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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411

by 라한
마카마카 다슬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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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양다인

제목: 도서 추적 시물레이션


-내 어린 시절 우연히 들었던 믿지 못할 한 마디.

-이 세상을 다 준다는 매혹적인 얘기.


사람들이 노래를 들으며 추억에 빠져 있을 때, 다인은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에 빠져 있었다.


“내게 꿈을 심어 주었어.”


책에서 나온 한 소절과, 노래 가사 한 소절이 맞아 떨어져 맞장구를 쳤다. 사람들은 노래를 듣고, 다인은 책을 읽고 있었다.


“역시, 책에는 꿈이 있어.”


피터팬과 같은 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 세상을 지키려는 자와 세상 따위는 상관 없이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하나를 지키려는 로맨티스트부터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꿈이 책에는 기록되어 있었다.


다인은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정작 너무 많은 꿈들을 경험하면서 어떤 미래를 그려 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공부는 그럭저럭 잘하는 편이라서 하고 싶은 걸 성적 때문에 못될 위기는 없는 편이었다. 다만 교과 책 보단, 그냥 재밌는 책을, 에세이나 교양 보다는 재밌는 소설을 더 선호하기도 했다. 그래서 남들과 같이 베스트셀러에 있는 쪽의 책은 대부분 섭렵했지만, 그외 잘 읽지 않는 책들은 잘 읽지 않았다.


반드시 필수로 읽어야 하는 교과서는 그냥 새책처럼, 헌책방에 받아도 꽤 A+급으로 취급 받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았다.


다인은 책을 깨끗이 읽는 편이긴 했다. 접지 않고 자신의 허리를 굽히며 자세를 바꿔서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진 아이였다. 그럼에도 아마 교과서도 다른 재밌는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설처럼 읽었으면 성적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고,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아마 교내에서도 그리고 교외, 전국에서도 성적이 탑에 오르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아이였다.


“역시, 책은 소설이야.”


그런 다인은 어느 날, 문득 아무도 읽지 않는 책에 대한 문구가 나온 소설을 읽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읽지 않은 책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내용이었다.


“재밌는 상황이네.”


다인은 자신도 아무도 읽지 않는 책에서 행운을 만나지 않을까 싶은 심정으로 조사 끝에 지금까지 이 도서관에서 한 번도 대여된 적이 없는 책이었다. 상태를 보면 새책은 아닌 것 같았는데, 헌책이지만 이 책은 거의 아무도 읽지 않은 책에 가까웠다.


다인은 그런 책을 앞에 두고 손을 뻗어 잡을 위치에 섰다. 사실 아무것도 업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읽었던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며 괜한 기대를 심어 보았다.


“여기에 행운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인은 책 표지를 살포시 만지작거리며 숨을 고르듯 책을 품으로 들이밀었다. 눈은 초조함과 기대감으로 살짝 흔들리고 있었고, 귓가에는 그 옛날 소설에서 읽은 ‘비밀이 깃든 책’의 한 장면이 겹쳐졌다. 금방이라도 습기가 배어 나올 듯한 낡은 종이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이 책 속에 정말 무언가 있을까?’ 생각을 머금은 채, 다인은 책의 첫 장을 천천히 넘겼다.


책 제목은 평범해 보였으나 그 글자체는 어딘가 기묘한 고전을 닮아 있었다. 발간 연도조차 분명치 않게 지워진 흔적이 남아 있어, 세월의 흔적이 제멋대로 흔적을 새겨놓은 듯했다. 작가 이름도 희미하게 번져 있어 겨우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이건 정말 알아볼 수 없는 수준에 가까웠다. 다인은 약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단 아무도 읽지 않았다는 이 책을 펴놓고 표지 뒤쪽과 중간중간을 대강 훑어보았다.


내용은 잡다한 철학적 이야기가 이어지는 듯했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니 언뜻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구식 한자와 서양의 고서체를 섞어놓은 양, 이질적인 활자들이 섞여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종종 줄 간격이 기이하게 벌어진 부분도 있었고, 심지어 어떤 페이지는 정중앙 한 구석에만 짧은 문장이 찍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중요한 정보를 일부러 다른 체제에 섞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페이지마다 활자 크기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부분도 있었다.


