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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408

by 라한
희수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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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수희진

제목: 우리들의 수학


“이제 그만 하겠습니다.”


희진의 말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거의 다 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데뷔조에 마지막 인원이 희진이 될 거란 말이 돌았지만, 끝내 희진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희진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희진아. 정말 여기서 끝낼 꺼야?


희진은 자신을 설교하러 온 매니저를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정말 그러면 이번 데뷔조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됐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단순히 실력에서 밀린 게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상황으로 밀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희진이 초등학생때부터 아이돌을 준비했으면서 자신의 연습생 후배들이 다 데뷔하고 인기를 끌어갈 때 TV 속 화면으로 그들을 지켜봐야만 했던 희진이었다.


실력이 그들 보다 못한가? 아니, 이제 현역으로 데뷔한 친구들도 희진에게 다가와 노래면 노래, 안무면 안부, 여러가지 의견을 묻고 배워갈 정도였다.


외모가 밀리지도 않았다. 다만 싹싹한 성격이 아니라, 늘 매니저에게도 대표에게도 대들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까. 의리를 지킨다는 이유 하나로 다른 소속사의 스카우트 제의도 거절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


“대표님! 무슨 말이라도!”

“가, 간다잖아. 뭐 어쩌라고.”


저런 대표 밑에서 데뷔해봤자 뭐 남는 게 있겠냐 싶었다. 어렸을 땐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줬으니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대표가 정말 짜증났다.


가족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고추가라 팍팍 뿌린 얼음컴을 얼굴에 들이 붙고 다른 소속사로 이전할 것이었다.


“아니, 조카 하나 길들이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요?”

“쟤는 안 돼!”

“삼촌 밑에서 배운 건 하나 없네요 뭐!”


어차피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희진도 할말 못 할말 다하고 나왔다.


“저, 저게 진짜! 너 내가 누나한테 말해놔서 용돈 다 끊어 놓을꺼야!”


이렇게 대판싸우고 화해하기를 여러 번이지만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었다. 자기 조카라면 남들보다 더 밀어줘야지, 오히려 조카니까 더 잘 해주면 안된다고 –(마이너스) 점수를 주는 게 말이 되냐! 그렇다고 삼촌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소속사에서 데뷔하면 엄마가 슬퍼할거라 그냥 아이돌을 그만두기로 했다.


좀 더 늦게 그만두면 수능 공부도 못해버리니까. 이쯤이 마지노선이었다.


“흥이다. 내가 잘 먹고 잘 살아라”


삼촌이 잘 먹고 잘 살면 가족적으로 좋은 거기에 나쁜 건 없었다. 어쨌든 소속사 대표인 걸 빼면 꽤나 좋은 삼촌이었다. 삼촌이 마지막으로 준 용돈만 500만원이었다. 늘 미안하다는 말과, 자기가 대표지만, 다른 소속사 그룹원들 눈치를 많이 본다고. 아무리 그래도 희진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속사를 나와, 학교로 돌아갔다.


“오랜만이네.”


사실상 처음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학교를 하루 종일 있는 건, 꽤나 어색한 일이었다.


“음.”


학교를 돌아보며, 자신이 꽤나 좋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 중학교 때 공부를 엄청했었구나.”


당시 엄마와 아빠가 아이돌 준비를 그만했으면 하는 바람을 보인적이 있었다. 그때 삼촌과 합심하여 좋은 성적을 받아 명문고에 진학하면 계속 도전하게 해준다는 약속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삼촌은 자기네 회사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 다 붙여줬었다.


희진은 그렇게 그렇게 공부 좀 한다는 애들만 입학가능한 명문고에 진학을 하게 됐었다.


“음, 재밌는 게 뭐 있나.”


매일 미래만 보던 희진은 갑자기 정체된 느낌이 들어서 뭔가 따로 할만한 게 없나 찾아보았다. 그때 학생회 선거에 관한 공고가 보였다.

희진은 한참 동안 그 게시물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적힌 학생회장 후보 등록 안내와 일정, ‘학교 발전을 위한 창의적 공약 환영’이라는 단서. 평소 같으면 무심코 지나쳤겠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그냥 넘어가기 싫었다. 도무지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던 차에 학생회라는 무대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아이돌은 관뒀고… 뭔가 나를 다시 불타오르게 할 일 없을까?’


그 순간, 복도 모퉁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희진의 시선을 붙잡았다. 교복을 차려입은 채 여러 서류를 들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소년. 그는 과대표인지, 아니면 학생회 임원인지 짐작도 안 갔지만, 눈빛이 꽤나 열정적으로 빛났다. 희진은 괜스레 궁금해졌다.


