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04
유다연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우다연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부여연
제목: 백제의 공주
“공주를 잡아라!”
무너진 백제를 버릴 수 없었던 오라버니는 남은 백제의 잔당을 이끌고 부흥군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부흥군 마저도 두 세력으로 나눠 다투게 되었고, 왕자를 따르지 않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어째서!”
백제는 정말로 이대로 망할 운명인가!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는 연이었다. 할 수 없어도 모든 힘을 다해 운명을 거부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망국의 백성도, 특히 망국의 공주라면 그 불운은 이미 점쳐진 것이나 다름이없었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죽기전까지 백제인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부여연이었다.
그동안 왕국에서 호사호위했던 일들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사는 게 아니라, 생이 다하는 날까지 갚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부여연! 백제의 공주다!”
공주는 그렇게 살려고 했다! 그때 공주를 따르는 시녀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공주님! 어서 가셔야 합니다!”
몰아치는 빗속에서 시녀 해린이 울먹이듯 부르짖었다. 텅 빈 흙길 위로, 이미 밤이 깊었음에도 불빛이 허락되지 않는 건, 그만큼 위험이 도사린다는 뜻이었다. 연은 망토 자락을 여미며 횃불을 들었다. 불길이 흔들려 가까스로 앞길을 비추었지만, 계속되는 빗줄기에 금세 꺼질 듯 위태해 보였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부흥군 진영이 있다고 했지요.”
“예, 그렇다 들었습니다만… 반란군이 여기저기 설치고 있어 길이 막혔을 수도 있어요.”
연은 쏟아지는 빗물에 그대로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망국의 공주가 도망치듯 숨어 지내는 꼴이라니. 단지 하루이틀 사이에 세상이 바뀐 듯했다. 신라·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나라가 무너지고, 백제는 스스로 내분을 일으켜 부흥의 불씨마저 깎아내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아직 부흥의 깃발을 들고 계실 거예요. 도망치기 전에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예, 공주님.”
해린은 마치 샘와이즈처럼, 한 발 뒤에서 연을 믿고 따르며,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허리를 굽혀 포구를 빠져나갔다. 푹푹 빠지는 진창, 길가 바위 틈에 숨은 듯한 부상자들. 지나칠 때마다 애처로운 신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연은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흔들려 주저앉는다면, 백제의 마지막 불꽃이 꺼져버릴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 도달한 언덕 너머, 드문드문 횃불이 보였다. 혹여 반란군인가 조심스레 살폈는데, 누군가 외쳤다.
“누구냐! 다가오면 베겠다!”
굵직한 목소리, 시커먼 갑옷. 연은 우선 안전한 거리에서 망토를 젖히고, 살아남은 백제 병사의 표식을 들었다.
“나는 부여연… 백제의 공주다! 부흥군에 가야 합니다!”
상대는 깜짝 놀란 듯, 이내 분주히 움직였다. 이미 백제의 이름이 의미 없어져 버린 시대이지만, 그래도 ‘공주’라는 칭호는 잔존 병사들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곧 병사가 달려와 땀 어린 얼굴로 외쳤다.
“공주님! 빨리 이쪽으로….”
해린이 연을 부축하며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허술하게 만든 장막 뒤로 스무 서른 명쯤 되는 부흥군이 모여 있었다. 여기저기 부상을 입은 채 불안정한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이끄신 부흥군이 맞나요?”
연이 다급히 물었다. 어딘가에서 왕자의 모습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이라면 이미….”
“무슨 일이죠?”
“안타깝게도, 내부 갈등이 극에 달해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왕자님 측이 그 반란에 패배하여… 대부분 흩어졌고, 왕자님은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문입니다.”
연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이미 죽거나 당나라에 끌려간 것은 아닐까. 아무리 무너져가는 나라라도, 오라버니만은 살아있으리라 믿었다. 아니, 살아만 있다면 기회는 있을 거라 여기고 이곳까지 온 것인데. 지금 그 희망이 무너지고 있엇다.
