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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쿱스의 연기를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412

by 라한
세븐틴 에스쿱스의 연기를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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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쿱스의 연기를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성철인

제목: 배구하자!


“축구하자!”


만능캐인 철인에게 언제나 축구하자, 농구하자, 테니스하자, 공부하자와 같은 소리들을 해내는 주변인들이었다. 친구들부터 시작해서 선생님들의 잔소리로 항상 뭘 하자는 얘기가 많았다. 그 중에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는 ‘배구하자’였다. 이유는 너무 많이 들어서였다. 가족들이 모두 배구와 관련된 일을 했다. 오남매인 철인의 가족들 중에 첫째 누나와 둘째 누나, 그리고 셋째 형마저 프로배구 선수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당연히 넷째인 철인도 자연스럽게 배구 선수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배구’에 관려된 말이었다. 배구하자. 배구 고! 배구 연습해야해. 배구 훈련 중이야 라는 말들에 노이로제가 걸렸다.


“도대체 배구가 뭐가!”


타고난 유전자 때문인지 배구를 잘하긴 했지만, 배구를 하고싶은 건 아니었다. 몸과 이름도 철인으로 오프라인으로 뛰어노는 운동을 잘하긴 하지만, 좋아하는 건 하드웨어적인 몸을 쓰는 일이 아닌 소프트웨어, 그것도 온라인 게임이었던 철인었다.


“안돼! 게임해야 돼!”


친구들의 축구하자는 이야기를 무시하기 위해 뒷문으로 나가던 철인은 학교로 오는 배구 코치를 발견했다. 형과 누나들 때문에 자신에게도 언제든 배구 팀으로 와야 한다고 설득보단 설교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는 코치님이었다.


“아, 마주치면 안되는데.”


그때 다시 코치를 피하러 학교로 들어가는데 난생 처음 보는 복도였다. 복도에는 동아실이 가득했다.


“이런 곳도 있었나.”


철인은 항상 집으로 가던 가 결국은 친구들에게 끌려가 축구를 하고 해트트릭 하면 집에 보내준다는말에 10분만에 골을 넣고 게임을 하러 집으러 갔었다. 그럴 때마다 한 골만 더! 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모두 무시했다.


“우리 학교에 이렇게 동아리가 많았어?”


철인은 중앙게시판에서 어떤 동아리가 있나 살펴보았다. 그중에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게임?”


그냥 게임을 하는 동아리가 아니라 ‘게임제작동아리 퀘스트메이커’였다.


철인은 복도 한가운데 붙어 있던 동아리 소개 포스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평소 늘 ‘운동 잘하는 애’로만 주목받던 자신이지만, 사실 마음속에는 전혀 다른 갈증이 있었다. 왜 하필 배구나 축구, 테니스 같은 게 아니라 컴퓨터로 뭔가를 만들고 싶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몸을 크게 움직이며 뛰어다니는 일도 물론 싫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온라인 게임에 몰두할 때면 다른 세상이 열리는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가슴 속에 불이 켜지는 기분. 그것만큼은 가족도, 친구들도 잘 이해 못 하는 것 같았다.


동아리 명칭이 ‘게임제작동아리 퀘스트메이커’.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드는 모임이라고 했다. 철인은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이렇게까지 기술적인 부분을 파고드는 동아리에 내가 들어가도 괜찮을까?’ 애초에 컴퓨터로 게임을 만들어본 경험은 없었다. 그저 온라인 게임을 좋아하고, 조금씩 혼자서 찾아본 프로그래밍 지식이 전부였다.


잠시 망설이던 철인은, 배구 코치님을 피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혹시 동아리실 안에서 시끌벅적한 게임 사운드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한 분위기가 그를 맞았다. 낯선 선배 한 명이 낡은 노트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선배는 렌더링 프로그램을 끄고 고개를 들었다. 복도 불빛에 비친 철인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음... 혹시 동아리 들어오려고요?”

“네... 게임 만드는 거, 배우고 싶어서.”


철인은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레 대답했다. 당장이라도 너, 운동 잘한다며? 우리 같은 오타쿠 동아리에 관심이나 있겠어? 라는 식의 말을 들을 것 같아 긴장되었다. 그런데 선배는 뜬금없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운동신경도 좋아요?”


철인은 묘하게 기분이 찔려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 조금요.”