‘저런 애들이 학생회를 꾸려가고 있는 걸까?’


곧이어 학교 방송 스피커에서 학생회장 선거에 관한 안내가 흘러나왔다. 후보 등록 마감은 3일 후! 라는 문구가 귀에 쏙 들어왔다. 아이돌 연습생으로 지내면서, ‘마감’과 ‘마지막 기회’라는 단어에 유난히 예민해진 희진은 이번에도 그 말에 솔깃했다. 지금 놓치면 1년을 그냥 흘려보내야 할 텐데, 벌써 고등학교 2학년. 게다가 요즘 엄마가 수능 얘기를 꺼내며 은근히 잔소리를 늘어놓는 시기라, 마음이 더 복잡했다.


‘그래, 나도 좀 뛰어볼까. 아이돌 서바이벌 때처럼?’


그렇게 마음먹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반 친구들 몇 명이 이미 자신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희진은 눈치를 주기보단 담백하게 책상에 앉았다. 한 소녀가 용기를 내 다가왔다. 뺨에 주근깨가 싱그럽게 자리 잡은 아이였다. 소녀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아이돌 연습생이었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만둔 거야?”

“어… 여러 사정이 있었어. 이제 아무것도 안 해?”


그 질문에 희진은 빙그레 웃었다.


“뭘 아무것도 안 해. 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잖아. 학생회 같은 거, 꼭 해보고 싶기도 하고.”


그 말에 아이는 호들갑을 떨며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이내 교실 안이 웅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명문고’에서 한 번도 함께 지내지 않던 전직 연습생이, 갑자기 학생회장 선거라니. 잘 모르면서도 왠지 재밌어 보인다고 생각하는지, 반응이 아주 뜨거웠다.


그러나 모든 반응이 긍정적인 건 아니었다. 뒤쪽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학생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리 그래도 명문고가 만만한가.’ 그런 표정이었다. 희진은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사실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주변 시선에 흔들리고 싶진 않았다.


그날 6교시가 끝나자마자 희진은 학생회실이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학교 2층 복도 끝에 ‘학생 자치회’라고 쓰인 문패가 붙어 있었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내부는 활기가 가득했다. 책상마다 서류와 노트북이 즐비했고, 군데군데 붙은 포스트잇에는 온갖 일정과 공약 아이디어가 적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서 학생회장 후보 등록 받나요?”


희진이 조심스럽게 묻자, 안쪽에서 바쁜 듯 서류를 정리하던 3학년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갈색 머리를 단정히 묶은, 깔끔한 인상의 여학생이었다. 명찰에는 ‘정민아(3학년)’라고 쓰여 있었다.


“반가워, 2학년인가 보네? 이번 선거에 관심이 있는 거야?”

“네, 일단 후보 등록을 해보고 싶어요.”


민아는 흠칫 놀란 듯 희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한 장짜리 서류를 조용히 건네주었다.


“이걸 작성해서 내일까지 나한테 직접 제출해. 서명도 받는 칸이 있으니까 담임선생님 사인도 챙기고.”

“네, 알겠습니다.”


희진은 다시 한 번 내부를 둘러봤다. 누군가는 열심히 전화 통화를 하고, 누군가는 급식 개선 서명부에 뭔가 적고 있었다. 모두가 ‘공부 말고도 할 일이 이렇게나 많다’는 듯 분주해 보였다.


“그런데 혹시, 지금 학생회장 권한을 임시로 행사하는 사람은 누구예요? 올해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응, 원래 작년 부회장이 올해 학생회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다들 생각하고 있어. 정진우라고 같은 2학년인데, 옛날부터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들 신뢰도 높거든.”


민아는 복사기를 돌리다 말고 희진을 바라보았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다.


“근데… 넌 아이돌 연습생이었다고 들었어. 이 학교에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흔적은 없는데, 갑자기 학생회장 출마라니. 솔직히 어떤 공약 준비했는지 궁금하긴 하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희진은 살짝 난감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사실 아직 공약이라고 할 만한 건 준비 중이에요. 그냥, 우리 학교가 축제나 수학여행을 너무 형식적으로만 치른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나도 초등학교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했으니까, 너무 ‘무대에 서고 싶다’고만 생각하다 보니 정작 학교생활은 제대로 못 즐겼었고…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재밌는 추억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민아는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니, 뭔가 설레네. 명문고라서 늘 진학 실적이나 교칙만 강조하는 분위기가 지겹기도 하거든. 그래, 후보 등록서 잘 써서 제출해봐. 인준되면 우리가 선거 과정에 대해 안내해줄게.”