“이상하네… 전혀 일관성이 없어.”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다인은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서너 장을 훑어보는 사이, 어느새 그녀의 눈빛엔 호기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언제라도 닫을 듯했던 책이 이젠 쉽사리 내려놓지 못할, 묘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날 저녁, 다인은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방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곧장 그 책을 다시 펼쳐보기 시작했다. 책 속에 뭐가 숨겨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단서라도 찾으면 좋겠다는 마음. 어린 시절 읽었던 모험담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랄까. 모두가 등 돌린 책이 자신에게만 비밀을 슬쩍 보여주면 얼마나 설렐까 싶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다인은 익숙하지 않은 언어나 기호들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가볍게 메모를 했다. 빽빽한 글자 사이에 괴상한 낙서 같은 문양이 삽입된 페이지도 있었다. 가령, 세모와 네모를 교묘하게 겹쳐놓은 문양이라거나, 어떤 페이지 구석에 조그맣게 라틴어로 보이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식이었다. 이런 조각들을 놓칠세라 다인은 작은 수첩을 꺼내 하나하나 정리해놓았다.


“옛날엔 이런 걸 해독해주는 앱 같은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농담처럼 중얼거리다가, 이내 문득 궁금증이 솟았다. 요즘 세상에는 분명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다인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옛 문서 해석’ 같은 키워드로 검색해볼까 고민하다, 혹시 지나친 정보 노출이 될 수도 있다는 찜찜함에 살짝 망설여졌다. 소설에서 늘 봐 왔듯이, 이런 미스터리한 문헌은 대개 무언가 더 큰 이야기를 품고 있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상상력을 잔뜩 부풀려줄 이런 흥미로운 퍼즐을 서둘러 풀어버리고 싶진 않았다. 스스로 조금 더 파고들어보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다인의 방 불은 한참 동안 꺼지지 않았다. 창문 너머로는 쌀쌀한 바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그녀의 시선은 책과 수첩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였다.


다음 날 아침, 다인은 일찌감치 등굣길에 나서기 전에 도서관 근처를 지났다. 학교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고, 마음 한편이 간질거려 도서관 사서인 윤 사서님(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그러면서도 언제나 조용히 미소를 지어주는 분)을 잠깐 찾아가볼까 했던 것이다.


아침이라 도서관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던 윤 사서가 다인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일찍 왔네? 오늘도 책 찾으러 왔니?”

“네, 어제 빌려간 책 때문에 좀 궁금한 게 생겼어요.”

“아, 그게… 잘 안 빌려가는 그 책 말인가 보네?”


이미 다인이 어떤 책을 빌렸는지 짐작하고 있는 듯, 윤 사서는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도서 목록 정리하면서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진짜로 한번도 대여 기록이 없더라고. 보통 그런 책들은 폐기할지 말지 고민해야 하거든.”

“저도 신기해서 가져가 봤는데, 좀 이상한 게 있어요.”


다인은 살짝 망설이다가 가방에서 예비로 찍어둔 책 페이지 사진을 보여줬다. 종이 질감까지 드러나는 고색창연한 페이지에, 단정치 않은 필체의 수상한 문장과 문양이 찍혀 있었다. 윤 사서는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이 책에 있었어?”

“네. 그냥 책 속에 있던 문장인데, 쭉 이어지지도 않고, 언어도 제각각이에요. 한글, 한자, 서양 알파벳… 별게 다 섞여 있어요.”


윤 사서는 표정을 굳힌 뒤 조용히 말을 이었다.


“도서 목록 확인할 때도, 이 책이 좀 이상하긴 했어. 일단 기본 분류가 안 되어 있거든. 출판사나 발행 일자조차 기록이 없어… 마치 누군가 일부러 도서관 서가에 꽂아둔 것 같다고 할까.”


