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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410

by 라한
채원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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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채선이

제목: 불꽃의 무게


“같은 불꽃인데, 색이 다를 뿐인데.”


분명히 같은 마음으로 촛불을 켠 것일테지만 다른 장소에서 말하고 있었다.


“저것들이랑은 상종을 못해!”


같은 찬성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또 생각이 달랐다. 촛불과 다른 태극부대라고 불리는 반대파에서도 열렬하게 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도 크게는 하나처럼 보였어도 역시나 달랐다. 그렇게 크게 찬성과 반대, 그리고 그 안에서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선이는 가만히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불꽃 하나라도 버겁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손안에서 흔들리는 빛을 붙들고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던 날들이. 하지만 어느새 주변을 둘러보니 불꽃은 이미 셀 수 없이 많았다. 다만 그 불빛들 사이에는 겹겹의 간극이 있었다. 어느 쪽은 격렬한 언사를 내뱉고, 또 어느 쪽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저들과는 도무지 섞일 수 없다 소리치며 등 돌리는 형국이었다.


선이는 그날 밤, 도심 한가운데서 수십 갈래로 나뉘어 울려 퍼지는 함성을 들었다. 찬성과 반대라는 두 갈래로 나뉜 듯 보였지만, 조금만 다가가면 다들 자기들만의 굳은 신념을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찬성파 안에서조차 세부적인 입장이 맞지 않아 서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시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가던 그 골목, 채선이는 문득 마음 한편이 묵직해져 오는 걸 느꼈다.


‘이렇게 모래알처럼 흩어져선, 결국 많은 불빛이 켜져 있어도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 어렵지 않을까?’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 보면, 삼삼오오 진지한 대화를 나누거나 열변을 토하는 이들이 있었다. 등 뒤로는 각양각색의 피켓들. 그중에는 흰 종이에 검은 매직으로 동참이라고만 적은 간소한 것도 있었고, 또 색색의 포스터를 인쇄해온 단체들도 있었다. 서로 언쟁을 벌이거나, 교묘히 차단막을 치듯 다른 이들을 밀어내려는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채선이는 계속해서 생각에 잠겼다.


‘똑같이 불을 켰는데…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을까?’


조금 더 깊게 고민해야 했다. 간단히 우리 목적이 같으니 같이 하자라고 외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이미 저마다의 경험과 상처, 그리고 지켜야 할 원칙이 있었다. 그래서 선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직접 발로 뛰어 보자고 결심했다.


그날 이후, 채선이는 낮에는 몇몇 지인들을 만나 의견을 묻고, 밤에는 다양한 소규모 집회 현장을 직접 찾아다녔다. 어떤 날은 몸이 두세 배로 무거워진 채 퇴근길에 무작정 광장으로 향했다. 평소 안면이 있던 사람들에게 오늘 어디 모인다고 들었는데, 나도 가 봐도 돼? 하고 묻는 식이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분위기는 제각각이었다. 같은 찬성파라고 해도, 어떤 곳은 노래와 퍼포먼스로 즐겁게 공감대를 넓혀가자는 쪽이었고, 다른 쪽은 엄숙한 결의대회 형태로 이 문제를 반드시 관철시켜야 한다며 결의를 다지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귀퉁이에서는 정부를 향해 당장 책임을 묻지 않으면 모든 걸 뒤집어엎겠다는 식으로 강경 노선을 내세우고 있었다.


“선이야, 너도 알잖아. 여기랑 저기랑은 노선 차이가 너무 커. 섣불리 하나가 되자고 주장하면 오히려 역효과 날 수도 있어.”


선이와 함께 여러 시위 현장을 둘러보던 동료, 지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후는 학생 시절부터 채선이와 함께 길거리에 나서본 경험이 있는 친구로, 서로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다.


“알지.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우리도 원하는 걸 제대로 이뤄내기 어렵잖아. 분명 머릿속으로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대화가 안 되는 것처럼 보여.”

“누구도 쉽게 양보 못 하는 지점이 있을 거야. 서 있는 출발선이 달라서.”


