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07
은비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은비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장준희
제목: 런희
“헉헉.”
다른 애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 속으로 들어가 놀고 있을 때, 준희는 기르는 강아지와 함께 뛰어다녔다. 그러다 보니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는 걸 좋아했다.
강아지와 서로 공을 빼앗기 위해서 뒹구는 아이의 체력은 자연스럽게 높을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남자 아이는 준희의 체력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정도였다.
“준희 너, 같이 축구할래?”
그래서 준희는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했다. 흔히 축구 좀 찬다는 친구들도 준희보다 나은 게 없을 수도 있었다. 피지컬적인 측면으로 남성으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준희보다 좋은 조건이었는데도, 노력으로 만들어진 준희의 다부진 몸매는 이를 넘어서는 계기가 됐다.
“와, 진짜 준희 너 너무 빨라. 나중에 육상 선수 되는 거 아니야?”
때 마침 정부는 스포츠협회와 함께 육상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기업들 중 몇 군데가 여기에 끼어들며 육상 프로리그를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를 다지기도 했다.
이는 한국의 영원한 라이벌이라고 볼 수 있는 일본이, 지난 올림픽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건 사건이 있었다. 비록 100M 달리기는 아니었고 1500M 계주였으나 이는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사건이 되었다.
“일본이 해?”
일본이 하는데, 왜 우리는 안되느냐는 국민 여론이 들끓었다. 잘못한 거 없는 한국의 육상 선수들이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인터뷰에서 하자, 어째서 너희가 잘못이냐. 잘못은 국가다! 협회다! 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래서 육상을 전문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정부의 자금까지 조달되기 시작했고, 거기에 이슈가 되자 기업들이 끼어들었다.
그렇게 프로육상리그가 만들어졌고, 여러 종목들이 만들어졌다. 준희는 그런 프로리그에 입성하기 위해 죽어라 달렸다.
그렇게 달리면서, 중학교 시절을 거의 다 보냈다.
그렇게 달리면서, 중학교 시절을 거의 다 보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고, 오히려 점점 더 커져 갔다. 중학교 마지막 학년이 된 준희는 눈앞에 다가오는 고등학교 입학을 생각하며, 동시에 정부가 추진 중인 육상 프로리그에 대한 뉴스를 놓치지 않고 챙겨봤다. 어느 날 저녁 뉴스에서는 일본의 금메달 사례를 끊임없이 언급하며, 한국도 제대로 된 체계와 지원만 있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분명히 기회가 열릴 거야.”
준희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더 멀리 뛰고 빠르게 달릴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길에 한 발짝씩 다가서려 애쓰며, 운동화를 꽉 끈으로 묶고 새벽 운동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어느 늦겨울 아침,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 시각에 준희는 강아지 ‘보리’와 함께 동네 뒷산 쪽 산책로를 뛰고 있었다. 주변은 조용했고, 살짝 녹은 눈 위로는 찬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왔다.
“헉, 헉.”
숨을 고르며 언덕을 올라갈 때면, 고된 호흡 속에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보리야, 조금만 더 달리자!”
강아지를 향해 말을 건네면, 보리는 마치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듯이 신나서 앞장서기 시작했다. 남들이 겨울 새벽 추위에 떨며 잠들어 있을 때, 준희의 하루는 이미 달리기로 가득 찼다. 체력이 힘들어지면 그 순간부터가 본격적인 훈련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되새기며, 준희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온몸에 땀을 흘렸다.
중학교에서 진행되는 마지막 체육 시간에, 교사들은 이미 준희가 보통 수준의 학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얘는 달리는 게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체육 선생님은 준희를 보며 늘 궁금해했다. 웬만한 학생들은 100m가 아니라 50m 전력질주만 해도 헉헉대는데, 준희는 그 정도 거리는 가뿐히 치고 나간다. 더군다나 축구나 피구 시간에도 준희가 공을 잡고 뛰면 누구도 따라잡기 힘들어졌다. 덕분에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야, 이번에도 준희한테 태클 못 걸면 진다 같은 말이 농담처럼 나왔다.
