 눈에는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았다.


“전하, 그저 떠나실 요량이십니까.”


도성은 비통함을 삼키려 애쓰듯, 입술을 꼭 물었다. 태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성벽 위로 손길을 거두었다.


“떠난다고 해서 무얼 어찌하겠느냐. 내 발길이 머무르는 곳이라도... 신라의 숨결이 남아 있기나 하겠느냐.”


그 말에는 이미 깊은 체념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작디작은 미련도 섞여 있었다. 백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전의 나머지 신하들은 또 어디로 흩어졌을 지, 그 모든 것이 태자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도성아, 너도 알다시피... 이제 신라 왕경은 더이상 왕경이 아니다. 고려가 모든 것을 접수했고, 임금께서는 이미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셨다.”


태자는 무심히 앞을 보았다. 담장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길 위에는 이미 사람들이 떠난 뒤라 황폐함만 감돌았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신다면 어찌하여 이대로 모든 희망을 내려놓으려 하십니까.”


도성은 엎드린 상태에서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 음성에는 절박함이 묻어나왔다.


“나는 내 신분이 끝났다고 했다. 끝내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지 않았느냐.”


태자는 자신을 탓하듯, 허공을 향해 움켜쥐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마치 시퍼런 칼을 쥐었다 내려놓은 듯 한없이 공허한 손길이었다.


태자의 시선은 허공에 머물렀다. 마음속 한편에는 후백제의 이름, 견훤의 이름이 어른거렸다. 후백제의 기세가 강성하던 때, 신라는 이미 전락해 버렸고, 결국 고려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견훤에게 당하던 날들이 떠오르면, 태자는 서글픈 기분이 밀려왔다.


‘신라가 진심 어린 단합을 보였다면, 어쩌면 또 달랐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제는 소용없게 되었지. 그저 아쉬움을 곱씹을 뿐...’


태자의 눈동자는 금세 흐릿해졌다.

도성은 그런 태자의 마음을 애써 위로하고자,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전하, 저는 결코 의지를 꺾지 않사옵니다. 한 번 망한 왕조라도 다시 세울 수 있음은 역사가 증명해 주었습니다. 저 언젠가 전한이 망해도 후한이 일어섰듯이, 발원하고 뜻을 세운다면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도성은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조금 전에 내뱉은 말, 왕권은 궁예로부터 찬탈을 했고, 궁예 또한 신라왕족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지금 이곳 현실에선 허망한 말이 된다고,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미 신라왕이 고려왕에게 항복했으니, 그 말이 틀린 주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쉽게 접히지 않았다.


“전하, 왕건에게 과연 신라의 정신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가 궁예를 몰아내었다 한들, 신라의 종묘사직까지 진정 계승할 수 있겠습니까.”


도성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감돌았다. 그러나 태자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만 있었다. 이제 와서 그런 문제를 따져서 무엇하랴 싶은 마음도 컸다. 신라는 이미 항복하여, 별다른 저항 한 번 못하고 끝나 버렸다. 태자는 이 사실이 무엇보다도 뼈아팠다.


태자는 도성의 충정을 가볍게 무시할 수도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 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도성아, 이 도성(都城) 자체가 이제는 빈 터전이 되었고, 내가 머물든 떠나든 상관없이 폐허만 남았다.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태자가 차분히 묻자, 도성은 허리를 곧추 세우더니 주저함 없이 답했다.


“전하께서 어디로 가시든, 소신은 전하와 함께 가겠습니다. 신라의 부흥이 완전히 불가능해 보인다 해도, 저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확고했다. 태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허무와 고마움이 동시에 맺혀 있었다.


“그래. 그럼 내 발길이 닿는 대로 가 보자.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 까닭도 없고, 우리가 찾을 것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만, 너와 함께라면 갈 길이 있고 못 갈 길이 있으랴.”


그 말에 도성은 조용히 예를 갖췄다. 아직 무너진 궁궐터를 등 뒤로, 이 두 사람의 앞날을 예고할 만한 누추한 서막이 시작되는 듯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폐허가 된 도성 안쪽을 천천히 걸었다. 마치 작별 인사를 나누듯, 부서진 담벼락과 꺾여 버린 기둥, 타다만 건물의 잔해들을 눈에 담았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발아래에 부스러진 기와 조각이 바스락거렸다.