병사들 역시 패색이 짙은 표정이었다. 부흥군이 스스로 자멸하다니, 이보다 비통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백제의 마지막 불씨조차 꺼져 가는 건가…”
연이 비에 젖은 뺨을 닦아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여기 모인 병사들 만큼은 ‘공주’를 보고 빛을 찾으려는 듯 보였다. 혹시라도 결집해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상처 입은 전사, 굶주린 백성, 그리고 무엇보다 내부의 배신이 횡행하는 판국. 더는 소규모 병력으로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공주님, 우리라 해도 당신을 보호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이미 반란군과 외적이 사방에서 뒤쫓고 있어요.”
“그렇다고 이 땅을 떠날 수는 없잖아요. 여기서 백제인으로서”
“지금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살아야 또 다른 기회를 엿볼 수 있다. 그 말이 잔인하게 들렸지만, 부흥의 운명이 이미 기울었음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해린이 연의 손을 잡았다.
“공주님… 우선 왕자님을 찾으셔야 하잖아요. 다른 곳에서라도….”
“하지만 백제 땅을 벗어난다는 건…”
“망국의 공주라도, 목숨이 붙어 있어야 언젠간 돌아올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해린의 눈엔 눈물이 그렁거렸다. 연은 필사적으로 이 나라를 지키고자 했지만, 현실은 더 큰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렸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마치 프로도가 반지의 파멸을 막기 위해 모험을 떠나듯, 다른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부흥군 몇몇이 연과 해린의 호위를 돕겠다며 따라나섰다. 목적지는 고구려였다. 이미 왕자께서 그곳으로 몸을 피했다는 소문도 돌고, 또한 고구려가 신라·당나라에 맞서고 있으니, 백제 공주를 받아줄 여지가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길이 험합니다. 중간에 적군 수색대도 깔려 있어요.”
병사가 주변 지형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끊임없이 산줄기를 타고 북상해야 하니, 강을 건너고 험준한 고개를 넘는 일이 이어질 터였다. 연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거칠어도 상관없어요. 반드시 가야만 합니다.”
연과 해린, 그리고 몇몇 호위병은 가느다란 희망 하나에 기댄 채 북방을 향해 출발했다. 하룻밤을 달려 도착한 계곡.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바위 틈새로 흙탕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말조차 발을 디디기 힘든 상황이라, 대부분 걸어서 길을 개척해야 했다. 부상병도 있었지만, 정신력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어흑…!”
병사 한 명이 미끄러져 계곡 아래로 떨어질 뻔했지만, 연과 해린이 급히 손을 뻗어 겨우 붙잡았다. 연이 있는 힘껏 끌어 올리면서, 온몸이 진흙범벅이 되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여기서 쓰러지면 다 끝이에요!”
해린이 말했지만, 이미 사람들은 탈진 상태였다. 모닥불조차 제대로 못 피우는 날씨였고, 입에 넣을 양식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연은 자신이 챙긴 남은 건과를 꺼내어 병사들과 나누어 먹으며 마음을 다졌다.
“우리가 여기서 포기하면, 결국 백제의 왕족이란 자존심도, 오라버니도,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아요.”
해린이 연에게도 작게 웃어 보였다.
“공주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밤이 되자, 억지로 산비탈 위 움막 같은 곳을 찾아 몸을 뉘었다. 빗소리가 귓전을 때렸고, 밖에서는 맹수의 울음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연은 그 소리를 들으며 어쩐지 망국의 울부짖음과 겹쳐지는 듯해 숨이 막혀 왔다.
“이 길의 끝에 정말… 오라버니가 있을까요?”
“반드시 살아 있으실 거예요.”
해린은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속삭일 뿐.
며칠을 산길에서 보내자, 적들은 물론 백제 반란군까지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망국의 공주를 붙잡아 새로운 공로를 세우겠다는 심산이었다.
길목마다 수색대가 배치되었으므로, 무사히 지나려면 야음을 틈타 계곡을 숨 가쁘게 건너고, 밥 한 끼조차 제대로 해결 못 한 채 무작정 숲 속을 누비는 수밖에 없었다. 호위병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히 고구려 국경 근처라면, 그들의 순찰대가 반란군을 막아줄 수도 있습니다. 얼른 북쪽 경계에 도달해야 합니다.”