“사실 체육 대회 때마다 전교 애들 다 이기니까, 다들 준희만 바라보고 있지 뭐.”
친구들은 종종 이렇게 농담을 했지만, 정작 준희는 자기가 특별하다는 걸 잘 체감하지 못했다. 그저 달리기가 너무 좋았고, 몸이 부서져라 훈련을 해도 다음 날이면 다시 달리고 싶은 마음이 샘솟을 뿐이었다. 어느 날은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준희를 불렀다.
“우리 학교에 이렇게 재능 있는 아이가 있다는 게 자랑스럽구나. 고등학교는 어디로 갈 생각이니? 혹시 육상 특기자로 불러주는 학교가 있다면 알아보는 게 어떻겠니?”
준희는 사실 아직까지 크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저는 일반고에 갈 생각이었는데요, 프로리그가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고, 좀 더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어요.”
준희의 솔직한 말에 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는 육상도 프로 시대가 열리는 만큼 기회가 많아질 게야. 지도 잘 받을 수 있는 환경이면 더 좋을 텐데.”
교장 선생님은 준희에게, 근래 뜨고 있는 육상 명문 고등학교 리스트를 건네주었다.
“이 학교들은 관련 기업이랑도 연계가 잘 되어 있고, 아마도 프로리그 스카우트도 자주 온다고 하더라고.”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달리기를 앞으로 진로로 삼을 수 있다니, 준희는 설레기도 했고 약간 두렵기도 했다. 막연히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을 테니까. 중학교 시절에는 ‘육상 프로 선수’라는 말이 아직은 멀게만 느껴졌지만, 정부가 육상 발전을 위해 본격적으로 예산을 투입하기 시작했다는 뉴스, 그리고 곧 창단될 예정인 여러 기업 팀 소식을 접할 때마다 준희는 ‘조금만 더 달리면 정말 프로로 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차올랐다.
“야, 우리 고등학교 진학하고 나서는 게임 동아리 가입하자!”
“나는 가서 육상부를 찾아봐야지.”
실제로 육상 프로리그는 점차 구체화되고 있었다. 전국 규모의 8개 팀이 창단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고, 이 팀들은 중·고교 및 대학교 선수들을 눈여겨보며 젊은 에이스를 확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선수들에게 연봉이 지급되고, 스폰서십 계약도 가능하다는 얘기에 사람들은 점차 ‘육상도 돈이 되는 스포츠’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언론도 손색없는 실적을 가진 고교 선수들이나, 역대급 신기록을 낸 대학 선수들을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100m에서 13초대를 끊었다 같은 뉴스가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퍼져 나가면,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모두가 대한민국 육상의 미래를 기대하며, 새로운 스타 플레이어의 등장을 기다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준희가 가장 의식했던 건 역시 개인의 ‘기록’이었다. 준희에게는 달릴 때의 순수한 즐거움이 무엇보다 컸지만, 프로 스포츠 세계에서는 결국 기록과 성적이 모든 것을 증명해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은 한창 몸이 성장할 때라서 기록이 계속 줄어들 테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아버지의 말은 늘 현실적이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그래도 어떤 대회에서든 1등 하고 싶다는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준희는 체력뿐 아니라 스피드와 근력 훈련을 더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었고, 이를 위해 유튜브나 인터넷 자료를 뒤져 ‘효율적인 훈련법’을 스스로 연구하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가을 무렵, 교육청 주최로 열리는 소년체육대회 예선에 나가게 된 준희는 100m 예선에서 또 한 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구령이 울린 뒤 스타트 라인에서 튀어나가는 순간, 준희의 폭발적인 스퍼트에 심판들도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결승점에 도달했을 때 전광판에 찍힌 기록은 ‘12초 84’였다. 중학생 여자 선수로서는 꽤 놀라운 수치였다. 물론 세계적 수준과 비교하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주변에서는 프로리그에서 뛰려면 이미 재능은 충분하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장준희 선수, 정말 놀라운 기량이네요! 혹시 프로 진출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당연히 꿈꾸고 있어요.”