다인은 살짝 목이 말라졌다. 정말 괜히 심장이 뜨겁게 뛰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이게 뭔지 꼭 알아내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치솟아 올랐다. 윤 사서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은근한 흥미를 누르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도서관에서 일한 지 제법 됐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혹시 모르게 고문헌을 수집하던 누군가가 헌책을 기부하면서 들어왔을지도 모르지. 잘 몰라서 그냥 서가 한쪽에 눌러 앉아버린 거고… 하긴, 워낙 오래된 책들은 말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다인은 그 말을 듣고 더욱더 이 책을 파헤치고 싶어졌다. 가슴속에 희미하게 꺼져가던 모험심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런 낯선 글자들 중에 몇 개는 라틴어로 보이기도 해요. 고대 문헌에서 쓰이던 단어… 혹은 그냥 뒤죽박죽일 수도 있지만.”

“일단 내가 구할 수 있는 자료를 좀 더 찾아볼게. 어떤 방식으로 분류돼 있었는지, 혹시 옛날에 이 책 관련 문의가 들어온 적이 있는지. 다인아, 너도 조심해서 살펴봐. 괜히 함부로 페이지 뜯거나 훼손하면 안 된다? 고문헌이면 귀중한 자료일 수도 있으니까.”


다인은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네. 아마 제 책장에 꽂혀 있는 어떤 소설보다도 훨씬 더 정성껏 다룰 거예요.”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늦은 오후, 다인은 다시 그 책을 펼쳤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던져놓고 방으로 뛰어들어온 것이다. 먼지가 쌓여 책등이 허옇게 바랜 교과서들과 달리, 이 정체 모를 책은 그녀의 열띤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책 속에는 짧은 문단들의 집합처럼 보이면서도 군데군데 페이지 구성이 튀어 있었다. 어떤 부분은 마치 일기를 쓰듯 날짜가 찍혀 있기도 했다. 예컨대, ‘광해 10년 2월 14일’ 같은 식으로 적혀 있기도 했고, 또 다른 페이지는 ‘Anno Domini 1634’라는 문구로 시작되었다.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기록인 걸까. 겉보기엔 엉망인 듯 보여도 의외로 치밀하게 구성된 흔적이 엿보였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을까…”


다인은 볼펜을 입에 살짝 물고 고민에 잠겼다. 문득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의 기묘함이 느껴졌다. 혹시 이 책에는 다양한 시대의 사람들이 남긴 편지가 집합되어 있는 건 아닐까? 어떤 문명에서 온 메시지인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생각까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침에 도서관에서 윤 사서가 보여준 표정. 그건 단순한 호기심이나 경이로움만은 아니었다. 뭔가 알 듯하면서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듯한 미묘함이 느껴졌다. 분명 도서관 측에서도 이 책에 대해 확인해본 적이 있을 텐데,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만 하기엔 뭔가 씁쓸한 구석이 있었달까.


다인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좀 더 정교하게 살펴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 사이사이를 가볍게 들춰보았다. 페이지 끼임 속에 쪽지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혹은 누군가 메모를 붙여놓은 흔적은 없을까? 두어 번 헛수고만 하고 나서야, 책 뒤표지 안쪽 종잇장과 본문 사이에 희미하게 접힌 종이 조각 하나가 흘러나왔다.


심장이 한 번 세게 고동쳤다. 책 속에서 유실된 줄 알았던 낡은 단서가, 예감처럼 정말 존재했던 것이다.


다인은 종잇조각을 살짝 펼쳤다. 누렇게 바랜 색감에, 붓펜 같은 걸로 휘갈겨 쓴 필체가 보였다. 대략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불규칙하게 적혀 있었다.


“세상이 잊은 문을 여는 열쇠,

조각난 꿈들의 조우,

그리고 그 문 뒤에 잠든 자들.”


딱히 문맥이 연결되는 구절은 아니었으나, 특유의 비장함이 묻어났다. 다인은 본능적으로 이 문장에 등장하는 ‘문’이 이 책 속 여러 단서와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했다.