지후의 말에 채선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자기 위치와 상황에 따라 요구하는 바가 미묘하게 달랐다. 설령 큰 틀에선 목표가 같더라도, 표현 방식이나 정치·사회적 관점, 나아가 전략의 온도 차가 생기면 협력이 아닌 반목으로 치닫기 쉬웠다.


그러다 어느 날, 선이는 규모가 비교적 작지만, 분위기가 유난히 화기애애해 보이는 모임 하나를 발견했다. 작은 공원 한편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마이크가 따로 없어도, 각자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입장을 표하는 식이었다. 누군가 연단처럼 꾸민 구역에 서면, 나머지는 차분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방식이라면, 혹시 더 크게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선이는 은근한 기대를 안고 그 틈에 살짝 다가갔다. 낯선 사람들 앞이어서 망설였지만, 곧장 한 여성이 눈을 맞추며 손짓했다.


“처음 오신 분인가 봐요? 여기 빈자리 있어요. 따뜻한 차도 드실래요?”


낯선 따스함에 채선이는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려놓고, 준비해온 차를 건네받았다. 종이컵 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자, 채선이는 그 온기부터 반가웠다.


그 모임은 겉으로 보면 단지 ‘촛불을 같이 들고 모인 사람들’이었지만, 그 안엔 다양한 분야의 목소리가 얽혀 있었다. 직장인, 프리랜서 디자이너, 환경운동가, 그리고 사회복지사 등… 각자 일상 속에 품고 있던 문제들을 조금씩 꺼내놓았다. 그리고 지금 왜 거리로 나왔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솔직히 저, 다른 집회도 가봤는데, 거기는 너무 정해진 구호만 외치라고 해서 좀 불편했어요.”

“다들 치열해 보이긴 했는데,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우리의 외침만 정답’이라는 식이라서…”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솔직하게 느낀 점을 말하며 공감했다. 분위기는 엄숙하기보다, 오히려 동아리 모임 같은 자유로운 기류가 흘렀다.


이 자리를 발견한 채선이는 호기심이 솟았다. 어떻게 이런 편안함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혹시 여기서부터 하나의 ‘매개체’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모임이 끝날 즈음, 선이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여러분은 생각이 달라 보이는 사람들과도 대화해볼 의향이 있으신가요? 노선이 다르다거나, 구호가 좀 달라도, 그래도 한 번쯤 같이 모여볼 수 있을까요?”


몇몇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순간 공기가 잠시 정적을 머금었다.

바로 그때, 젊은 남자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답했다.


“사실 우리도 같은 고민이 있어요. 이렇게 소규모로 모이는 건 좋지만, 정작 좀 더 큰 움직임으로 이어져야 현실적으로 목소리가 힘을 얻잖아요. 처음엔 우린 그냥 이렇게만 모이면 된다고 했는데… 요즘 들어 다른 사람들과도 손잡고 싶다는 얘기가 슬슬 나오고 있어요.”


그 말에 주위 사람들도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시끄러운 곳은 싫다며 피했고, 다른 이는 저 사람들과 섞이면 우리가 원하는 메시지가 희석될지 모른다고 우려했지만, 한편으론 조금씩이라도 다가가야 우리가 이 큰 흐름 속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채선이는 그 순간 마음속에서 희미한 불씨가 살짝 타올랐음을 느꼈다.


며칠 뒤, 선이는 이 모임의 사람들과 다시 접촉해 연결의 장을 마련해보자고 제안했다. 서로 구호가 다르고, 방식을 달리하는 그룹이더라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적어도 한 번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취지였다.


실제로 먼저 설득해야 할 다른 집단이 있었다. 보통은 스피커와 큰 현수막, 구호 소리로 광장을 가득 채우는 이들이었다. 몇몇은 우리가 왜 거길 가야 하느냐며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소통하고 있어요. 굳이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랑 뒤섞일 필요가 있나요?”


선이는 거기서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 더 성실하게 취지를 설명했다.


“다들 알고 있지만, 결국 우리 목표는 비슷한 방향성을 가져요. 말투나 표현이 달라도, 서로 적으로 돌릴 이유는 없잖아요. 적어도 한 번쯤 실제로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선이는 돌아오는 시큰둥한 반응에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혹시 몰라요. 직접 얘기해보면, 오히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작은 지점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요.”