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학생회실을 나왔다. 마음이 조금 들뜬 상태였다. 그와 동시에, 현실적인 고민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진짜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까? 상대가 저렇게 탄탄한 애라면?’ 게다가, 교장이나 학부모회가 가만히 둘 리도 없을 것 같았다.


복도를 돌아나오자, 우연히 교무실 쪽에서 걸어나오는 담임선생님과 마주쳤다. 중년의 여성으로, 인상이 엄격해 보였지만 희진에 대해서만큼은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어, 희진아. 선생님 찾으러 온 거야?”

“아뇨, 그냥 선생님 사인 좀 받으려고요. 학생회장 후보 등록서요.”


담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러나 이내 ‘넌 참 엉뚱하구나’ 하는 표정으로, 서류를 받아 읽어보았다. 그리고 사인 칸에 빠르게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네가 하고 싶다면, 응원해줄게. 다만 공부도 게을리하면 안 된다. 마음은 편해졌을지 몰라도, 고등학교 생활이 그리 만만치는 않잖아.”

“네, 알겠어요.”


희진은 서류를 소중히 접어 교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선생님은 떠나가며 한 가지 조언을 덧붙였다.


“희진아, 너 참 재능 많잖아. 그 재능이 꼭 연예 활동에만 쓰이는 게 아니야. 학교에서도 네가 빛날 수 있을 거야.”


그 말이 마치 불을 지피듯, 희진의 의지를 더 북돋웠다. 가슴 한구석이 조금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튿날 아침, 희진은 1교시가 시작되기 전부터 학생회실로 직행했다. 모르는 임원들이 몇 있었지만, 대체로 전날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민아는 이미 나와서 컴퓨터를 켜고, 뭔가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인 받아왔어요.”


희진이 서류를 내밀자, 민아가 꼼꼼히 확인한 뒤 서류함에 넣었다. 그러더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또 다른 양식을 건넸다.


“이건 기본 공약 작성서야. 일단 후보 등록은 됐고, 이제 곧 있을 공약 발표 행사에서 네가 말할 내용을 적어두면 돼. 자세한 건 학생회 임시회의 때 알려줄 테니, 오늘 오후에 시간 괜찮니?”


희진은 조금 당황했다. 공약 발표라니,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피할 순 없었다.


“네, 괜찮아요. 오늘 방과 후에 여기로 오면 되죠?”

“응, 4시쯤. 정진우 후보도 올 거야. 아마 한자리에 모여서 공약 초안을 공유하고, 발표 순서를 정할 것 같아.”


그 이름이 다시 나오자, 희진은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어떤 애일까. 공부만 잘하는 건가, 아니면 이 학교 분위기에 정말 뼛속까지 적응한 모범생일까?’


그러나 정진우를 직접 볼 기회는 곧 찾아왔다. 희진이 교실로 돌아가기 직전, 문틈으로 들어오는 한 남학생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키가 꽤 크고, 깔끔한 교복매무새에 반듯한 자세. 명찰에는 ‘2학년 정진우’라고 쓰여 있었다. 밝은 조명을 등지고 들어선 탓인지, 윤곽이 선명해 보였다.


민아가 그쪽으로 다가가 무언가 말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정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넘겨주고, 곧 민아와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희진은 괜스레 쭈뼛거리다가, 슬며시 발걸음을 돌려 교실로 향했다. 괜히 시선이 마주치는 것도 민망했다.


수업이 끝나고, 약속한 4시가 되자 희진은 다시 학생회실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몇 명의 2학년 임원들과 정진우가 자리해 있었다. 바깥 창문으로 오후의 햇빛이 환하게 쏟아져, 실내가 밝았다.


“안녕하세요. 저 후보 등록한 수희진이에요.”


정진우가 희진을 본 순간, 잠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어쩐지 아는 이름이라도 들은 것처럼. 하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맞았다.


“아, 어제 민아 선배에게 얘기 들었어. 반가워, 나도 2학년 정진우야. 작년부터 학생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고, 이번에 회장에 나가볼까 해서.”


희진은 순간, ‘역시 젠틀하네’ 하는 느낌을 받았다. 표정이나 태도에 거슬리는 구석이 없었다. 말투 역시 부드러웠다.


“나는… 그… 여기 선거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라서. 사실 좀 알려고요.”