“오! 그럼 모션 캡처 같은 거 할 때 도움 되겠네. 우리 동아리가 2D 게임이 주력이긴 한데, 3D로 확장하면 움직임 데이터가 필요하거든. 농구부나 축구부 애들 중에 이런 데 관심 있는 애를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잘 됐다!”


철인은 그 말에 ‘아, 이 사람은 내가 뭘 잘해서 부른다기보다, 동아리 실험용으로 보는 거 아니야?’ 하고 잠깐 경계했다. 그래도 선배 눈에 비친 열정의 빛을 보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 어쨌든 배구 코치에게 쫓겨다니며 복도를 헤매는 것보단 여기서 이야기나 좀 나눠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럼, 저... 가입해도 돼요?”

“물론이죠! 일단 우리 동아리는 인원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누구든 환영이긴 한데, 들어오면 가끔씩 쓸 만한 그래픽이나 사운드도 직접 찾아보고, 기본 프로그래밍도 배우고 그래야 돼요. 괜찮으면, 다음 주 모임 때 와서 자세히 들어봐요.”


철인은 순간, 동아리실에 들어오는 걸 보게 되면 형이나 누나가 또 뭐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쳤다. 가족 중 셋이나 프로배구 선수로 뛰다 보니, 학교 운동부에서도 철인을 ‘예비 선수’ 쯤으로 여기는 시선이 컸다. 그렇지만 이미 들어와 버렸다. 더 이상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그날 저녁, 철인은 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둘째 누나와 동행했다. 여느 때처럼 학교에서 운동은 잘하고 있지? 괜찮지?라는 잔소리 섞인 말이 먼저 쏟아졌다. 철인은 슬며시 피곤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누나, 나 운동 말고 다른 것도 좀 해보고 싶어서.”

“다른 거? 뭔데?”

“그냥... 게임.”

“게임? 너 또 집에서 컴퓨터 붙들고 하루종일 그러겠다는 거야?”


누나는 잠시 답답해 보였지만, 넷째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요즘은 e스포츠도 있고... 근데 네가 거기에 선수로 뛰겠다는 건 아닐 거 아냐.”

“응. 나, 아예 만드는 걸 배워볼까 해.”


그러자 누나는 걸음을 멈추고 철인을 빤히 쳐다봤다. 잠깐이지만, 놀람과 응원의 감정이 동시에 비치는 듯했다.


“그럼, 잘해봐. 내가 굳이 막을 이유는 없지. 네가 정말 하고 싶다면.”


둘째 누나의 목소리가 뜻밖에 부드러웠다. 철인은 괜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며칠 뒤, 동아리 모임날이 찾아왔다. 철인은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동아리실에 들어섰다. 지난번 본 선배 외에도 몇 명이 새롭게 보였다. 3학년 여자 선배 두 명, 그리고 2학년 남학생 한 명. 교실 구석에는 ‘퀘스트메이커’라는 이름을 그럴싸하게 적어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오, 왔네?”

“안녕하세요.”


선배들은 반갑게 손짓하며 철인을 맞아주었다. 일단 동아리장인 3학년 선배 ‘정재욱’은 분위기를 리드하며, 앞으로 학교 축제나 각종 공모전에 내보낼 게임을 만드는 게 동아리 주된 목표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주로 2D RPG 쪽을 만들어 왔고, 올해는 공모전이 좀 많아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할 생각이야. 혹시 관심 있으면 같이 참여해봐.”

“네! 저... 잘 모르긴 하지만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그럼 우선은 기본 프로그래밍 도구부터 익히면 좋을 거야. 유니티나 언리얼 같은 엔진도 있지만, 우리 동아리는 일단 C언어나 파이썬 기초 같은 걸로 시작하거든.”


철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들이 알려주는 자료들을 꼼꼼히 노트에 적었다. 분명 배구 코트에서 뛰어다니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지식의 폭발이 머릿속에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훗날, 이 지식들을 활용해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을까? 혹은 운동 같은 건 정말로 접어도 괜찮을까? 여전히 마음속에선 불안감이 뒤섞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인은 묘한 희열을 느꼈다. 가족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는 건 늘 두려운 선택이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동아리에 가입한 뒤부터 철인은 방과 후마다 동아리실을 찾았다. 처음에는 간단한 예제로 ‘가위바위보’ 콘솔 프로그램을 짜는 방법부터 배웠다. 화면에는 텍스트만 떴고, 그래픽이라곤 볼 수도 없었지만, 직접 코드를 짜서 결과가 나오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정말 내가 만드는 거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동아리 선배들은 조금 더 어려운 개념으로 배열, 포인터, 간단한 알고리즘 등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철인은 수학 문제를 풀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워가며, 생각보다 자신이 프로그래밍에 꽤 흥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전부 알리기는 조금 겁났다. 배구에 열정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칫하면 너는 그럼 프로 선수가 되고 싶지 않은 거야? 라는 질문이 날아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조용히,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하는 걸로 만족하자고 마음먹었다.