“잊힌 문이라…”


스르르 한숨을 내쉬고 나자, 왠지 모를 전율이 온몸을 휩쓸었다. 이 정도로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데도, 다인은 겁먹기보다 기묘한 설렘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요한 방 안에 오직 책장 넘기는 소리와 그녀의 호흡만이 잔잔히 퍼져나갈 뿐이었다.


며칠 뒤, 주말이 되자 다인은 도서관에 다시 들렀다. 이젠 적당히 호기심만으로는 풀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윤 사서가 혹시 더 알아낸 게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쪽지에 대해 상의해볼 필요가 있었다.


도서관 한쪽, 내부 직원용 문서가 잔뜩 쌓인 조그만 사무실에서 윤 사서는 달그락거리는 서류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다인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자 그가 반갑게 맞이했다.


“왔구나. 나도 네가 언제쯤 오나 싶었어.”

“책 뒤표지 사이에 끼어 있던 건데… 아마 원래 이 책 속에 포함됐던 것 같아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어요.”


윤 사서는 돋보기를 꺼내더니 종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 나서 어느새 준비한 서적 몇 권을 펼쳐놓았다.


“며칠 전부터 도서관 기록을 뒤지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어. 꽤 오래전에, 이곳 도서관이 ‘고서 특별전’ 비슷한 행사를 준비하면서 수집했던 책 목록 중에, 이와 유사한 서술이 언급된 문서가 있어. 근데 그 문서에 적힌 책 제목과 지금 네가 빌려 간 책의 제목이 비슷한데도, 표기가 살짝 다르더라고. 혹은 여러 본이 존재했을 수도 있고.”


윤 사서는 고서 특별전 당시의 간단한 소개문을 펼쳐 보였다.


“여기에 ‘세상을 여는 문을 지키는 자’라는 표현이 있어. 이 문장과 네가 가져온 종잇조각의 문구가 묘하게 겹친다는 게 이상하지 않니?”


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연결고리가 있는 듯했다.


“그럼 이 책이 그 특별전 목록에 포함되었다가, 행사 직후에 서가로 흘러 들어와 버린 걸 수도 있겠네요. 해석도 제대로 안 되고, 공식 등록도 안 되어 있고, 그래서 그 누구도 읽지 않고 방치된 채…”


윤 사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이네. 문제는, 이걸 누구에게 보여줘야 제대로 된 해석이 가능할지가 관건이야. 지금은 전문가가 없으니, 만약 심층 연구가 필요한 고문헌이라면 바로 발견조차 어려웠을지도 몰라.”


그러면서 살짝 눈을 흘겼다. 다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보였다.


“네가 말이야, 이걸 그냥 ‘흥미롭게 읽고 있다’ 정도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수도 있어. 어쩌면 이 책이 담고 있는 게 꽤 무거운 내용일지도 모르잖아. 내가 괜히 겁주는 거 아니야. 다만, 이런 종류는 괴담 수준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많아서…”

“그런 괴담도 재밌잖아요. 뭔가 좀 껄끄럽고 무서운 내용이 있다면, 전 더 알고 싶어요. 숨은 이야기를 발견한다는 게 멋지잖아요.”


윤 사서는 살짝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기세를 꺾지는 않았다. 어쩌면 다인에게도 이미 책의 비밀이 깊숙이 파고든 걸 눈치챘을 것이다.


도서관을 나서는 길, 다인의 마음은 이미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책에 적힌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 종잇조각에 쓰인 기묘한 문구, 특별전에 얽힌 정체불명의 기록들…’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집에 돌아와 방 문을 열자마자, 다인은 다시 책을 펼쳤다. 진지한 표정으로 페이지 사이를 뒤적이던 그녀는 이번엔 조금 더 섬세하게, 혹시 단어 배열이나 문단 배치에 어떤 규칙이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갑자기 몇 페이지는 ‘악보’처럼 글자들이 줄을 타고 늘어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령, 특정 문단의 첫 글자들을 세로로 이어 보면, 마치 ‘문을 여는 자’ 같은 문구가 드러나는 식이었다.


