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03
남민정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남민정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민혜정
제목: 수학여행
“안 간다니까. 내년이면 대학입시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혜정아. 지금 놀아야지? 안 가면 나중에 후회해.”
보통은 반대의 입장이 되어야겠지만, 혜정과 엄마는 서로 수학여행을 가라, 가지 않는다로 싸우고 있었다. 보통은 딸이나 아들, 즉 자식이 가고 싶다고 떼를 쓰고, 엄마나 아빠, 즉 부모가 못 보내줘서 미안한 게 다반사였는데, 여기는 달랐다. 사실 그런 이야기도 아주 지난 세월의 이야기였다. 요즘은 형편 때문에 못 간다는 가정이 있다면 이를 교육부에서 찾아서 보내주는 시스템까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차별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어른들의 사회가 된 것이었다. 차별을 당연히 겪고 자란 어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 번뿐이잖아.”
“한번은, 이미 초등학교, 중학교 다 갔다왔는데, 재미없었어.”
혜정은 엄마의 잔소리가 얼른 끊나길 바랐다. 아직 수학여행까지 한달이나 남았다. 그 기간동안 또 장기자랑 연습하냐 뭐 하냐 이런 게 다 귀찮았다.
“정 가고 싶으면 엄마가 가면 되잖아.”
“얘는, 그러게. 엄마도 가고싶다 수학여행.”
혜정은 엄마의 말에 파스타를 먹다 말고 쳐다봤다.
“정말?”
엄마는 어렸을 대 가정사정 때문에 수학여행을 못갔다. 그거때매 나중에 울컥해서 할머니한테 울분을 토한 적도 있었지만, 당연히 혜정은 이런 사실을 몰랐다. 그런 기억들 떄문일까 예쁜 딸이 엄마와 다르게 기억들과 추억들 마저도 모조리 예뻤으면 했다. 거기다 혜정은 말과는 다르게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수학여행 때 장기자랑을 잘해서 상까지 타왔다.
혜정의 입장은 이랬다.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입시공부도 해야하는데, 그 준비를 이미 조금씩 하고 있고, 한달동안 장기자랑 공연 준비나 이런 거에 쏟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못하거나 하기 싫어서는 어느정도 있겠지만, 일단 시작하면 실제로 1등을 못해서 너죽고 나죽자 이런 건 아니지만 목표는 무조건 1등이어야했다. 그러니까, 즉, 지금 혜정이 말하는 내년 수학능력시험 준비는, 최소 전교 1등, 최고로 전국 1등을 하는 게 목표였다.
수학여행 전까진 한 달이 남았지만, 혜정의 집 안은 이미 시끄러웠다.
“진짜 안 간다니까.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수학여행은 다 별거 없었어.”
혜정은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면 피곤해질 게 뻔해서, 서둘러 대화를 끊고 싶어 했다. 그런데 엄마가 더 지독하게 달려들었다. 자신은 어린 시절 사정상 수학여행을 못 갔는데, 딸에게 만큼은 예쁜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학교 동창인 ‘은지’까지 달려들었다. 하며 설득에 나섰다. 혜정은 귀찮음에 한숨을 푹 쉬었지만, 결국 둘의 협공에 밀려 수학여행에 참가하기로 마지못해 결정했다.
“야, 너 안 가면 2학년 장기자랑은 누가 책임져? 네가 있어야 우리 팀이 1등을 노릴 수 있지!”
“한 달 동안 또 춤이며 노래며 연습해야 하잖아…”
“그게 나중엔 다 추억이 된단다”
투덜대는 혜정을 보며 엄마는, 싱글벙글했다. 혜정은 머뭇거리다가, 장기자랑은 어떤 곡으로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평소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 바로 ‘브레이커즈(Breakers)’의 노래를 커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파워풀한 댄스와 노래가 결합된 곡이었는데, 은지와도 ‘이 곡이 제대로 터지면 무조건 1등 각’이라며 설렘을 나눴다.
야, 그 브레이커즈 멤버 중 한 명이 전학 와서 우리 학교 2학년으로 들어왔대!”
혜정은 처음엔 믿지 않았다. 설마 그런 톱 아이돌이 우리 학교 책상에 앉아 있을까 싶은 의심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장기자랑을 준비하다가 혹시라도 얼굴 마주칠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도 생겼다.
“연습할 거면 이 학생이랑 상의해 봐. 같은 반은 아니지만, 네가 좋아하는 그룹 멤버라잖아.”