그해 여름방학, 학교에선 전공 심화 동아리들을 위해 특별 과제를 내주었다. 동아리별로 2주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개학 후에 발표회를 여는 형태였다. ‘퀘스트메이커’의 분위기는 단숨에 달아올랐다. 주제는 무엇이든 좋았지만, 완성도 있게 보여줄 만한 결과물을 내놓아야 했다.


“뭘 만들면 좋을까?”

“우선은 간단한 2D 게임이 좋지 않을까? 우리 실력으로 3D 그래픽은 아직 버겁잖아.”

“액션 RPG가 재밌긴 한데, 기간이 너무 짧아. 그냥 미니게임 모음처럼 만들어볼까?”


선배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사이, 철인은 작게 손을 들었다.


“죄송한데요, 혹시... 운동을 테마로 게임 만들어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철인 자신조차 놀랐다. 가족의 배구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면서, 정작 자신이 먼저 ‘운동’을 언급하다니. 그러나 마음속에는 어렴풋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배구를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게임 형태로 바꾸면 꽤 흥미롭지 않을까?’


“운동? 뭐, 예를 들면 농구나 축구 게임 같은?”

“어... 배구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방 안이 살짝 조용해졌다. 선배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3학년 선배 한 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괜찮긴 한데, 우리 기술력이 얼마나 뒷받침될지가 문제네. 배구라면 공의 궤적이나 선수 움직임 같은 걸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 그래픽은 단순화해도, 물리 엔진을 써야 할 텐데.”


철인은 이 말을 듣고 오히려 더 흥미가 생겼다.

‘그래, 이거다. 간단한 애니메이션이든 뭐든, 직접 구현해보자!’

마음이 점차 불타오르는 걸 느끼며 호기롭게 대답했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직은 기초 단계이지만, 이 기회에 좀 더 파보려고요.”


그렇게 동아리 방학 프로젝트의 테마가 ‘미니 배구 게임’으로 정해졌다. 당연히 전문적인 스포츠 게임 수준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화면에 캐릭터가 뜨고, 공이 오가며 득점을 하는 정도까진 구현해보자는 목표가 잡혔다.


철인은 엔진을 다루는 선배들을 도와 캐릭터 스프라이트를 그리고, 점프나 스파이크 모션을 고민했다. 필요하면 자기 몸을 직접 촬영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얻은 자료를 분석해 공이 손에 닿으면 튕겨 나가는 간단한 물리 시스템을 짜 넣었다. 동아리실 바깥에선 코치나 다른 친구들이 땀 흘려 운동할 때, 철인은 모니터 앞에서 땀 흘려 코드를 짜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형과 누나들은 종종 연락을 해왔다. 한창 시즌 중이라 무척 바빠 보였지만, 넷째 소식이 궁금했는지 잘 지내냐, 운동은 좀 하냐 같은 말들을 전해왔다. 철인은 그때마다 적당히 대답을 돌려 말하거나, 갈수록 동아리 생활에 빠져드는 자신을 숨기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둘째 누나가 집에 잠시 들렀을 때, 우연히 철인이 만든 ‘미니 배구 게임’ 테스트 화면을 보게 되었다. 끄트머리엔 귀엽게 움직이는 2D 캐릭터가 반복적으로 공을 넘기는 단순한 영상. 누나는 조용히 들여다보다가 히죽 웃었다.


“야, 뭔가 어설프긴 한데 꽤 재밌어 보이네. 이거 네가 코딩했어?”

“응. 선배들 도움 많이 받긴 했지만.”

“오... 의외로 잘 만드는데? 이거 점프 타이밍 같은 게 조금만 더 자연스러우면 괜찮겠다. 실제 코트에서의 타이밍이랑 많이 달라 보이긴 하지만.”


