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06
김한비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김한비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한선비
제목: 한강문화대교
-축하한다 선비야.
선비는 문자를 보며, 그동안 자신의 노력이 마침내 성공한 느낌이 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동시에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름이 선비라 국가를 위해 일하는 양반이 되는 거 아니냐는 장난처럼. 정말로 공무원이 될 줄은 몰랐다. 공시 재수생으로 이번에도 실패하면 7급이 아닌, 9급이 되려고 했는데, 다행히 작년에 시험을 잘 치르고 합격했고, 이제 곧 출근이었다.
“진짜 노력했다 한선비.”
선비 스스로도 자신을 다독이는 모습이었다. 현재 자신을 축하해 준다고 말하며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일도 이제는 치칠 정도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한동안 만나지 않았고, 그래서 한꺼번에 미뤄뒀던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까 자신의 체력도 문제라고 느꼈다.
“일 잘하려면. 열심히 해야지.”
그래서 헬스장도 등록하고 운동해서 체력도 길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안녕하세요! 한선비라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선비, 그곳은 공무원이었다. 이제는 꺼져가는 불빛이긴 해도 한 때는 모두가 선망했던 직업군이었다.
“한선비씨?”
비교적 젊은 나이에 속하는 선비였다. 아직 푸릇푸릇한 20대였으니까.
“네!”
“음.”
보통의 선비의 나 잇대라면 7급도 아닌, 9급으로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다. 아니면 9급으로 들어와서 이제 8급을 앞두고 있을 수 있었다.
“잘 부탁해요.”
선비를 보는 시선들이 호기심으로 가득했지만 모두가 조용했다. 선비가 첫 출근을 끝내고 친구들을 만나 이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소식통으로 불렸던 친구가 선비가 모르던 정보를 흘려주었다.
“너 이번에 한강유역담당과으로 갔다고?”
“어. 근데 그게 왜?”
“거기 지금 서울 시장이 엄청 특별히 관리하는 거잖아. 서울혁신국으로 부시장도 없이 서울시장 직속으로 움직이고.”
“어? 정말?”
즉 서울시에서도 특별히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또는 권력층에 가까운 사람들이, 또 꽤나 훌륭한 성과를 보인 인재들이 근무를 하는 곳이었따.
“뭐든 너 인정을 받았거나, 아니면 끄나풀이 크거나. 그런 사람들이 갈걸?”
“어? 나 그런 거 없는데?”
혀를 내밀며 놀라는 선비였다. 이 모습만 보면 그저 영락없는 20대, 대학생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선비는 매우 중요한 업무를 하게 되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되었다.
“어쨌든 선비는 매우 중요한 업무를 하게 되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되었다.”
이 문장을 곱씹으며 선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공무원이 된다는 건, 막연히 안정된 직업을 얻는다는 것쯤으로 생각했는데, 현실은 딴판이었다. 마치 종적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물길에 발을 담근 기분이랄까. 아무리 지도를 펼쳐도 정확히 어디로 흘러가는지,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 강물처럼 느껴졌다.
“누가 보면 7급 붙은 신입 공무원이, 출근 전에 철학이라도 공부하는 줄 알겠네.”
선비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슬쩍 웃어 보였다. 공시에 합격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한다’라는 말은 기본, “넌 빽도 없는데 어쩌다 그 부서로 들어갔냐?”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으니까.
하긴, 사실 자신도 궁금했다. 왜 하필 ‘한강유역담당과’인지. 서울혁신국 소속에, 서울시장 직속 프로젝트라든지, 온갖 루머가 돌아다니긴 했는데, 막상 자신은 아무런 연줄 없이 시험 성적만으로 들어온 게 전부였다.
며칠 뒤, 선비는 본격적으로 한강유역담당과(이하 ‘한유담’)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간은 공문서 정리, 지난 회의록 복사, 잡다한 심부름이 주 업무였다.
한유담 사무실은 서울시청 별관 건물 7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낡은 회색 빛 복도를 지나 사무실에 들어서면, 칙칙한 책상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숙인 채 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한선비라고 합니다!”
“어… 예, 반갑습니다.”