기자들이 다가와 마이크를 내밀자, 준희는 잠시 당황했다. 수줍게 웃는 준희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고, 해당 영상이 지역방송사 뉴스에 나가자 준희는 반나절 만에 지역 스포츠계의 화제 인물이 되었다.
“준희야, 네가 달리기를 계속 좋아한다면 아빠도 적극적으로 도울게. 그런데 프로로 간다는 건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해. 학교 생활도 중요하지만, 지금부터는 더 큰 목표를 설정하고 훈련을 해야 한다고.”
“네, 저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고등학교 올라가면 육상부가 잘 갖춰진 데로 가서, 프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해보고 싶어요.”
이미 마음은 거의 굳어진 상태였다. 프로리그와 같은 대형 무대에서, 관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달려나가는 자신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그 시기 정부와 협회는 육상 프로리그의 구체적인 운영 계획을 발표했다. 여러 기업이 팀을 창단하고, 지역 연고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도입해 홈&어웨이 경기 시스템을 시도한다는 소식이었다. 많은 팬들이 축구나 야구처럼 육상에도 팀 응원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목소리를 냈다. 이에 발맞춰 각 팀은 ‘단거리 전문 파트’, ‘장거리 전문 파트’, ‘필드 종목 파트’를 세분화해 선수단을 구성하고, 코칭스태프와 트레이너, 의무팀을 확보하려 애쓰고 있었다.
한 언론사에서는 아직은 실험 단계지만, 스프린트와 중거리, 필드 종목을 효율적으로 조합해 팀 단위 성적을 매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준희는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나도 저 무대에서 유니폼을 입고 달릴꺼야!”
아직은 어린 마음이었지만, 확신에 가까운 기대감이 싹텄다. 그런 와중에 중학교 동창들 몇몇이 준희에게 미리 축하 파티 비슷한 것을 해주었다.
“야, 너 고등학교 진학하면 더 바쁠 거 아냐. 우리랑 놀 시간도 없겠네.”
“에이, 그래도 가끔은 시간 내서 놀러올게. 하지만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해서, 아마 훈련 시간이 많아질 거야.”
사실 중학교 시절에는 아직 훈련 시설이나 전문 코치의 지도가 충분치 않았다. 그냥 학교 운동장이나 공원 산책로를 혼자 맹렬히 달리는 게 전부였고, 때때로 체육 선생님이나 아버지의 도움을 약간씩 받았을 뿐이다. 그래도 그 정도만으로도 이만큼 성장했는데, 만약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코칭을 받으면 도대체 어디까지 기록이 단축될 수 있을까? 준희의 내면에는 낙관적 상상이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이른바 ‘체육 특기자 전형’으로 여러 학교가 준희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도권에 위치한 몇몇 명문 체육고등학교는 기존에 육상 국가대표 선수들을 여럿 배출한 경험이 있었다. 그 학교들은 만약 우리 학교로 진학하면, 프로리그 진출 시 좋은 스카우트 경로도 열어줄 수 있다라며 홍보했다. 또한, 지방에 있는 특정 기업 후원 고등학교는 우리와 함께하면 바로 프로 연계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고등학교부터 기업 소속팀 훈련 시스템에 합류하면 더 빠른 성장도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아버지와 교장 선생님은 신중하게 정보를 모았고, 준희에게도 충분한 선택권을 주었다. 문제는 ‘어떤 환경이 가장 자신에게 맞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준희는 집에서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이리저리 자료를 비교했다.
“음, 유명 코치가 있는 학교, 혹은 고교 육상부가 안정적인 팀 운영을 하는 곳, 아니면 프로 구단과 밀접하게 연계된 곳…”
선택지는 다양했지만, 제각각 장단점이 있었다. 준희는 특히 ‘선배들이 얼마나 자주 전국 대회나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는지, 팀 분위기는 어떤지’ 같은 구체적 사항들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미 몇몇 선배들이 하계 청소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그 발판으로 프로팀에 스카우트된 사례를 보며 ‘저 길을 따라가면 나도 가능성 있겠구나’ 싶었다. 고민 끝에, 준희는 오랜 시간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일단 기록을 더 확실히 단축하고, 체계적 훈련을 받으려면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으로 가는 게 좋겠어.”