“신라라... 천 년이라는 시간이 허망하구나.”


태자의 독백에, 도성은 대꾸하지 않았다. 오직 태자의 그림자만이 기나긴 참회의 시간을 구석구석 밟고 지나는 듯 보였다. 만약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도성을 가로지르다가, 그들은 문득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몸을 경계했다. 고려군인지, 혹은 또 다른 세력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망해 가는 신라의 잔해 중에도, 여전히 해코지하려 드는 무리들이 있을 수 있었다.


“전하, 잠시 몸을 숨기시옵소서.”


도성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허물어진 담에 난 틈새가 있어, 태자와 함께 잔해 뒤로 몸을 낮추었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으나, 다행히 이쪽으로 들어오는 기색은 없었다.


잠시 후 말발굽 소리는 다시 멀어졌고,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 폐허에는 더 이상 머물러 있어선 안 될 듯합니다. 누군가 우리를 쫓고 있는지, 혹은 무작정 약탈을 일삼는 무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사옵니다.”


태자는 도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발각되어 끌려 간들, 이미 항복한 신라 왕족이라고 해서 특별 대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신라의 태자라며 위협적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서둘러 월성 밖으로 나아갈 채비를 갖추었다. 남아 있는 물자는 거의 없었고, 적당한 낡은 말 한 필을 구할 수 있을까 궁리해야 했다. 왕족이라면 본디 근위나 시종이 따랐겠지만 이제 그 어떤 호위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도성이 예를 갖추며, 태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혹 영주나 호족들의 동향을 살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래도 아직은 신라를 따르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과 뜻을 모을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태자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있다면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그들이 과연 남아 있을까. 다들 이미 고려에 기울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완전히 포기하는 듯한 투는 아니었다. 태자는 스스로 되뇌었다.


‘혹시라도 잔존 세력이 살아 있다면… 신라의 부흥까지는 아니어도, 고려의 억압 속에서 숨죽이고 있진 않을까.’


경성을 빠져나오자 넓은 벌판 너머에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졌다. 이리저리 탄식이 흘러나오는 황량한 들판엔, 전란의 상흔이 서려 있었다. 그 앞에서 도성은 갑작스레 발길을 멈추고,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기... 보십시오, 전하.”


살짝 쓰러진 나무막대에, 해진 헝겊이 휘날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오래전 신라의 상징이 그려진 깃발 조각 같았다. 색이 바래고 찢겨서 형체를 간신히 알아볼 정도였지만, 분명 신라를 뜻하던 무늬가 남아 있었다.


“언제적 것이냐... 이처럼 가련하게 남았구나.”


태자는 그 깃발 조각을 들여다보았다. 세파에 시달리고 찢어진 모습이 어쩐지 지금의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도성은 잠시 침묵하더니, 깃발 조각을 정중히 걷어들었다.


“전하께서 불편하시지 않으시다면, 이것을 제가 간직하겠사옵니다. 언젠가, 저희가 다시 신라의 이름을 되찾을 날이 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 말에 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도성이 공손하게 깃발 조각을 챙기는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도성은 깃발을 조심스레 품에 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를 가든 편히 쉴 곳이 마땅치 않을 터였다. 더욱이 고려가 이제 통일의 기반을 닦아가고 있는 마당에, 신라 왕족과 그 수하가 함께 돌아다닌다고 알려지면, 곧바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릴지도 몰랐다.


“전하, 저기 작은 산길을 넘어가면 외부의 눈길을 조금은 피할 수 있을 듯하오. 당장은 몸을 추스를 은신처라도 찾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래야겠지. 허나 과연 어디까지 이렇게 떠돌아야 할지... 도성아, 혹 너는 겁나지 않느냐?”


태자가 새삼스럽게 묻자, 도성은 결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전하와 함께라면, 그 어떤 시련도 두렵지 않사옵니다. 신라가 항복했으나, 저의 마음은 항복하지 않았사오니...”