인사할 때마다 돌아오는 반응은 늘 무덤덤했다. 다들 바빠 보였다. 어느 과든 부서든 막내에게 ‘열렬 환영’ 같은 걸 해줄 시간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 선비는 대학 시절 동아리 후배인 김슬아와 카페에서 만났다. 후배가 공무원 시험 정보를 자주 물어왔던 터라, 어떻게 합격했는지 궁금해했을 테다. 슬아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물었다.
“언론에서 말하던 ‘한강문화대교’ 그거, 혹시 네 부서가 추진한다는 그 프로젝트 아냐?”
“글쎄, 아직 정확히 모르는 중… 그런데 한유담이 한강 관련 업무 대부분 맡는다고 들었어. 아마 맞을 수도 있어.”
“우와, 엄청나잖아. 옛날에 기사 보고, 한강에 3층 짜리 다리 세운다고 해서 다들 말도 안 된다고 했는데.”
“나도 신기하긴 해. 근데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몰라. 팀장님이 좀 무섭고.”
슬아가 ‘힘내라’며 어깨를 토닥여줬다. 선비는 괜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나가 그 ‘한강문화대교’라는 데에 기여를 하게 될까?’
그 생각에 밤이 깊도록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출근 2주 차. 사무실 한편에서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받는 이는 바로 박기훈 팀장.
“예, 시장님 측에서요? … 아, 네. 저희 부서 자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곤 무언가를 적더니 전화를 끊었다.
“자, 다들 모이세요.”
박기훈 팀장은 직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사무실 한가운데로 사람들이 모이자, 팀장은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금요일, ‘한강문화대교’ 관련 내부 브리핑이 예정됐다네요. 서울시장님 직속 보좌관들이 와서 자료 검토할 거래요.”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되나? 같은 반응이었다.
선비는 뒤늦게서야 팀장님 말씀에 귀 기울였다. 앞에선 ‘한강문화대교’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오갔지만, 정작 막내인 선비는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인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 기사 몇 개 본 게 전부였다.
‘뭔가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라더니, 내부적으로도 실제로 굴러가고 있었구나.’
박 팀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당장 내일까지 기초 자료 보고서 한꺼번에 재정리해서 올리세요. 작년부터 쌓인 문서가 제법 될 텐데, 슬슬 먼지도 털어내야지.”
그러곤 선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선비 주무관.”
“네!”
“새로 온 지 얼마 안 됐지만, 이쪽 관련 자료 복사나 정리 좀 도와줘요. 지난 회의록도 있고, 초안 보고서도 산더미처럼 있을 텐데.”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선비는 본의 아니게 ‘문화대교’라는 화두와 첫 대면을 하게 됐다.
부서 한켠에는 오래된 문서들을 쌓아둔 작은 방이 있었다. 이른바 ‘서고(書庫)’라 불리는 곳이었다. 책장에는 과거 한강 치수(治水) 사업 보고서부터, 경관 조성 프로젝트, 그리고 최근 몇 년 새 기획안까지 난잡하게 섞여 있었다.
선비는 마스크를 쓰고, 박스들을 하나씩 꺼내 자료를 분류했다.
「한강문화대교 기획안(초안) 1차 – 00건축사무소 제출」
「한강문화대교 시민협의회 의견서」
「수질 환경영향평가 보고서(잠정)」
…
‘우와, 생각보다 방대하네. 작년부터 이미 여러 차례 검토가 진행됐나 봐.’
서류 표지를 훑어보며, 선비는 상상 속에 그 다리를 그려봤다. 용산공원과 국립현충원을 잇는, 위층에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가게가 들어서고, 아래층에는 차가 달리는… 3층 구조라니, 정말 미래도시 같았다.
‘이거 제대로 된다면,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겠는데?’
책장에서 먼지 낀 서류를 꺼내다 보면, 때때로 건축가나 디자이너가 그린 스케치가 나오기도 했다. 다리 상층부에 푸른 숲길을 조성하거나, 길을 따라 카페·문화예술 전시관을 배치하겠다는 등, 하나같이 도전적인 아이디어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다 선비는 엉성하게 클립으로 묶인 문서 하나를 발견했다. 첫 장엔 ‘시민 의견 수렴 결과 요약’이라는 제목이 있었다.
“장마철 수위 상승 시 안전 문제 우려.”
“한강 수질 훼손, 조류 및 어류 생태계 위협.”
“다리 개통 후 관광객 증가로 인한 교통 체증.”