맑은 날이었지만, 차가운 겨울바람이 파고드는 광장이었다.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 사이를 얼음장 같은 바람이 지나갔지만, 채선이는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땀이 났다. 긴장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지후가 옆에서 조금씩 해보자며 응원해주는 눈빛을 보내줬다.


그리고 한 주 후, 선이는 여러 사람의 연이은 만남을 주선했다. 광장 한쪽, 모임을 위해 따로 셋팅한 작은 천막 두 동이 나란히 세워졌다. 한쪽 천막엔 ‘차분한 토론의 장’이라는 제목의 커다란 손글씨 현수막이 걸렸다. 한쪽엔 따뜻한 음료와 담요가 비치되어 있었다.


약속된 날 저녁, 선이는 설레는 마음과 불안함을 동시에 안고 준비한 의자들을 점검했다.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표정이 저마다 다르게 굳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그룹을 만나려니 경계심도 커 보였다. 가끔은 거친 얼굴로 서 있는 사람도 있었고, 서로 눈이 마주치면 아예 시선을 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웬만하면 서로 귀를 기울여 주시면 좋겠어요. 누구의 말이 틀렸다 옳았다 판단하기보다는, 일단 ‘왜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들어보는 자리로 생각해주세요.”


선이는 최대한 부드럽게 안내를 했다. 모인 이들 중 일부는 우린 이미 할 만큼 말했는데? 같은 눈빛을 보냈고, 또다른 이들은 ‘뭐, 들어나 볼까’ 하는 태도로 의자에 앉았다.


처음에는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정적이 무겁게 깔리고, 누군가 먼저 입을 열기를 주저했다.


“그러면… 제가 먼저 시작할게요.”


넥타이를 맨 중년 남성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그는 본인이 왜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불안과 분노가 교차했던 일상 이야기를 조곤조곤 꺼내놓았다. 한참 듣다 보니, 늘 급진적인 구호만 외친다고 알려진 단체 쪽에서 나온 한 젊은 참가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긴장을 풀었다.


“저도 사실 비슷해요. 달리 표현하다 보니, 늘 격앙된 목소리로만 보였을 뿐이죠. 저희가 극단적인 말을 쓰는 건, 그만큼 기존 체제나 관행이 바뀌지 않아서 답답해서 그랬어요.”


작지만 의미 있는 접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쪽 다 ‘삶을 어떻게 지키고 나아질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있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방식을 쓴다는 걸 확인했을 때, 사람들은 낯선 동시에 묘한 친근감을 느꼈다.


선이는 이 작은 변화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주기도 하고, 중간중간 긴장도가 높아질 때는 “음료 더 드릴까요?”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밤이 깊어 갈수록, 천막 안에서는 의외의 웃음소리도 조금씩 피어올랐다. 그동안 서로를 ‘저쪽 편’이라 부르며 등을 돌리거나 막연히 적대시해온 이들이, 직접 얼굴을 마주 보니 적어도 상대가 ‘악의적인 적’만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 것이다.


“우리는 늘 극렬히 싸워야 하는 줄만 알았어요.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들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듣고 보니 공감 가는 부분도 많네요.”

“물론 아직 완전히 같은 편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적어도 이야기를 듣는 동안, 굳이 소리를 지를 필요가 없었어요.”


사람들의 솔직한 속내가 하나둘 튀어나왔다. 분위기가 조금 달아오를 즈음, 뒤늦게 찾아온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화해의 무드에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이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 따뜻한 자리가 나쁘지 않다는 듯 가만히 앉아들었다.


채선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마음속에 날선 모서리를 세우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기지개를 켜듯 경직된 태도가 풀어지고 있었다.


“자, 혹시 다음 주에도 이런 자리를 만들면 참여하고 싶으신 분 있나요?”


조심스레 던진 질문에 다수의 손이 올라갔다. 비록 전부는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선이에겐 큰 수확이었다.