수도권에 있는 ‘슈퍼 스포츠 고등학교’로 마음이 기울었다. 여기는 다수의 육상부 코치가 상주하며, 전문 트랙과 웨이트장도 잘 구축되어 있었다. 더불어 프로리그 창단을 준비 중인 한 대기업과 산학 협력이 활발해, 학생들이 일정 성적만 거두면 팀 훈련에 참관하거나, 구단 연습경기에도 특별 초청 선수로 참여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교장 선생님 역시 그 학교면 교육청에서도 좋게 평가하는 곳이니, 졸업 후에 대학 진학이든 프로 진출이든 문이 넓어질 거라며 권유했다. 결국 중학교 졸업을 눈앞에 두고, 준희는 그 학교에 최종 지원서를 넣었다.
원서 접수 후 면접을 보기 전까지, 준희는 마지막으로 중학교 운동장에서 개인 훈련에 몰두했다. 사방이 붉은 트랙이 아닌, 군데군데 파인 아스팔트와 흙바닥이지만, 그래도 오래 뛰던 곳이라 정이 들었다.
“여기서 보리랑 달릴 때가 제일 재미있었지.”
강아지 보리를 떠올리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보리는 집에서 잘 쉬고 있겠지. 고등학교에 가면 훈련이 더 빡세져서 같이 뛰어줄 시간도 줄어드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트랙을 돌다 보면, 이곳에서 흘린 땀방울과 함께 자란 기억들이 모두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중학교 시절은 가볍게 지나갔지만, 그 안에는 준희가 밤낮으로 달려온 수많은 순간이 녹아 있었다.
며칠 후, 슈퍼 스포츠 고등학교 체육 특기자 전형 면접 날이 되었다. 담당 코치와 교사가 면접관으로 앉아 있었다. 준희는 떨리는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장준희 학생, 간단히 자기소개해볼까요?”
코치의 부드러운 말에 준희는 침착하게 지금까지 해온 훈련과 대회 성적을 이야기했다. 면접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준희를 유심히 바라봤다.
“아직 기록이 세계적 수준은 아니지만, 저는 하루하루 발전하고 싶고, 언젠가는 한국의 프로리그와 국제 대회에서도 훌륭한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음, 프로리그를 목표로 한다고 했는데, 만약 이 학교에 온다면 어떤 점을 가장 기대하나요?”
“이 학교의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 그리고 다양한 대회 출전 기회가 기대됩니다. 무엇보다 실전 경험을 많이 쌓고 싶어요. 저는 달리는 걸 정말 좋아하고, 매일 더 빠른 기록을 내고 싶습니다.”
며칠 뒤, 합격 소식이 전해졌다. 슈퍼 스포츠 고등학교에서는 단거리 부문에서 장준희 학생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다. 본교에서 향후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전폭 지원하겠다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준희는 편지를 받아 들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크게 기뻐했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준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시작이야, 진짜 고등학생이 되면 더 열심히 달려야 해.”
“그래도 건강이 우선이니, 부상 없이 꾸준히 운동해야 한다. 알겠지?”
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부상은 절대로 안 돼. 늘 내 몸을 잘 관리해야지.’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부상을 당하면 회복에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수 있으니, 프로의 세계를 꿈꿀수록 더 조심해야 했다.
고등학교 입학식 당일, 준희는 다른 신입생들과 함께 강당에 모여 교장 선생님의 환영사를 들었다. 새하얀 교복을 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이미 알고 지내던 친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타 지역에서 온 운동부 신입생들이었고, 준희보다 더 큰 키에 탄탄한 체격을 가진 선수들도 많았다.
“우와, 나는 아직 멀었네.”
속으로 생각하며 살짝 긴장했지만, 바로 그때 단거리 코치가 말을 걸어왔다.
“준희 맞지? 나중에 따로 보자. 오늘 신입생 OT 끝나면 육상부 훈련장에 한번 들르렴.”
“네, 알겠습니다!”