철인은 순간 머릿속에 ‘진짜 코트에서의 움직임’을 어떻게 코드로 풀어낼지 궁금해졌다. 누나가 제안하는 몇 가지 동작 디테일을 노트에 적어두며, “어? 이거 꽤 쓸 만한 아이디어다!” 하고 눈을 반짝였다. 생각보다 가족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이 많았다. 어떤 동작이 어색한지, 공격 타이밍은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건 코드를 짜는 사람만으론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방학 말미가 되자, 동아리는 게임 발표회를 대비해 마지막 테스트 작업을 진행했다. 아직 미완성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플레이 가능 버전이 만들어진 건 모두에게 큰 의미였다. 캐릭터는 양쪽에 두 명씩 배치되었고, 간단한 로컬 멀티플레이도 가능하게끔 구성되었다.


발표회 날, 각 동아리별로 준비한 작품들이 교실 곳곳에 전시됐다. 퀘스트메이커 부스에는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몰려왔다. 그 중 대부분이 호기심에서 왔다가, 짧은 시연을 즐기며 생각보다 재밌다며 웃었다.


“오, 이거 진짜 내가 조작하는 거네! 공이 막 튕겨 나간다.”

“귀여운데? 배구 게임이라니 신선하네.”

“근데 점프 타이밍이 좀 어려워. 잘 맞춰야 스파이크가 되네.”


군데군데 버그도 튀어나왔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꽤 긍정적이었다. 철인은 어설픈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코드를 누군가 즐기는 모습을 보고 큰 뿌듯함을 느꼈다. 운동으로 박수받던 경험과는 또 다른, 두근거리는 기쁨이었다.


그 순간, 뒤늦게 체육관 쪽에서 땀에 젖은 옷차림으로 걸어온 배구 코치가 부스 앞에 나타났다. 코치는 무심하게 전시 화면을 보다가 철인을 발견했다.


“어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너도 발표하러 온 거냐?”


철인은 괜히 움찔했지만, 그래도 당당히 말했다.


“네. 저희 동아리 프로젝트입니다.”

“배구 게임... 허, 그런 걸 만들 줄은 몰랐네.”


코치는 아예 자리에 앉아 철인이 만든 게임을 잠깐 해 봤다. 조작을 서툴러 공을 놓치기도 했지만, 꽤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거, 그래픽은 단순해도 배구 포지션이나 공격 타이밍 같은 건 나름 구현됐네. 잘 만들었어.”


코치는 헤드셋을 벗으며 작게 웃었다.


“나중에 제대로 완성하면 구단 홍보용으로 써도 되겠는데? 선수들도 틈틈이 하면 재미있겠다.”


철인은 그 말에 순간 ‘어, 이거 칭찬인가?’ 싶어 당황하면서도 기뻤다. 늘 운동장 안에서만 보던 코치가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인정해주는 상황이라니, 묘하게 어색하면서도 따뜻했다.


그렇게 첫 번째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철인의 고등학교 생활에도 점점 다양한 선택지들이 열렸다. 운동실력도 무시하지 못해, 간혹 정말로 배구는 안 할 거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학교 대표로 대회에 나가라는 권유도 받았다. 하지만 철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게임을 만드는 재미에 푹 빠진 뒤로, 마음 한편이 확실히 굳어져 있었다.


동아리 부원들과 함께 더 큰 규모의 게임을 기획해볼까, 아니면 프로그래밍 학원을 다니며 다른 엔진도 공부해볼까. 고민하던 찰나, 둘째 누나가 다시 한번 조언을 해줬다.


“너, 게임 만든다고 해서 배구랑 완전히 연을 끊을 필요는 없어. 그냥... 네 장점을 살려봐. 예를 들어 배구 관련 프로젝트를 더 발전시킨다든지.”

“응, 나도 사실 그게 조금씩 재미있어져.”

“만약 네가 진짜 제대로 된 배구 게임을 만들고 싶다면, 실제 프로 선수들이 어떻게 플레이하는지 연구 많이 해야 될걸? 언제든지 형이나 누나들한테 물어봐. 우리가 모션도 보여주고, 상황별 전술도 알려줄 수 있으니까.”