“아, 여기 있네!”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한 페이지의 각 단락 첫 글자를 순서대로 연결하자, ‘열쇠’라는 낱말이 희미하게 나타난 것이다. 세로로 “ㅇㅕㄹㅅㅖ”가 맞춰지니, 더욱더 소름이 돋았다. 이런 식으로 책 전체를 뒤지면, 숨겨진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인의 손끝엔 긴장과 열기가 느껴졌다.


세심하게 페이지를 넘길수록, 수많은 단서가 구석구석 숨어 있다는 느낌이 확실해졌다. 어떤 부분은 헛다리였고, 또 어떤 부분은 정답에 가까운 힌트로 보였다. 대체로, ‘문’, ‘열쇠’, ‘조각’, ‘꿈’, ‘존재’, ‘잊혀진’ 같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하나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분명 이 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큰 그림이 있음을 암시했다.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모를 만큼 몰두하던 중,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윤 사서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다인아, 혹시 시간 되면 내일 도서관 잠깐 들러줄래?

미안한데, 누가 이 책에 대해 물어보고 간 것 같아.


뭔가 흉흉하면서도 흥분되는 기분이 엄습해왔다. ‘누가 이 책을 물어봤을까? 전혀 읽히지 않았던 책이라면서?’ 다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특별전 때 이 책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는 누군가일까, 아니면 정말로 고문헌을 연구하는 사람이 뒤늦게 관심을 가진 걸까. 마음이 분주해지는 동시에, 묘하게 두려움도 움트기 시작했다.


그날 밤, 다인은 새삼 책을 안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방 안에 번진 조용한 어둠 속에서, 그 책의 낡은 표지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진짜 뭔가가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괜히 상상을 펼치는 걸까…”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미 멈출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버렸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였다. 잊힌 책이 품은 목소리가 점점 다인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했다.


다음 날이 오기도 전에, 창밖으로 새벽빛이 흐릿하게 번지기 시작했을 무렵, 다인은 선잠에서 깨어났다. 마음이 바빠서인지 잠을 깊이 못 잔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몸은 생생하게 깨어 있었고, 도서관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뭐라도 알게 될 거야.”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린 뒤, 다인은 재빨리 옷을 챙겨 입었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가슴이 막 뛰어올라 잠깐 머리가 띵해질 정도였다.


‘이제 곧 책의 새로운 단서를 파악할 지도 몰라. 또는 위험한 사실이 밝혀질지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책이, 지금 자신에게만 은밀하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는 기분이 드니 기묘한 전율이 일었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과거 소설 한 구절에 영향을 받은 일회성 호기심이 아니라, 다인이 책에서 꿈을 발견하던 그 시절부터 간직해온 무언가의 연장선인지도 모른다. 작은 서가 속에 잠들어 있던 이야기의 힘, 그리고 그 힘에 끌려 자신도 모르게 여기까지 달려오게 된 어떤 인연. 어릴 적 막연히 상상해왔던 ‘새로운 세상’이, 이 오래된 책 속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곧 도서관 문이 열릴 시간이 다가온다. 다인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가슴속엔 셀 수도 없는 질문들이 자꾸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윤 사서가 전해줄 소식은 과연 무엇일까. 정체불명의 ‘누군가’는 왜 이제서야 이 책을 찾아왔을까. 그리고 이 책이 인도하는 ‘문’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며,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은 어떤 모습일까.


다인은 미지의 끝에서, 자신이 읽어오던 모든 소설 속 모험담에 비견될 만큼 스펙터클한 이야기가 펼쳐지리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눈앞에 다가올 현실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심장이 벅찰 정도로 뛰고 있는데, 뒤로 물러서는 건 선택지가 되지 않았다.


‘가자. 그리고 직접 확인하자.’


그 생각을 가슴에 품은 채, 다인은 미지의 문턱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책 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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