며칠 후, 체육관에서 장기자랑 리허설을 하는데, 담임선생이 아이돌 멤버 이시우를 불러줬다. 혜정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TV와 무대에서만 보던 사람이, 교복 차림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안녕? 나 전학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는데, 노래 연습 같이 할래?”
말을 못하는 혜정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혜정은 말을 더듬으며 겨우 대답했다. 장기자랑 선곡이 브레이커즈 노래라, 안무나 디테일을 잘 아는 이시우와 함께하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며칠간 방과 후마다 체육관에서 연습이 이어졌다. 이시우는 혜정과 친구들에게 안무 팁을 알려주거나, 발성 연습을 함께 해주며 열심히 도와줬다. 혜정은 평소에는 장기자랑을 오로지 ‘1등’을 위해 준비했지만, 이번만큼은 음악 자체가 재밌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때마다 이시우와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마어마한 소식이 들렸다. 올해 수학여행, 배 타고 이동한대! 혜정은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실 그녀는 수영을 전혀 하지 못했고, 물을 무서워했다. 배가 흔들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혹시 사고라도 나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야, 배 흔들린다고 그냥 물에 빠지고 그러지 않아.”
은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혜정의 불안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괜히 운동장 한구석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는데, 곁에 다가온 이시우가 특유의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물에 빠지면 내가 구해줄 게.”
“농담 말라고… 나 진짜로 수영 못 한다니까.”
“걱정 마. 생각보다 안전할 거야.”
그 말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기대는 마음까지 슬쩍 들었지만, 혜정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눈길만 피할 뿐.
드디어 수학여행 당일, 선착장에서 대형 여객선을 보자마자 혜정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친구들이 잔뜩 들떠 있는 와중, 그녀는 ‘물에만 빠지지 않으면…’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꺄악, 아이돌이다!’라는 목소리가 터졌다. 브레이커즈의 이시우가 같은 배에 탄다고 하자, 타 학교 학생들까지 난리가 난 것이었다.
“오, 싸인 좀 해주세요!”
한 남자애가 다가왔는데, 그 아이는 키도 크고 눈빛도 반짝반짝한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순간에 혜정의 시선이 그 아이에게 꽂혔다. 이시우의 열혈 팬인지, 수첩과 펜을 들고 떨리는 손으로 사인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혜정은 뜻밖에도 가슴이 뛰었다. 아이돌을 대하는 저 남자애의 순수한 표정, 그리고 막상 시선이 스치자 부끄러운 듯 뺨이 빨개지는 얼굴…. 처음 본 아이인데, 혜정은 왠지 모를 설렘을 느꼈다.
“이름이 뭐야?”
“저… 박준서입니다.”
이시우는 사인을 해주며 준서를 다정하게 대했다. 그때 옆에서 바라보던 혜정은 괜히 묘한 질투가 일었다. 아이돌인 이시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박준서’라는 남자애가 더 눈에 들어와서 말이었다.
수학여행지에서 2박 3일 동안, 혜정은 이시우의 호의 덕분에 준서와 몇 번 마주칠 기회를 얻었다.
“우리 같은 조끼리 어울려서 놀자”
“준서야, 혜정이 춤 연습한 거 구경할래?”
일부러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혜정은 그의 배려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 간질거렸다. 배 타는 것만 아니면, 이번 여행이 꽤나 즐거울 것 같았다.
그런데 마지막 날,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준서가 아이돌 이시우에게 편지 두 통을 건네주었다.
“하나는 당신한테 드릴 거고, 하나는 혜정이 줄 거예요. 대신 좀 전해주세요.”
마침 이시우와 혜정이 같은 장소에 있었던 터라, 준서는 빠르게 도망치듯 자리를 뜨고 말았다. 혜정은 그 상황을 얼핏 보다가, 이시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준서가 쓴 편지라니… 그래, 내가 잘 전해줄게!”
그러나 어딘가 헷갈렸고, 두 개의 봉투가 똑같이 생겨서 혼동한 나머지, 혜정은 결국 두 장 모두 이시우에게 넘겨줬다.
주말이 지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준서는 무척 어색해했다. 혜정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무 일도 없어도 돼요라며 피하듯이 굴었다.
이시우도 편지 이야기를 대충 얼버무린 채 넘어갔고, 결국 2학년을 마무리하면서 혜정은 수학여행에서의 로맨틱한 감정이 실체를 드러내보기도 전에 흐지부지 잊혀졌다.