진우가 주변 임원들에게 눈짓을 보냈고, 모두가 각자 가지고 온 서류를 펼쳤다. 작년 학생회장 선거 진행 방식에 관한 매뉴얼, 올해 달라진 규정, 그리고 공약 발표의 순서가 간략히 정리된 자료 등이었다. 희진은 그것들을 받아들고 빠르게 훑어봤다.


‘후보자 간 토론이 있고, 서면 공약 제출 후에 전체 학생 대상 공개 발표… 이후 일주일간 홍보… 그리고 투표…’


머릿속에서 순서가 대충 그려졌다. 아이돌 서바이벌과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결국 누가 더 학생들의 마음을 얻느냐’의 문제니까. 민아가 중앙에 서서 간단히 회의를 주도했다.


“올해 후보가 2학년 두 명뿐이네. 정진우, 그리고 수희진. 나머지는 1학년이나 3학년 한두 명이 있었지만, 3학년은 곧 입시가 심각하고 1학년은 경험이 부족하니 현실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을 거야. 아마 메인 승부는 너희 둘이 치르게 될 것 같아.”


희진은 그 얘기를 듣고 순간 긴장했다. 사실상 희진도 1학년 만큼이나 경험이 없었다. 어쩌면 더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정진우와 양자 대결 구도라니, 듣기만 해도 상당히 빡빡해 보였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이상, 물러날 길은 없다. 자신만의 색다른 전략으로 승부해야겠다는 결심이 더 굳어졌다. 정진우가 먼저 나서서 올해 준비한 공약 일부를 간단히 설명했다.


“사실 학교 측에서 성적 관리와 진학 지도를 위해 예산을 집중 투자하는 상황이라, 축제나 수학여행 같은 행사가 크게 위축된 건 맞아요. 그래서 제 공약은, 기존에 있던 한정된 틀 안에서도 학생 만족도를 최대한 올리는 거예요. 무리하게 많은 걸 요구하기보단, 조금씩 개선하는 방향이랄까.”


정진우는 깔끔한 언어로 논리를 전개했다. 예산의 현실적 한계, 학부모의 요구, 교장의 입장 등을 고려해, 최적해를 찾자는 느낌이었다. 희진은 그의 발표를 들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답답함이 올라왔다.


'아, 이렇게 안전하게만 가면, 결국 또 무난한 결과가 되잖아. 난 더 큰 변화를 원하는데.'


민아가 시선을 희진에게 돌렸다.


“자, 그러면 희진도 공약이나 생각해둔 아이디어 있으면 말해봐.”


희진은 배낭에서 노트를 꺼냈다. 전날 밤에 혼자 끄적이며 정리한 내용이었다. 마치 가수 오디션 대본을 준비하듯, 대사까지 대략적으로 준비해놨다.


“저는요, 우선 축제를 학생회 주도로 기획하되, 외부 협찬이나 후원을 적극적으로 받아볼 생각이에요. 공연이나 이벤트 쪽은 제가 연습생 시절 조금 아는 게 있어서. 또 수학여행도, 단순 박물관 견학 위주 대신, 학생들이 직접 짠 코스로 조금은 자유로운 시간을 보장해주고 싶어요.”


정진우를 비롯한 사람들 일부가 눈을 깜빡이며 희진을 바라봤다. 외부 협찬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임원 중 한 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 학교는 워낙 보수적이라… 외부 스폰서 유치 같은 건 단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어요. 학부모들이 ‘이 학교가 혹시 상업적 의도로 행사를 치르느냐’고 오해할 수도 있고…”

“그 부분은 홍보 방법에 달려 있죠. 학부모들이나 학교가 부담 느낄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고, 예산 절감을 하면서 행사 질을 높이는 협찬만 받으면 될 거예요. 꼭 대형 기업이 아니라 지역 사회나 문화 단체와의 협업도 가능하잖아요.”


정진우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어느새 눈동자가 깊어진 듯했다. 희진의 말이 황당한 건지, 아니면 새로운 발상이라 신선하게 들리는 건지, 정진우 자신도 헷갈려 하는 기색이었다. 민아가 그 분위기를 전환하듯 손뼉을 쳤다.


“좋아, 의견이 활발해서 보기 좋네. 어쨌든 오늘은 대략적인 방향만 공유한 거고, 세부 내용은 다음 임시회의에서 좀 더 논의해 보자. 그때까지 후보들은 공약 발표 준비를 하도록.”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를 뜨려 하자, 진우가 희진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얌전한 태도로, 묘한 호기심을 담은 표정이었다.


“수희진… 맞지? 전에 아이돌 연습생이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야?”

“응, 초등학생 때부터 했으니까. 이제 막 그만뒀어.”