부정적인 의견이 주를 이뤘지만, 간간이 긍정적 목소리도 있었다.
“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성장 가능.”
“상층에 녹지 공원이 생기면 도심의 휴식처가 될 듯.”
선비는 살짝 긴장감이 생겼다.
‘그냥 “최신식 다리” 하나 만드는 게 아니었구나. 이건 환경, 교통, 예산, 주민 반발 등 온갖 문제가 얽혀있는 초대형 사업이잖아…’
무심코 보낸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프린트물 몇 백 장이 한꺼번에 쌓여 있었고, 선비는 그걸 다시 인쇄실로 옮겨 깔끔하게 복사·스캔 작업을 했다.
“한선비 주무관!”
다음 날 아침, 근무 시작하자마자 박기훈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류 뭉치로 가득 찬 책상을 뒤적이던 선비는 덜컥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예, 팀장님.”
“이 복사본들, 누가 이렇게 페이지 순서 뒤죽박죽으로 묶으랬어요? 도저히 순서대로 못 읽겠구만.”
선비가 당황하여 재빨리 확인해보니, 분명 인쇄할 때 분류표대로 잘 구분해놓았는데, 옮기는 과정에서 순서가 엉켰는지 문서가 뒤섞여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옮기는 중에 실수를…”
“오늘 중으로 다시 재정리해서 보고 드려요. 금요일 브리핑에 쓰일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 말을 꾹 참는 듯한 표정의 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기 자리로 갔다. 가까이 있던 선배 정수아 주임이 곁에서 툭툭 팔꿈치를 쳤다.
“괜찮아요. 박 팀장님 원래 완벽주의라, 조금만 엇나가면 화내요.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마무리 지으면 됩니다.”
“네… 제가 좀 더 꼼꼼히 할 걸 그랬어요.”
선비는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첫 단추부터 꼬인 듯한 기분. ‘그래도 이 정도 삐끗은 괜찮겠지.’ 다독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 시작일 뿐이니까.
금요일 아침, 드디어 ‘시장 보좌관 브리핑’ 날이 되었다. 선비는 회의실 옆자리에 작은 임시 테이블을 깔고, 미리 준비한 자료들을 정렬해놓았다. 보좌관들이 들어오면 한 사람씩 건네줄 예정이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아, 고맙습니다.”
보좌관들은 생각보다 연령대가 다양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인물부터,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베테랑 참모까지. 모두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로 노트북을 펼치고,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박기훈 팀장은 차트와 도면을 띄운 슬라이드를 넘기며 발표에 열중했다. 한강문화대교가 어떻게 구상되어 왔는지, 어느 시점에서 예산 추계가 필요한지, 교통 수요 예측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선비는 뒤에서 자료를 간간히 건네주면서, 이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좋네요, 상층부에 ‘문화의 거리’를 조성한다는 아이디어. 시민 참여 이벤트도 염두에 두고 있는 건가요?”
“이 부분이 예산 상 한계가 있을 텐데, 혹시 민자 유치 모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통체증이 이미 심한데, 아래층 차로를 단방향으로 두면 어떨지 검토가 필요합니다.”
조용하면서도 날카로운 질의응답이 오갔다. 박 팀장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했지만, 애써 태연한 태도로 받아치고 있었다.
한창 회의가 뜨거워질 무렵, 선비가 자료를 찾으러 복도로 나갔는데, 우연히 보좌관 두 명이 복도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시장님이 이렇게 강하게 밀어붙이시니 사업 자체는 갈 것 같긴 해.”
“하지만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잖아. 환경단체가 벌써 들고일어났고, 시의회에서도 예산 삭감 얘기가 나오고.”
“그래도 작정하면 밀어붙이는 스타일 아니시나. 아마 중간에 몇 번 큰 갈등은 있겠지만, 결국엔 추진되지 않을까? 이번에 혁신국이 바쁘겠어.”
선비는 괜스레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말 시장님 의지대로 무조건 강행되는 걸까? 그러면 환경단체나 지역 주민 의견은 어떻게 되는 거지?’ 참으로 쉽지 않은 길임을 다시금 실감했다.
금요일 오후, 브리핑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는 윗선끼리 알아서 처리할 문제였다. 선비는 잡다한 뒷정리를 하면서 팀장님 눈치를 보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 부서 메일함에 들어온 새 소식이 분위기를 뒤흔들었다.