그 한마디에 태자는 다시금 마음 한 켠이 뭉클해졌다. 비록 세상이 뒤집혔어도, 이렇게 목숨 걸고 따라주는 신하가 아직 있다는 사실이 그를 떠받쳐 주는 듯했다.


두 사람은 말을 구하지 못했으므로, 일단 보행으로 천천히 산길로 올라갔다. 앞에는 돌무더기와 엉킨 나뭇가지가 길을 가로막았고, 배회하는 도적이나 굶주린 이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전하, 간단한 식량이라도 구해야 할 텐데, 이 근방엔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듯하옵니다.”


도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전란으로 많은 마을이 황폐해졌음을 잘 알고 있으나, 막상 걸으려니 막막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천 년 역사를 지닌 신라도 하루아침에 사라졌거늘, 어디에든 먹고살 길을 찾긴 해야 할 것 아니겠느냐.”


태자는 스스로를 다잡으려는 듯, 강인한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그 속에는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허탈감이 깃들었다.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허물어질 듯한 작은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이전에는 신라 왕실과 관련된 작은 별채나 사당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누가 들러붙어 살고 있는지, 아니면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지 분간이 어려웠다.


“전하, 혹여 여기 누가 있을지 모르니, 제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도성이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겼다. 문턱도 거의 부서져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다 쓰러져 가는 건물 기둥 사이에 쪼그려 앉은 한 노인이 보였다. 노인은 둘을 보고 홱 뒤를 돌아보며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무엇이오, 여기서 뭘 하시려오...”


노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도성은 노인을 해치지 않을 듯 천천히 손을 들어 보였다.


“우리는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오. 혹 여기서 잠시 쉬어갈 수 있겠사옵니까.”


노인은 주름진 눈으로 이들을 유심히 살피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막을 힘도 없소. 비가 오면 지붕이 샐 터이니, 그리 오래 머물 곳은 못 됩니다.”


그 말에 태자와 도성은 감사 인사를 하고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는 재가 엉켜 있고, 물이 새는 자국이 군데군데 흥건해, 이곳이 오래도록 방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성이 몸을 낮추어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려 하자, 노인은 시큰둥하게 대했다. 그러다 문득 노인의 시선이 태자의 얼굴로 옮겨 갔다.


“낯이 익구먼. 아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으려나.”


태자는 잠시 당황했으나, 굳이 자초지종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여겨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저 떠도는 나그네입니다.”


노인은 피식 웃었다.


“나그네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은 신라의 흔적이 뚜렷한 곳이오. 예전에는 임금님께서 은밀히 머물렀다는 소문도 돌았고... 헌데, 임금이든 태자든, 이젠 다 무너졌으니, 별 의미가 없겠지.”


태자는 그 말에 작게 목이 멨다. 역시나 이 노인이 신라에 대해선 알고 있는 듯했다.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아서, 태자와 도성은 잠깐 건물 뒤편에 가 앉았다. 누추하고 폐허가 된 장소였지만, 일단 바람을 막을 수 있었다.


도성은 작은 가죽주머니에서 마른 식량을 꺼내 태자에게 바쳤다.


“전하, 요즘 변변한 음식을 구하기 쉽지 않으니, 조금이나마 드시옵소서.”


태자는 고개를 저으며, 반쯤 잘린 곡물덩이를 받아들었다.


“사실 전하, 이제 어찌할 것인지 길을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떠돌며 숨어 지낼 것인지, 아니면 신라를 다시 세운다 어쩐다 하는 미몽을 추구할 것인지....”


도성의 말에 태자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멀찌감치 떨어져 둘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쉬운 일이 아니로구나. 이미 누구도 우리를 돕지 않을 수도 있고, 그저 무용한 희망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태자의 음성에는 미세한 떨림과 함께, 미련이 서려 있었다. 도성은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소신은 전하를 따를 것이옵니다. 어떤 길을 택하시든, 신라의 마지막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 믿고 싶습니다.”

날이 더 밝아 옴에 따라, 전각 바깥으로 새들이 울며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폐허에 깃든 어두운 기운이 걷히고, 작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성아, 이제 다시 길을 떠나자꾸나. 여기가 우리를 붙잡을 이유도 없고, 더 머물러야 할 까닭도 없다.”