그날 이후, 채선이는 발길이 바빠졌다. 각기 다른 집단들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을 조율해야 했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평일 저녁으로 잡아야 하는지, 아니면 주말 낮에 잠깐이라도 모일지 의논이 필요했다. 여러 그룹 중에는 우리는 굳이 그런 대화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이들도 여전히 있었다. 하지만 선이는 거부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그들의 선택이니 존중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몇 주가 더 흘렀다. 돌이켜보면, 모임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거리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한쪽에서는 으르렁대는 확성기 소리가 공기를 찢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축제처럼 흔들어대는 깃발 사이로 춤판이 벌어졌다. 게다가 현장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늘 ‘극단적인 양상’을 부각하곤 했다.


‘서로 완전히 으르렁대는 건가 보군’


외부에서는 그렇게만 인식할 수도 있었다. 사실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연결 시도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선이는 각자 다르게 외치지만, 결국 큰 틀에서 비슷한 지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움직임도 있다는 걸 점차 주위에 알리고 싶어 했다. SNS에 간단한 사진과 글을 올려보기도 했으나, 처음엔 주목받지 못했다. 이런 내용은 자극적이지 않았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즉각적으로 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작은 ‘좋아요’ 한 번에 기뻐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늦겨울 저녁, 모임을 준비하던 선이는 평소와 달리 왠지 긴장감이 더해지는 걸 느꼈다. 오늘은 이전과 다른 시도를 해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서로 다른 그룹이 작은 천막 한두 곳에서만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오늘은 조금 더 넓은 공간을 통째로 빌려 다섯 개 이상의 팀을 초청해 볼 생각이었다.


“과연 이게 제대로 될까…?”


선이는 천막을 치며 혼잣말을 했다. 옆에서 지후가 테이블을 펴며 웃었다.


“되든 안 되든 해보는 거지, 뭐. 설령 실패하더라도, 이 시도를 봤다는 것만으로 누군가는 영감을 얻을 거야.”

“그렇겠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준비를 마쳤다. 어느덧 한쪽에는 과일과 간단한 다과, 또 다른 한쪽에는 방명록 같은 것이 놓였다. 누구든 익명으로도 의견을 적어볼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다.


하나둘,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섰다. 전에 토론에 참여했던 사람들, 구호를 외치던 골목에서 만났던 이들, 그리고 ‘한번 구경해보겠다’며 호기심에 온 사람들까지. 공간이 제법 활기로 가득 찼다. 다소 뒤늦게 도착한 이들 가운데는 선명한 색의 깃발을 들고 있거나, 반대편으로 분류되던 사람들도 있었다. 몇몇은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일단 테이블에 앉고, 따뜻한 차를 건네받고, 이 모임에서는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다는 안내문을 읽고 나자, 그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안건이 오갔고, 때로는 예민한 쟁점에서 말이 격해지기도 했지만, 상대를 함부로 매도하거나 내쫓으려는 태도는 거의 없었다.


“아니, 그렇다 해도 너무 급진적인 방식은 안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대중이 등을 돌려요.”

“우리 입장에서야 급진적이라기보다는, 이미 느리게 움직이는 체제에 더 큰 충격을 주려는 거라고 보는 거예요!”


테이블 한가운데에서 팽팽한 의견 교환이 오갔다. 여기서 멈췄다면 그냥 또 다툼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잠시의 침묵이 흐르더니, 한 사람이 먼저 입술을 떼었다.


“…물론 우리도 너무 급하게 가다 보면 소수만 만족하고, 전체가 뒤엉킬 수 있다는 건 알아요. 다만 지금 그대로 두면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는, 그 절박함이 있는 거죠.”

“그 심정은 이해해요. 난 대신, 범위를 넓히려면 좀 더 온건한 방식도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고요.”


극적인 합의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해가는 모습이었다. 선이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마음 한구석이 뭉클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서로 등을 돌리며 욕설을 내뱉을 뻔했던 이들이, 비록 낯선 긴장감 속에서도 대화의 끈을 이어가고 있었다.