연은 이미 발에 물집이 터져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지만,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린을 다독이며 이끌었다.
“천천히, 그래도 계속 가야 해.”
“네, 공주님…. 저도 견디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해 전진했다. 연과 해린도 절망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바위 절벽을 돌아, 강을 건너면 고구려 땅이 시작된다는 말에,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올렸다. 반란군의 함성이 멀찍이서 들려올 때마다, 병사 하나둘이 엉망으로 넘어졌고, 옷자락이 찢겼다. 그러나 마침내 얕은 여울을 찾았고, 차가운 강물에 허벅지까지 잠긴 채 강을 건넜다.
해린이 물에 빠질 뻔하자, 연이 재빨리 부축해서 함께 빠져나왔다. 그야말로 기적처럼 달빛 아래 무사히 강둑에 도착한 순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땅에 엎드려 숨을 헐떡였다.
“드디어… 고구려 땅이네요.”
“그렇습니다… 일단은 살았군요.”
한동안 정신을 추스르던 중, 갑작스런 말발굽 소리가 머리 위를 울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잘 훈련된 기병대가 둑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기사가 소리쳤다.
“누구냐! 고구려 경계를 침범하다니!”
호위병사들이 부들부들 떨며 팔을 들었다. 이젠 싸울 여력도 없었다.
“저희는 백제 유민입니다. 공주님을 모시고 이곳까지…. 제발 해치지 마십시오.”
호위병사들이 부들부들 떨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이젠 싸울 여력도 없었고,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저희는 백제 유민입니다. 공주님을 모시고 이곳까지…. 제발 해치지 마십시오.”
“백제 유민이라?”
말을 탄 고구려 기병대장은 호기심과 경계심이 뒤섞인 눈빛을 던졌다. 이들이 정말로 망국의 잔당인지, 혹은 적국의 앞잡이인지 알 수 없었을 터다. 뒤늦게 호흡을 고른 연이 한걸음 나서며 망토를 걷어 올렸다. 쏟아지던 빗물에 얼굴이 흠뻑 젖었지만, 그 눈빛만은 굳세었다.
“나는 부여연. 백제의 공주다. 무너진 나라를 떠나 어쩔 수 없이 이곳까지 왔소.”
“…백제의 공주?”
기병대장만이 아니라 주변 병사들도 놀란 기색이었다. 무너진 나라의 공주라고 할 만큼 위용이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연의 기백만은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한참을 말 위에서 내려다보던 기병대장은 마침내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일단 체포한다. 대막리지께 보고해야 한다.”
“체포라뇨? 저희가 굳이”
“여긴 고구려 땅이다. 허락 없이 들어왔으니, 네가 누군지 제대로 확인해야겠지. 불만 있으면 듣겠다만, 지금 당장 돌려보낼 수도 있다.”
그 말에 호위병사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힘으로 맞설 상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강을 건너 오는 동안 진이 다 빠졌고, 저들 고구려 기병대의 무장을 보니 도저히 싸움이 되지 않았다.
“체포라는 말이 기분 나쁘긴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따르는 수밖에 없다.”
연이 해린을 돌아보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린은 눈빛으로 공주님 뜻대로 하시지요라 대답했다.
“좋아요. 우리가 협조하겠습니다. 허나, 고구려로 와서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건 상부 지시가 있어야 알지. 허튼 말 말고 일단 이쪽으로 오시지.”
기병대원들이 내려와 부흥군 병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연과 해린을 중심으로 둘러섰다. 아주 사나운 표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언제라도 무력진압이 가능하다는 느낌이 흘렀다.
다음 날 새벽 무렵, 연 일행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어느 관문에 도착했다. 산 아래 펼쳐진 성채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고, 지키는 군사는 두터웠다. 곁에서 기병대장이 군관과 몇 마디 나누자 곧 문이 열리고, 연과 해린, 부흥군 병사들을 안으로 들였다.
“걸어서 이틀 정도 더 가야 대막리지께서 머무는 곳에 닿는다.”
기병대장이 투박하게 말하며, 임시 숙영지로 안내했다. 폐허가 된 민가 몇 채를 개조한 듯한, 허름한 시설이었다.