철인은 그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늘 듣기 싫었던 ‘배구’라는 말을, 이제는 오히려 스스로 찾아가서 배우고 싶게 만들다니.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시간은 흘러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으로 넘어가며 철인은 다양한 프로그래밍 대회나 해커톤, 공모전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학교 체육부가 후원하는 소규모 대회였는데, 철인은 다시 한번 배구 게임을 컨셉으로 기획안을 제출했다. 물론 여전히 3D 그래픽까지 구현하기엔 역부족이었지만, 그때마다 형과 누나들의 현장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서브는 스윙 각도가 굉장히 다양해. 단순히 타이밍만 맞추면 안 된다고.”

“블로킹할 때 수비 라인의 움직임을 생각해야지. 혼자 블로킹하면 의미가 없다고.”


철인은 이런 이야기들을 메모하고, 간단한 시뮬레이션 형태로 만들어 보았다. 학교 수준의 발표였음에도, 심사위원들은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단순한 캐릭터 움직임을 넘어 전술 요소까지 구현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며 호평했다. 그동안 한 번도 박수를 받지 못했던 영역에서 조금씩 자신감이 커져 갔다.


물론 주변에서 실제로 운동해서 대표 팀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이 아예 끊긴 건 아니었다. 집안에서도 형과 누나들이 시즌 중 활약할 때마다, 넷째인 철인을 향해 너도 운동장에선 최고가 될 수 있어 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철인은 스스로 확신했다.


‘난 배구공을 손에 쥐고 코트 위를 뛰는 것보다, 키보드를 치고 게임 세상을 만드는 쪽이 더 좋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학교 게시판에 ‘게임 개발 관련 대학 설명회’ 안내문이 붙었다. 철인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설명회에 참가했다. 요즘은 게임 학과가 꽤 인기가 많아서 경쟁도 치열하다고 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 길로 철인은 담임 선생님과 진로 상담을 하고, 전형 방법이나 포트폴리오 준비를 시작했다. 동아리에서 만들었던 작은 프로젝트와, 실제 스포츠를 모델링했던 간단한 시뮬레이션 등을 정리해 자료를 만들었다. 지원서를 써 내려갈 때마다, 과거에 애써 외면했던 배구가 묘하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고등학교 최종 시험을 마치고 나서야, 철인은 형과 누나에게 슬며시 털어놓았다. 자신이 게임 개발 관련 학과에 진학하고 싶어 한다고. 그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오히려 큰형은 너 어릴 때부터 게임만 하면 정신없이 재밌어 했잖아. 뭐든 열정을 기울이면 결국 해낼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받아주었다. 그동안 배구 안 하냐?만 물어대던 가족이, 이제는 철인의 다른 길을 응원해 준다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입시가 끝나고, 철인은 대학교 합격 소식을 들었다. 주변 친구들은 체육 대학으로, 일반 경영 학과로, 각자 다양한 길로 흩어졌지만, 철인은 그토록 원하던 게임 개발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되었다. 입학식을 앞둔 밤, 방에 혼자 앉아 그동안의 과정을 되돌아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고등학교 시절, 진짜 재밌었지. 배구를 피하러 동아리 복도를 헤매다가, 이렇게 새로운 길을 찾게 될 줄이야...’


혹시 모른다. 언젠간 철인이 직접 만든 배구 게임이, 형과 누나가 뛰는 프로리그에서 공식 홍보용으로 사용될 날이 올지도. 그 게임속의 인기 캐릭터가 바로 형이나 누나가들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보다 훨씬 더 거대한 게임 프로젝트를 완성할지도.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치 않았지만, 적어도 그 길을 걸어갈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필요한 일이 있다면, 가족들 역시 기꺼이 힘이 되어 줄 것이었다. 덕분에 어깨가 든든했다.


어두운 창밖으론 도시의 불빛이 번쩍였고, 철인의 모니터 위에는 동아리 시절 만든 게임 폴더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뭔가 더 새롭게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일은 다시 코드를 켜고, 부족했던 부분을 조금씩 개선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 찾아낸 꿈을 향해 철인은 한 걸음씩 나아갔다. ‘배구하자’는 소리를 매일 들어도 답답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씩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구가 미운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배구가 준 인연과 기회 덕분에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걸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철인이 배구와 게임이라는 두 길 사이에서 어떤 우연한 계기와 노력으로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순간부터 다시 시작될지도 몰랐다.


지금껏 달려온 길이 그 서막이었다면, 앞으로 펼쳐질 무대는 훨씬 넓고 다채로울 것이다. 비록 결말은 알 수 없더라도, 철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무대 위에 자신이 만들어갈 이야기는 분명 ‘나만의 색깔’을 가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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