도성은 묵묵히 예를 갖추고, 태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노인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등 뒤로 작게 중얼거렸다.


“어느 누구시든, 신라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면, 다음에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


태자와 도성은 그 말에 대꾸를 하진 않았다. 다만,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울리는 느낌으로 계단을 내려섰다.


전각을 뒤로한 태자와 도성은 산자락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사람이 조금씩 오가는 기척이 보였고, 어딘가에 있는 작은 마을로 이어지는 길처럼 보였다.


“전하, 마을로 가시려면 일단 사람들 눈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이옵니다. 혹시 태자전하의 신분이 알려지면, 고려 측에서 우리를 곱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도성의 염려에, 태자는 씁쓸히 웃었다. 태자는 목에 두건을 둘러쓰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도성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신분을 숨기겠느냐. 그렇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겠구나. 태자라 소문이 나면, 우릴 잡으려는 무리들이 생길 터이니.”


태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진도성은 고개를 조아리며, 작게 말했다.


“전하. 저 잿더미 속에서도 새싹이 돋아나듯, 한 번 무너진 왕조라도 다시 세울 수 있다고 저는 믿사옵니다.”


태자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 말이 마음 깊이 파고들었다. 이미 패망해 버린 신라에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그래도 끝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 갈래 마음이 스쳤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너와 함께라면, 나는 함부로 절망하지 않을 것 같다.”


태자의 낮은 중얼거림에, 진도성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어느 마을로 들어갈 수도, 산과 강을 건너야 할 수도 있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족이라면 멸시를 받거나, 도리어 잡혀 갈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불안을 안고도, 진도성은 태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천 년 대계를 이룬 신라라면, 언젠가 작은 불씨라도 되살아날지 모릅니다.”


태자는 밖으로 체념을 드러내면서도, 속으로는 미련과 결의를 끈덕지게 붙들고 있었다. 하필이면 옥새의 행방까지 오리무중이라, 혹시 그걸 찾아낸다면 신라 재건의 기회가 될지 모른다는 희망도 스쳤다. 도성은 이때까지만해도 신라의 옥새를 훗날 마의태자라고 불리는 태자가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혹 발길 닿는 곳에서 옥새를 찾았다는 이들을 만나면, 물어나 보자. 하지만 고려를 자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두 사람은 산비탈 아래로 발을 옮겼다. 동녘 하늘에는 어느덧 햇빛이 걸리며, 겨울바람이 서서히 잦아드는 기색이었다. 그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한 번 망한 왕조라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말을 부정할 수도 있었으나, 적어도 태자와 도성에겐 그것이 마지막 희망으로 남아 있었다.


“가자,”


짧은 한마디에, 진도성은 충성을 담아 예를 표했다. 신라가 무너졌다 한들, 아직 살아 있는 자에게는 넘어야 할 산과 찾을 길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월성의 미련을 떨쳐 버리고 떠나면서, 황폐해진 왕경 뒤편에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희미하게 남았다.


“이제 신라도 끝인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계신 한, 저는 신라를 결코 포기할 수 없사옵니다.”


이들의 걸음마다, 한때 천 년 역사를 자랑하던 신라의 이름이 옅은 바람에 섞여 맴돌았다. 그 이름이 훗날 어떤 모습으로 피어나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다시 세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두 사람을 앞으로 이끌고 있을 뿐이었다.


천년의 꿈이 무너졌지만, 다시 품게 되었다. 신라왕이 귀순했지만, 신라의 태자가 함께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연히 신라의 옥새도 경순왕이 고려로 가져왔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왕건은 주변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비밀리에 신라의 옥새를 찾는 일을 맡는 부대를 창설해 일을 맡겼다. 그들은 사라진 태자를 찾았고, 그 태자의 곁에 있는 도성은, 다시 신라를 세울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신라를 잊지 못한 이들이 금강산으로 모여든다는 소문이 많아, 태자의 일행도, 그리고 신라를 잊지 못한 이들도, 옥새를 찾는 이들도 모두 금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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