아무리 낯선 환경이라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달리기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잘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오후가 되자, 육상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다. 2학년 선배와 3학년 선배들이 신입 부원들을 환영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야, 앞으로 고생 좀 할 거다. 프로리그까지 꿈꾼다면 이 정도 훈련은 껌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와라.”
선배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겁을 주었지만, 준희는 내심 기뻤다. ‘이 정도로 나를 몰아붙여 줄 훈련이면 기량이 훨씬 늘겠지.’ 특별히 단거리 담당 코치가 준희에게 주의를 준 건 부상 방지를 위한 웨이트 트레이닝과 보강 운동이었다.
“너처럼 마른 근육형 체질은 속도는 빨리 붙지만, 부상 위험도 꽤 높아. 스트레칭이랑 코어 운동 잘해야 해.”
준희는 그 조언을 귀담아듣고 스스로 훈련 루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S스포츠고등학교의 육상 트랙은 천연 잔디 내지 최신 재질로 만든 육상 레인으로 꾸며져 있었다. 중학교 운동장과는 차원이 다른 시설에, 준희는 마치 프로 선수가 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코치가 호루라기를 불며 각 구역마다 배치된 선수들을 지휘했고, 준희는 100m 구간 반복 스프린트 훈련을 했다.
몇 차례 반복 달리기를 하다 보니 허벅지가 화끈거렸지만, 힘든 만큼 성취감도 컸다. '좋아, 이 맛에 달리지' 땀에 절은 티셔츠가 운동장 바람에 시원하게 식어갔고, 심장이 강하게 뛰며 전신이 살아 있는 듯한 희열이 전해졌다.
운동이 끝난 후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실에 들러 기초 근력 운동을 이어갔다. 아령과 바벨을 사용한 하체 보강 훈련은 물론, 상체 안정화를 위한 운동도 했다.
“여기서 다부진 몸을 만들어야 너만의 스피드가 제대로 완성되는 거야.”
웨이트 트레이너는 기본 자세부터 호흡법까지 꼼꼼히 알려주었다. 준희는 한 번도 이렇게 세세하게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몸이 점차 변화하는 과정을 직접 느끼면서 뿌듯함을 맛보았다.
트레이닝 외에도, 전문 물리치료사와 영양사가 상주한다는 점은 준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는 아직 프로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준다고? 하며 의아해했지만, 곧 학교와 기업 간 협약으로 운영되는 체계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장차 프로리그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은 ‘예비 스타 선수’들을 조기에 발굴하여, 상해 예방과 체력 관리, 식단 조절까지 미리 익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었다.
준희 역시 철저하게 식단을 관리받고, 매일 저녁엔 영양사가 짜 준 식단대로 식사를 하며 기록과 체력의 변화를 일기처럼 기록했다. 가끔은 친구들이 와, 너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물어보면 준희는 난 달리기가 좋으니까. 프로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말하며 웃어 넘겼다.
학교가 열리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준희와 같은 1학년 신입 중 유독 눈에 띄는 몇몇 친구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덩치가 상당히 큰 ‘유서준’이라는 남학생은 투척 종목 유망주로 유명했고, 허들에 뛰어난 ‘강예원’이라는 여학생은 이미 중학교 때 전국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던 인물이었다.
어느 날, 코치는 그들을 불러 모아 너희들은 우리 학교의 핵심 전력이 될 거야. 앞으로 교내 대회뿐 아니라, 전국 규모 대회에도 최대한 많이 출전시킬 계획이니 마음 단단히 먹어라고 했다. 준희는 그 말에 가슴이 뛰었다. ‘전국 대회라니. 거기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프로리그 팀들도 내 기록을 눈여겨보겠지?’ 아직은 조금 이른 상상일지 몰라도, 그 가능성이 곧 현실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실제로 프로리그를 준비 중인 구단 스카우트들은 고교 대회를 수시로 지켜보고, 유망 선수를 데이터베이스화해나가고 있었다. 신생 구단들은 그만큼 강력한 신인 선수를 조기에 영입해 팀 전력을 올리고 싶었고, 이미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춘 기업팀은 지속적 성장을 위해 젊은 선수 풀을 확보해야 했다. 이런 분위기는 고교 육상계 전반에 긴장감과 활기를 동시에 불러왔다. 이제 육상이 단순히 아마추어 스포츠가 아니라, 프로 무대에 서기 위한 관문이 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순탄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종종 언론에서는 투자 대비 흥행 효과가 아직 불확실하다는 비판 기사가 나오기도 했고, 일부 정치권 인사들은 프로리그보다 학교 스포츠 육성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여론은 '야구·축구만큼은 아니어도, 육상도 충분히 매력적인 종목이며, 아시아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출 잠재력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준희는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가슴이 설렜다. ‘나도 노력해서 이 흐름에 보탬이 되고 싶다. 더 많은 사람이 육상을 관심 있게 지켜봐 주면 좋겠어.’