“환경단체 ○○연대, 시청 앞 집회 예고! 한강문화대교 건설 반대!”
내용을 보니, 다음 주 토요일에 시청 광장에서 ‘한강 보존과 도시생태계 수호’를 위한 대규모 집회를 연다는 것이다. 슬로건은 “한강이 너네 장난감이냐!”였다. 메일을 확인한 사람들끼리 수군거렸다.
“이건 뭐, 시작부터 가시밭길이네.”
“시장님이 밀어붙인다고 해도, 대중적 반감이 커지면 곤란하지.”
“우린 또 얼마나 야근을 해야 하는 거야.”
박기훈 팀장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고, 옆에 있던 정수아 주임이 조용히 선비를 보며 팔짱을 꼈다.
“그나저나 우리 막내는 생각보다 일이 커서 놀랐겠다.”
“네… 정말 크네요. 그리고 다들 너무 바빠 보여요.”
“열심히 잘 배워둬요. 이게 공무원이라는 거고, 특히 혁신국 업무가 만만치 않다는 거.”
그 말에 선비는 살짝 긴장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프로젝트가 정말로 ‘사람들의 삶과 도시 미래’를 건드리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그날 퇴근길, 선비는 잠시 한강 둔치에 들렀다. 지하철역을 한 정거장 지나치고, 강변 쪽으로 나와봤다. 노을이 강물 위로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어릴 때는 서울에 이렇게 한강이 있는 게 너무 당연했는데, 지금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여기 이 풍경 사이에, 저마다의 이해관계가 서로 뒤엉키고 있구나. 그리고 내가 그 한가운데에 있다니.’
선비는 난간에 기대어 강바람을 맞았다. 머릿속에 스치듯 떠오르는 상상이 있었다.
만약 한강 한복판에 3층 높이의 웅장한 다리가 세워지고, 그 위를 사람들이 거닐며 문화를 즐기고, 차들은 아래층을 지나는 그림이 실제로 펼쳐진다면… 서울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흉물이 될 위험도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막내 주무관이지만, 그래도 틈틈이 여론의 소리를 듣고, 업무에 보탬이 될 만한 자료를 찾고, 한 명이라도 더 설득하는 일인가…’
아직 방향은 막막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면 부딪쳐보자고, 그렇게 작게나마 결심했다.
다음 주 수요일, 부서 임시 회식이 잡혔다. 한유담 구성원들이 워낙 야근이 잦아 평소엔 모이기 어려웠지만, 최근 ‘문화대교’ 건으로 팀장님이 “바쁠수록 한 번 뭉치자”고 한 모양이었다.
회식 장소는 시청 근처의 평범한 고깃집. 저녁 7시에 모여 앉으니, 박 팀장과 정수아 주임 외에도 강이수 주무관, 윤태영 사무관, 그리고 보조인력인 이혜미 등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맥주잔이 돌고, 삼겹살이 지글지글 구워지자 다들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한선비 주무관, 요즘 어때? 할 만해?”
정수아 주임이 물었다.
“솔직히 어렵네요. 다들 너무 바빠 보여서 뭘 여쭤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이, 우린 언제든 환영이지. 대신 팀장님 성격만 조금 조심하면 돼.”
옆에서 강이수 주무관이 장난스럽게 거들었다.
“선비씨, 박 팀장님한테 욕먹어서 놀랐죠? 그래도 뭐, 나중엔 괜찮아질 거예요. 한번 마음 열리면 의외로 잘 챙겨주시니까.”
선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억지 웃음을 지었다. 어느 정도 술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윤태영 사무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처음엔 이 ‘문화대교’란 말 들었을 때, ‘허무맹랑한 계획 아니야?’ 했었어요. 그런데 내부적으로 문서들을 보다 보니, 시장님이 왜 이것에 꽂혔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아요. 지금 서울은 글로벌 도시라는 타이틀이 있지만, 정작 시민들이 강 위에서 ‘문화적인 경험’을 누릴 만한 공간은 부족하거든요.”
박 팀장이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맞아. 문제는, 예산이나 환경 이슈를 어떻게 돌파하느냐지. 한유담이 고생 좀 할 수밖에 없을 거야.”