“아직 신분이 불확실하니, 여기서 머무르며 대기해라.”
“네….”
연이 힘겹게 앉자, 해린이 곁에 다가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그래도 다행이지요. 여기서마저 쫓겨났다면 금세 반란군이나 적군에게 붙잡혔을 텐데….”
“그래, 살아서 도착했으니 다행이긴 해. 그런데 대막리지를 만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사방이 고요했다. 사실상 구금이나 다름없는 신세였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밖에서 야영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모두가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부흥군 병사들 중 몇은 쓰러지듯 잠이 들었고, 어떤 자는 조용히 나가 물과 식량을 수배하려 했다. 연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차가운 공기가 콧잔등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오라버니… 정말 당나라로 끌려가신 걸까.’
백제 부흥을 이끌던 왕자. 자신의 오빠였지만, 이제는 이미 당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끌려갔다는 절망적인 소문이 퍼져 있었다. 연은 그 이야기를 듣고도 끝까지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부흥군 병사들의 말은 서로 일치했다.
“왕자님은 끝까지 저항하다 붙잡혀 끌려가셨습니다. 살아 계셔도, 지금은 아마… 당나라 땅에 계실 겁니다.”
그 실낱같은 희망마저 무너진다면, 연이 이 고구려 땅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왕자를 구하러 당나라로 가기라도 해야 하나. 적어도 지금, 이 국경에서 쫓기는 신세로서는 요원한 일이었다.
며칠 후, 연과 부흥군 병사들은 고구려 군정 관리들 앞에서 간단히 조사를 받았다. 누가 누구이며, 왜 이곳까지 왔는지, 정말 백제 공주인지 등을 묻는 자리였다. 중간중간 통역 비슷한 이가 끼어들어 백제어, 고구려어를 번갈아 사용했다.
해린은 연을 곁에서 도왔다. 중얼거리듯 빠르게 상황을 해설해 주었다.
“맞아요, 공주님이십니다. 의자왕의 딸 부여연이시고, 반란군을 피해…”
관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작성했다. 어느 노신이 색안경을 쓴 채 물었다.
“그럼 지금은 너희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유랑민 신세란 말이냐.”
“유랑민이라뇨. 우리도 백제의 혈통을 이으며, 다시 나라를 세울 그날을 꿈꾸는.”
“백제가 이미 망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나?”
딱딱한 말투와 냉소적인 태도. 연은 가슴이 아팠다. 망국의 공주란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일까.
하지만 반박할 힘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아야’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날 저녁, 조사 결과가 나왔다. 대막리지에게 곧 보고할 예정이지만, 당장 만나게 해 주겠다거나 즉각 처분을 내리겠다는 언급은 없었다. 대신 관문 안쪽의 빈민촌에서 임시로 머물 수 있게 허락이 떨어졌다. 사실상 망명자 취급이었다. 고구려도 중원과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니, 함부로 이들을 방치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해린이 기운 없이 말했다.
“어찌됐든, 당장 우리를 내쫓지는 않네요.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폐허처럼 보이는 빈민촌에 발을 들이자, 이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 사이로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타국인, 혹은 포로 출신으로 보이는 자들도 간간이 보였다.
‘이곳이 우리가 새로 머물 곳이라니.’
그래도 길바닥에서 배회하는 것보단 나았다. 병사들은 허름한 움막을 정비하고, 불을 피울 장작을 마련했다.
“공주님,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만… 대막리지께서 우릴 언제 찾으실지 몰라요. 준비를 갖춰 두시는 게.”
호위병 한 명이 조심스레 조언했다.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불러낼 테지. 그때가 되면, 고구려와도 협상할 수 있을 거야. 대신 우릴 홀대한 이유를 묻고, 우리도 도울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해.”
해린이 작게 웃으며 동조했다.
“네. 공주님께선 왕자님의 소식도 알아보셔야 하잖아요.”
“그래. 당나라로 끌려간 건 정말 사실인지, 혹은 어딘가 다른 숨은 길이 있을지… 알아봐야 해.”