모임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 갈 때 즈음, 한쪽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앉아 있던 한 젊은 여성이 채선이에게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춰, 주변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리에 와 보니까… 생각이 좀 달라지긴 하네요. 사실 전 여기 오기 전에, 어차피 말 안 통할 텐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오늘 조금씩이라도 대화를 나눠보니, 완전히 닫아둘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엔 걱정이 컸어요. 서로 다른 곳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조차 못 모으는 상황에서, 그 반대편 그룹까지 함께한다는 게 말이나 될까 하고.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대화가 이루어지니까, 그래도 희망이 생기네요.”

“물론 한 번의 대화로 모든 걸 해결할 순 없겠죠.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적이 아니다, 다만 다른 방식과 생각을 가졌다는 인정만으로도 큰 걸음 같아요. 다음에도 이런 자리가 생기면 좋겠어요.”


그들의 목소리는 너른 공간에 부딪혀 가볍게 울렸다. 자리를 둘러보니, 어느새 이 모임을 지켜보던 사람들 몇이 자연스레 그룹을 나누어 소곤소곤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고, 또 다른 곳에서는 비교적 진지한 표정으로 토론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임이 어느 정도 끝나가자, 선이는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혹시 SNS나 연락처를 통해 다음에도 참석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자유롭게 남기길 권했다.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다음에 또 불러 주세요라며 자신들의 연락처나 메신저 아이디를 적어주었다.


행사가 모두 마무리된 뒤, 텅 빈 공간을 정리하며 선이는 감정을 정리할 틈도 없이 분주했다. 소모된 다과, 쓰레기, 정리해야 할 의자들 사이를 오가다 보니 땀이 날 정도였다. 지후가 수고했다고, 간단한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어때? 꽤 괜찮았지 않아?”


지후의 물음에 채선이는 잔을 한 모금 마시며 숨을 고른 후 대답했다.


“좋았어. 정확히 말하면… 대단한 성과가 있었다기보단, 내가 상상만 하던 장면이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는 느낌?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렇게 하나둘 모인 불빛이 모래알처럼 흩어지지 않고 이어지면 좋겠다는 희망이 생겼어.”


창밖으로 보니 어느새 밤하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크고 작은 불빛들이 숨어 있었다. 어떤 불빛은 겉보기엔 찬성을, 어떤 불빛은 반대를, 또 다른 불빛은 그 어딘가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채선이는 창틀에 손을 올리고 고요히 그 풍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조금 더, 조금 더 사람들을 연결해 보자.’


시간은 흘렀고, 선이가 기획한 ‘연결의 장’은 점차 입소문을 탔다. 물론 대규모가 아니었고, 여전히 충돌과 갈등의 목소리가 훨씬 크게 들리는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궁금증을 품었다. 저기선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기에, 서로 다른 색깔들이 모이는데도 크게 싸움이 벌어지지 않는 걸까? 하고. 덕분에 다음번 모임은 이전보다 조금 더 많은 이들이 찾았다. 각자의 피켓을 놓고, 잠깐 마음을 열고, 상대를 직접 마주 볼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시도를 낯설어하고 불신하는 시선도 있었다.


“말로만 통하는 세상은 아니야. 결국 힘을 보여줘야 움직이는 거라고!”


어느 골목에선 이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또 다른 곳에선 우리가 이런 중간 지대를 허용하면, 우리만 손해 보는 게 아닐까? 하는 목소리도. 사람마다 방식이 다르고, 그 불신을 쉽게 지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채선이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선이는 묵묵히 한 발씩 내디뎠다. 성급하게 모두 하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단, 먼저 언제든 이야기를 섞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서로 다른 깃발 아래 서 있는 사람들도, 때로는 마음 한편이 허전하거나 답답할 때가 있을 테니까. 겨울 끝자락이 다가올 무렵, 어느 스산한 오후에 선이는 지후와 함께 다시 한 번 거리로 나갔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풍경 속에서, 아직 한 번도 대화를 시도하지 못한 몇몇 단체 쪽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종일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몸이 꽤 지쳤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골목골목 들어가 보니, 우연히도 의외의 얼굴이 보였다. 예전에 격렬한 구호와 표정을 보이던 한 활동가가,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어딘가 쓸쓸하게 혼자 서 있었다. 채선이는 망설이다가 조용히 다가갔다.