“우리 막내가 잘해야지. 파이팅 한 번 해봅시다.”
정수아 주임이 선비를 보며 잔을 들어 올렸다. 선비도 잔을 들며 작게 웃었다. 다들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사회 초년생이 뭘 해낼 수 있을까’ 싶다가도, 이들과 함께라면 뭔가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 후로 일주일 정도 지나, 박 팀장이 선비에게 새 업무를 지시했다.
“조만간 시민 의견 수렴 간담회를 열려고 하는데, 작년에 받았던 의견서와 올해 새로 들어온 민원 내용을 전부 취합해보고, 간단한 요약본을 만들어줘요. 2주 내로.”
간단한… 이라고 했지만, 막상 자료를 뒤져보니 양이 어마어마했다. 전자민원, 우편, 전화 문의, 각종 시민단체 제안서까지. 선비는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도 해야지, 뭐.”
점심도 거른 채, 여러 방대한 PDF 파일과 엑셀 시트를 뒤지며 분류 작업을 시작했다. 동료들한테 물어가며, 조금씩 틀을 잡아갔다.
예컨대, 항목별로 교통/환경/예산/주민민원/기타 제안 이렇게 구분을 해서, 각 의견의 취지를 요약하고, 인용할 수 있는 문구는 그대로 추렸다.
“한강은 이미 다리도 많은데, 굳이 또 대형 교량을 지을 필요가 있나요?”
“관광객 몰리면 주변이 쓰레기 천지가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한강문화대교가 생기면 우리 동네가 발전할 것 같아요! 주변 상권도 살아날 듯.”
“내 세금으로 엄한 데에 투자하는 거 아닌지 투명하게 알려주세요.”
하루 이틀 지나자, 이 의견들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선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든 입장을 다 만족시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공사를 밀어붙이면 반발이 엄청날 테고… 결국 ‘설득’과 ‘조정’이 관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그 무렵, 선비가 “잠깐 바람 쐬고 오겠다”며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간 날이 있었다. 용산공원 근처를 걸어보니, 최근 공원 조성 공사가 한창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록 언덕 너머로 탁 트인 풍경이 열렸다.
‘나중에 이 공원이 완전히 조성되고, 문화대교까지 연결된다면… 장관이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길을 가는데, 현장에서 일하는 듯한 사람 몇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다리가 세워지면 용산공원가 현충원이랑 연결한다던데, 정말 괜찮을까?”
“글쎄, 그럼 관광객이 확 몰려올 텐데, 유지 보수도 만만치 않을 거고…”
선비는 그들의 목소리가 묘하게 신경 쓰였지만, 굳이 다가가 이야기를 섞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저 한강 너머를 바라보며, 다시금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뭔가 대단하고 멋진 일이긴 한데, 끝없이 힘들겠지. 그래도, 이렇게 모든 사람이 불안과 기대를 동시에 품고 있는 상태라면, 누군가는 발 벗고 나서서 정리해줘야 하지 않을까?’
퇴근 후, 사무실 불을 끄고 나오며, 선비는 모니터 속에 띄워둔 *한강문화대교 시민 의견 정리 파일’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내일이면 팀장님께 중간 보고를 올려야 한다. 아마 또 이거 빠졌고, 저거 어설프다며 지적받을지 몰랐다.
그래도 괜찮았다. 하나씩 배우면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몫을 조금씩 늘려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파이팅! 한선비!!”
한강문화대교 업무는 이제 막 시동이 걸린 상태다. 갈 길이 멀다. 환경단체 시위와 지역 주민 반발, 예산 문제 등은 서서히 불거질 것이었다. 서울시 내부의 정치적 갈등, 시장실의 의지, 그리고 건설사나 투자사들의 이해관계까지 얽혀, 앞으로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워야 할지도 모르는 내일들이었다.
하지만 선비는, 어쩐지 이 여정이 힘들어도 후회하진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느 날, 언젠가 이 다리가 완공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상층의 공원과 문화를 즐기고, 중간·하층의 차들이 한강을 건너게 되면, 그 땐 아, 나도 저기 조금이나마 손을 얹었지 하고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작은 걸음마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강이 흐르는 한, 도시의 꿈도 계속 흐른게 될 것이었다.
이제 겨우 물길에 닻을 내린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