망국의 공주로서, 살아남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오라버니를 구하거나, 혹은 부흥군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을 만들거나, 최소한 백제의 자취를 지켜내야 한다고 연은 믿었다. 비록 고구려라는 낯선 땅에서, 의도치 않은 망명을 하게 되었지만 이곳에서 새로운 인연과 동력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빈민촌에 내려앉은 밤은 춥고 고됐다. 허술한 지붕 틈으로 바람이 샜고, 바깥에선 어둠을 틈타 약탈을 일삼는 무리도 있다고 했다. 부흥군 병사들이 교대로 망을 보며 밤을 샜다.그 사이, 연은 온몸이 쑤셔 잠을 설치다가도, 틈틈이 명상을 하듯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려 애썼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백제는 이대로 정말 끝난 걸까. 아니,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동이 틀 무렵,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해린이 잠에서 덜 깬 표정으로 문간을 열었다.
“누구시죠?”
낯선 고구려 병사 한 명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쓰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넌… 정말 백제 공주가 맞나?”
“맞다면, 어쩌려고요?”
해린이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물었다.
“아, 아냐. 그냥… 동이 틀 때 불려 갈 수도 있으니 대비해 두라고 전하라고 해서.”
병사는 곧 사라졌다. 실없는 입놀림이었을까, 아니면 무언가 신호를 주는 걸까. 연은 자리에 앉은 채로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머잖아 대막리지 연개소문과 직면할 순간이 오리라는 예감이었다. 그는 강력한 군사권을 쥔 실세다. 자신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쫓아낼 것인지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더욱이, 왕자가 당나라로 끌려갔다는 현실을 굳이 거론했을 때, 고구려 측이 도리어 백제인을 불신하거나 하등 쓸모없다고 판단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국의 공주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설령 오라버니가 당나라에 붙잡혀 있어도, 어떻게든 구출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누가 이건 미친 꿈이라 하더라도, 한 번 포기하면 정말로 모든 게 끝이었다. 온조대왕께서 한강 유역에 자리 잡아 백제를 세우시긴 했지만, 옛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로부터 파생한 혈통 아닌가!
해린은 조용히 다가와 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공주님, 여기서도 우린 계속 걸어가야죠. 포기하지 않으시는 거, 저도 잘 압니다.”
“그래, 더디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아침이 밝아왔다. 텁텁한 공기가 가시고, 해가 희미하게 떠오르며 골짜기 위를 붉게 물들였다. 문득, 연은 새벽녘에 들었을 법한 병사의 말을 떠올렸다.
‘동이 틀 때 불려 갈 수도 있으니 대비해 두라고….’
과연 그럴까. 아니면 헛소문으로 끝날까. 어느 쪽이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낫겠다. 연은 거친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제 또 한 번의 문이 열릴 터. 그건 시험인지, 기회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몇몇 부흥군 병사들이 조용히 아침 공기에 몸을 풀고 있었고, 해린은 가마솥에 누군가 얻어온 곡식을 끓여 간단히 죽을 만들고 있었다. 입속에 헛헛하게 들어가는 옥수수 죽 한 숟갈, 쓴맛이 밀려왔지만, 연은 오히려 각오가 묘하게 다져졌다.
어쩌면 고구려 땅에서, 혹은 더 먼 곳에서, 오라버니를 구해낼 실마리를 얻게 될지도 몰랐다. 오늘도 이 길은 험난하겠지만,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희미한 빛이라도 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천막을 흔들었다. 낯선 땅에서 맞는 첫 아침, 연은 비장한 마음으로 천막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먼 하늘 너머, 어딘가에서 빛을 기다릴 오라버니를 생각하며 속삭였다.
“기다려 주세요. 반드시 찾아내서… 이 나라를, 우리 이름을 잊지 않게 하겠습니다.”
해린이 그 곁에서 잔불을 조심스레 뒤적이고 있었다. 고된 여정의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며 서로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했다. 아직 막막하고 불투명했지만, 어쩐지 마음속에 작은 불씨 하나가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망국의 공주는 망하지 않은 희망을 안고 길을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백제의 이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짐했고, 이 다짐을 그저 혼자 간직하지 않고 실천해 모두가 이를 괄목상대하여 다시 보게 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