“지난번 천막 모임 때 오시지 않았었죠…? 혹시, 다음에 오실 생각은 없으세요?”


그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채선이를 쳐다봤다. 한동안 무언의 시간이 흘렀다.


“…솔직히, 너희가 뭘 하려는지는 좀 궁금했어. 근데 괜히 거기 가서 내 생각만 고립되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럴 리 없어요. 다들 강요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요.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먼저 일어나도 되고요.”


그 사람이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시선을 돌렸다. 눈길이 땅바닥을 훑고 지나가다, 다시 선이에게 돌아왔다.


“뭐, 한 번쯤 가볼게요.”


의외로 간단한 답변이었다. 그리고는 그냥 가던 길을 가버렸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채선이는 그걸로도 충분히 의미를 찾았다. 분명 그 마음 한구석에도 궁금증과 갈등이 있겠지. 그렇다면 그 불씨를 더 살려볼 수 있을 거라고. 이렇듯 삐걱대면서도 계속되는 시도 속에서, 선이는 매일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분명히 태도나 언어가 완전히 어긋나 보이는 사람들도, 한참 듣다 보면 공통의 삶의 어려움을 겪었고, 같은 바람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길이 서로 달랐을 뿐이었다.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올 즈음, 선이는 길을 걸으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처음 불꽃을 들었을 때, 혼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이거 다 무의미한 게 아닐까?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던 순간들. 이제는 그때보다 훨씬 많은 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비록 완벽한 연대나 단일 조직으로 묶이는 건 아니지만, 각자 다른 자리에서 조금씩 공통분모를 넓혀 가고 있었다.


‘옛날엔 하나의 거대한 함성으로 모든 걸 뒤집을 수 있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더라.’


하지만 지금은 이전과 다른 걸 깨달았다. 거대한 하나의 함성만이 답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목소리들이 서로 얽히고 공감하는 과정도 존엄한 길이라는 것을. 온전히 하나가 되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조용히 불빛을 건네는 모습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그날, 해가 저물 무렵 채선이는 다시 광장 한가운데 섰다. 이미 여러 그룹의 촛불과 깃발이 보였다. 여전히 골목 어귀에서는 날선 말들이 오갔고, 반대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끼리 얼굴을 붉히며 멀찍이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는 얼굴들이 군데군데 모여 작은 대화의 원을 만들고 있는 것도 보였다. 섞이는 듯, 겹치는 듯, 어딘가 어색하기도 하고 스스럼없이 반갑기도 한 장면들이 공존했다.


어쩌면 오늘도 누군가는 다투고, 누군가는 아예 벽을 치고 돌아설 테다. 그래도 이 수많은 불빛 중 몇몇은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지리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선이는 피어오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초에 불을 붙였다.


‘같은 불꽃인데, 색이 다를 뿐이야. 모두가 다른 색이라면… 언젠간 그게 모여 무지개처럼 더 찬란한 빛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희미한 바람이 초의 불꽃을 흔들었다. 선이는 곧바로 손바닥으로 불씨를 감싸며 미소 지었다. 그것은 아주 작은 불꽃에 불과했으나, 이 도시에 이미 놓인 무수한 불빛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 이 불꽃을 보고 다시 또 다른 자신의 불빛을 지피러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천히 눈을 들어 광장을 둘러보았다. 차갑고 시끄러운 함성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찾아온 이유를 지키기 위해 여전히 촛불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빛 사이에서 잠시 멈춰 선 선이는, 여전히 ‘하나로 모으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잘 알지만, 오늘도 역시 그 길을 향해 묵묵히 나아갔다.


조그만 촛불이 모이고, 모여서 또 하나의 길을 만든다. 거기는 이렇게 서로 다른 목소리와 다채로운 색이 공존하고, 언젠가는 같아질 수도, 끝까지 다르더라도 괜찮은 세상일 수도 있었다.


선이가 손에 쥔 초는 여전히 흔들렸지만, 그 불꽃은 결코 쉽게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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