그렇게 고등학교 첫 학기가 지나가며, 준희는 꾸준히 기록을 단축해 나갔다. 처음에는 12초대 후반이었던 100m 기록이 점차 12초 초반, 때때로 11초대 후반도 살짝 엿볼 정도가 되었다. 코치는 준희에게 고등학교 2~3학년 때, 너의 신체가 더 성장하면 11초대 초반도 충분히 노릴 수 있을 거라며 격려했다. 단거리 분야에서 여자 선수가 11초 초반을 찍는 건 국내에서는 손에 꼽힐 만큼 드문 일이었기에, 준희는 그 말을 들으며 매일 조금씩 더, 조금씩 더 자신을 몰아붙였다.
한편, 매일의 훈련이 반복되다 보면 마음이 지칠 때도 있었다. 프로리그 기사가 올라올 때마다 기대감이 커지는데, 현실은 눈앞에 놓인 무수한 스프린트 반복과 웨이트, 그리고 영양 관리였다. 주말에도 친구들과 놀러 나가기보다는 운동장을 찾아 기록 측정을 했다.
“내가 이 길로 가는 게 맞나?”
의문이 잠깐씩 고개를 들 때마다, 준희는 마음속으로 ‘그래, 난 달리기가 좋아. 프로 무대를 누비는 내 미래를 상상하면 힘이 난다’라고 스스로 되새겼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달려준 보리의 모습도 생각했다. 중학교 시절, 새벽에 보리랑 뛰었던 날들이 준희에게는 ‘순수하게 달릴 수 있었던 시절’로 각인돼 있었다.
“지금 노력해서 나중에 그때처럼 마음껏 달리는 즐거움을 느끼자.”
준희는 그렇게 의지를 다지며 서서히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로 한 명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딱 봐도 운동선수 출신처럼 보이는 체격 좋은 인상에, 커다란 가방을 멨는데 그 가방 한쪽에는 육상 용품 브랜드 로고가 크게 박혀 있었다. 교장실에 들른 뒤, 잠시 후 육상부가 훈련 중인 트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코치는 휘슬을 불어 훈련을 멈추게 하고 말을 전했다
“얘들아, 소개할 분이 계셔. 이쪽은 K-스피드팀의 스카우트 과장님이셔. 우리 학교 선수들 훈련을 한번 보러 오셨대.”
K-스피드팀은 수도권 중심으로 창단을 준비 중인 프로리그 팀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고, 꽤 큰 기업에서 전폭적으로 투자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선수들은 순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의욕이 넘치는 표정으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우와, 진짜 프로 스카우트가 직접 오다니!”
준희 역시 가슴이 쿵쾅댔다.
“지금 내 모습을 보고, 혹시 관심을 갖게 되면 어떻게 하지?”
아직 1학년이긴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코치는 스카우트 과장에게 학교 선수들 프로필을 건네고, 2~3학년 중 주목할 만한 선수들을 소개했다. 하지만 과장은 1학년들도 가능하면 다 같이 훈련하는 모습 보고 싶습니다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신인 발굴에 관심이 많아서요. 아직 어리더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미리 파악해두고 싶네요.”
실제로 프로리그가 점차 자리를 잡으면, 팀들은 더 많은 신인 선수를 체계적으로 육성하거나 파트너십으로 묶어서 키울 필요가 있었다. 준희는 부랴부랴 가볍게 몸을 풀며, 자신이 가진 최대치를 보여줄 준비를 했다.