이후 혜정은 3학년이 되자마자 공부에 몰두했다. 대학 입시에서 최소 전교 1등은 해야 해라는 그녀 나름의 각오였다. 장기자랑 1등, 학습 1등을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이 다시금 불타올랐고, 준서와는 점점 멀어졌다. 사실 문자 한 번 할까 싶을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멀어지는 인연에 마음 쓸 여유가 없었다.
결국 혜정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이번엔 전국 1등은 아니지만 그래도 훌륭하다! 라는 칭찬을 선생님들로부터 들을 정도로, 목표했던 바를 이뤘다. 그러나 정작 합격 발표 이후, 학교 로맨스도, 수학여행의 추억도, 아이돌 이시우와 준서의 존재도 어느새 빛 바래고 있었다.
그랬는데, 대학 입학 후 어느 날 교정에서 스쳐 지나가는 학생을 보고 혜정의 심장이 또 한 번 터질 듯해졌다. ‘저 사람… 어디서 봤더라?’ 하고 멍하니 바라봤는데, 눈이 딱 마주친 상대가 되려 쑥스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박준서였다. 처음엔 둘 다 잠시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혜정아. 혹시… 나 기억 나니?”
“어, 안녕!”
둘은 주변 벤치에 앉아, 간단히 근황을 나눴다. 알고 보니 준서도 이 대학에 합격해서 새내기가 됐다. 인문계열 다른 학과지만, 건물이 가까워 종종 마주칠 듯했다. 혜정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준서가 꺼낸 한마디에 깜짝 놀랐다.
“그 편지 말이야. 사실…. 하나는 네 거였는데.”
“네 거라니?”
“수학여행 때, 아이돌 이시우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한 편지 중 하나… 사실은 너한테 고백하려던 편지였어.”
혜정은 순간 아무 말도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의 마지막 날, 줬어야 할 편지가 ‘두 통’이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런데 자신이 둘 다 이시우에게 넘겨버린 터라, 준서의 고백이 허공으로 흩어져버린 셈이었다.
그런데 준서가 이렇게 다시 보니까, 그 말을 하고 싶었다며 서운함보다는 반가움을 내보였다. 혜정도 뺨이 화끈거렸다. 몰랐던 사실을 듣고 보니, 며칠 동안 생각에 잠길 정도로 강렬했다.
“미안해, 나 그때…. 일단 두 개 다 줘서, 네 진심인 줄도 몰랐어.”
“나도 제대로 말 못 했으니까. 네가 미웠던 게 아니라, 그냥 아쉽고 어쩔 줄 몰랐어.”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가, 이내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긴장감과 설렘이 뒤섞여 있었다. 혜정은 수학여행 때 그저 ‘안전하게 귀찮은 행사만 치르자’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 시절 작은 인연이 이렇게 다시 이어진다는 게 신기하고도 좋았다.
“너… 지금은 공부만 안 하니?”
“응, 나 이제 입시 끝났으니까 좀 쉬고 싶어. 그리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과 제대로 연애도 해보고 싶고.”
준서가 가볍게 혀를 차며 웃었다.
“나도 그래. 이제야 고등학교 땐 못 해본 걸 해보고 싶어.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친해져 볼래?”
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학여행 장기자랑에서 시작된, 그리고 편지 하나로 꼬였던 인연이 다시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사랑을 시작해보자고 결심한 혜정은, 이젠 ‘또 1등 해야 해!’라는 압박감 대신, 자기 안의 새로운 1등을 목표로 삼고 싶었다. 바로,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함께 행복해지는 ‘연애 1등’ 같은 거.
고등학교 때 깨닫지 못했던 달콤함과 설렘이, 대학교 첫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찾아왔다. 어쩌면 곧 다가올 새내기 OT나 동아리 활동 중에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혜정은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나, 이제 제대로 노력해볼래. 편지도 모르고 날려버릴 만큼 어수선했던 과거는 잊고, 네 마음에 답해주고 싶어.”
“좋아, 우리 같이 1등 해보자. 둘만의 1등”
배 안에서 심장이 쿵쿵 뛰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이제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혜정은 가벼운 설렘과 함께, 그 여행의 동행자가 박준서라니 괜찮은 선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늦게라도, 정식으로. 그리고 이번엔 결코 편지를 헷갈리게 둘 순 없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