“아… 그럼 시간이 꽤 됐겠네. 음, 갑자기 그만두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 혹시 여기 학생회에선 뭘 찾고 싶은 거야?”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그냥 ‘재미 삼아’ 같은 답은 안 통할 듯했다. 희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이돌 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제대로 못 할 때가 많았어. 근데 학교도 사실 비슷한 분위기더라. 뭔가 굳어 있어서, 학생들끼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고. 그래서 이왕 남은 고등학교 생활 동안, 최소한 내 힘으로 뭔가를 바꿔보고 싶어.”


정진우는 살짝 미소 지었다. 조금 전보다 온도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좋은 생각이네. 난 그동안 학교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려고만 해왔지만, 이렇게 외부 협찬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들으니까 좀 신선해. 솔직히 말해, 나한테는 없는 시각이기도 하고.”


그 말에 희진도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아. 보수적인 환경을 설득하는 건 사실 잘 모르겠거든. 공연 하나 기획하려 해도, 밖에서야 내 생각대로 하면 되는데… 학교 안에선 그런 게 힘들잖아.”


두 사람은 그렇게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복도에 나서니 어느새 방과 후 자율학습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운동장 한쪽엔 체육부원들이 축구공을 몰고 뛰어다녔고, 교실 창문마다 공부하는 학생들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참, 다들 바쁘게 산다. 나도 이제 열심히 달려봐야겠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희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평소에는 검색할 일이 많지 않았지만, 이제는 행정 지원이나 협찬, 그리고 다른 학교 사례 등을 살펴봐야 했다.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엔 삼촌에게서 온 메시지가 한 통 보였다. 곧 연락 좀 줘라. 용돈과 함께 보내오던 당부가 떠올랐지만, 지금 당장은 마음이 가지 않았다.


‘미안, 삼촌. 나 지금은 훨씬 중요한 일을 찾아버렸어.’


머릿속에서 아이돌 기획사 연습실에 갇혀 지내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때는 춤과 노래가 전부였지만, 사실 무대 뒤편은 온갖 정치와 꼼수로 가득했다. 그래도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고, 그 결과를 인정받을 줄 알았지만… 결국 ‘실력 외의 것’에 가로막혀 끝나버렸다.


이제는 이 학교라는 무대에서, 아이돌이 아닌 ‘학생회장 후보’로서 새로운 춤을 추려 한다. 열정과 재능은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있다. 단지 방향이 달라졌을 뿐. 그 사실만으로도, 희진의 가슴은 다시 설레었다.


노트북을 두드리는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명문고 축제 협찬’, ‘고교 수학여행 혁신 사례’, ‘학생회 공약 성공 사례’… 검색어를 이것저것 입력해 가며 아이디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씩 살펴볼 때마다, 희진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분명 할 수 있어. 제대로 준비만 하면, 교장 선생님이든 학부모회든 설득할 수 있을 거야.’


밖에서는 엄마가 저녁 먹어라하고 부르지만, 희진은 미루고 싶었다. 약간의 배고픔보다, 이 순간이 더 소중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열정이었다. 아이돌 연습실에서 느끼던 그 ‘간절함’과는 다른, 좀 더 건강하고 긍정적인 느낌. 수학여행과 축제를 향한 머릿속 이미지가 빠른 속도로 구체화되어 갔다.


의심도 들지만, 설렘이 훨씬 더 컸다. 희진은 손을 턱에 괴고, PC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미 이 길 위를 두 발로 당당히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막연했던 ‘학교 생활’이 이제는 ‘내가 직접 만드는 무대’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희진은 그 무대 위에서, 아이돌의 안무가 아니라, 학생회를 위한 한 편의 대본을 써 내려갈 준비가 되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용기를 내 보자.’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시계 소리가 희미해질 무렵, 희진은 한 장의 문서 제목을 바꿔 달았다.


‘수학여행 & 축제 혁신 프로젝트: 수희진 공약 기획안.’


번뜩이는 인사이트를 또 메모하고, 한껏 부푼 마음으로 노트북을 덮었다. 설렘과 긴장감이 뒤섞여, 잠이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일이 기다려졌고, 내일 이후가 더더욱 궁금했다.


이제부터, 희진의 고등학교는 완전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변화의 주도권을 지고 있는 건, 바로 희진 자신이다. “이제 그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던 아이돌 시절이 끝났다면, “이제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외칠 차례가 아닌가. 희진은 눈을 감으며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래,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희진은 그동안의 경험을 되살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버거운 마음이 들면서도 설렘이 더 크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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