그날 진행된 스프린트 테스트에서, 준희는 100m를 12초 12로 주파했다. 이전 개인 최고 기록(12초 08)보다는 아주 약간 느렸지만, 당일 컨디션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스카우트 과장은 기록표를 들여다보더니 놀라운 눈빛으로 칭찬했다. 준희는 가슴이 뛰면서도 최대한 겸손한 표정을 지었다.
“어, 1학년인데 이 정도면 굉장히 빠른 편이네요. 자세도 좋고, 스타트 반응속도도 괜찮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켜볼게요. 부상 없이 잘 관리해야 해요.”
“이 친구, 체육 특기자 전형으로 들어왔는데, 아직 발전 속도가 무궁무진합니다. 체격도 좀 더 성장할 여지가 있어요.”
훈련이 마무리될 무렵, 스카우트 과장은 프로리그가 갖춰질 미래 구상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했다.
“올해나 내년쯤 본격적으로 시즌을 시작할 예정인데, 스프린트 파트에서 여자 선수들도 대거 필요합니다. 팀 대항전을 하려면 릴레이 종목도 준비해야 하거든요.”
준희는 그 얘기를 듣고 눈이 반짝였다.
“릴레이라면, 나 혼자 달리는 게 아니라 팀원들과 함께 바통을 이어받아 달리는 거잖아? 그러면 더 짜릿할 텐데.”
아직 확정된 건 없지만, 머릿속에서 벌써부터 ‘프로리그 릴레이 경기에서 함께 스타팅 블록에 서는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우와, 정말 대단하겠다. 관중석에서 막 함성을 지르고, TV 중계도 되고…’
짧은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과제도 떠올랐다. ‘기록을 더 줄이고, 릴레이 시에도 최대한 팀에 도움이 될 수 있게 코너링이나 배턴 터치 기술도 연마해야겠어. 아직 할 일이 많아.’
집으로 돌아온 준희는 부모님께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프로 스카우트분이 직접 와서 1학년 훈련도 지켜보셨어요. 제 기록을 보고 나쁘지 않다고 하시더라고요!”
“오, 진짜? 대단한데!”
아버지는 드디어 프로리그가 모습을 갖춰가나 보구나. 너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격려의 말을 남겼고, 어머니는 학교 수업도 놓치지 말고, 운동 후엔 몸 관리 잘 해. 아직 기회는 많으니까 서두르지 말고라며 당부했다.
준희는 그 조언들을 전부 마음에 새기며, 밤늦게까지 영상을 보며 스프린트 자세를 연구했다. 선배들이 국제 대회에서 뛰는 영상을 보고, 세계적인 스타 육상 선수들의 유튜브 훈련 영상도 찾아보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머릿속은 이미 새로운 내일을 향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며칠 뒤, 육상부에 흥미로운 공지 사항이 걸렸다. 다음 달에 열리는 전국 초·중·고 육상 대회에서 고등부도 스카우트 대상이 될 수 있다. 코치진은 대회 준비에 만전을 기하길 바란다라는 체육부 게시판 내용이었다.
준희와 친구들은 서로 우리도 이제 스카우트 레이더망에 들어가는 건가? 라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물론 실제로 그 대회에서 프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건 최상위권 기록을 거두는 극소수일 터였지만, 가능성 자체가 주는 설렘은 컸다. 준희는 ‘아직 1학년이지만 내 기록도 보일 수 있으면 좋겠지? 최소한 이름 정도는 알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소박한 기대와 함께, 다시금 달리기에 모든 것을 쏟았다.
그리고 어느 따스한 봄날 아침, 학교 트랙을 돌다 문득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을 느꼈다.
‘아, 이런 날씨라면 어떤 경기든 잘 뛸 수 있을 것 같아.’
더 빨리, 더 멀리, 더 강하게. 준희는 프로리그가 눈앞에 펼쳐지는 그날을 꿈꾸며, 다시금 스타트 라인에 몸을 숙였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호흡을 고른 뒤, 발에 힘을 주어 튕겨나가는 순간, 그녀의 시야에는 오직 결승선만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