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42
이준석을 떠올리며 상상하여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준석을 떠올리며 상상하여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선해준
제목: 선한악당
“안 했다고!”
해준은 무고했지만, 모든 걸 잃었다.
결국 아무것도 남겨진 게 없었다. 10년을 넘게 노력했던 조직에선 그에게 ‘죄인’이라는 낙인만 찍은 채 내버렸다.
“절대, 포기 안 합니다. 이 정도로 포기할 줄 알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만, 남자가 복수를 품으면 그건 삶의 신념이 되었다.
해준은 해사출신으로 잘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쭉 가면 해군출신 합참의장이 될 재목이라는 칭찬이 역력했다. 그러나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무고죄였다. 자신의 임신사실을 숨기고 배에 올랐던 모 중사에 의해서 중령이었던 해준은 강제 퇴역 됐다.
“아닙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떳떳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외친 해준은 자신의 무고를 주장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해군이 되는 건 포기했지만, 무고죄에서 승소해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는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짧은 터널일 줄 알았는데, 가다 보니 끝이 없는 거야. 주변은 다 떠나고 어둠만 남아서 결국 출구 없는 동굴인가 싶었지, 아니, 아무리 동굴이라도 다시 돌아가면 결국 나올 수 있어!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자. 돌아갈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을꺼니까. 앞을 뚫어야 했고, 결국 터널로 만든 거야!”
해준은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며 받았던 핍박에 대해서 떠올릴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무고를 들어주지 않는 이들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해군에게 물건을 공급하는 회사를 차리게 되고, 해군의 부조리를 역이용해 돈을 만지기 시작했다.
인천 남동공단 끝자락, 짙은 안개 사이로 간판도 없는 회색 건물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사 출신들이 은어처럼 ‘휴게소’라 부르는 곳이었다. 해준이 차에서 내리자 겨우 새벽 여섯 시, 알루미늄 셔터가 들썩이며 올라갔다.
“사장님, 먼길 고생하셨습니다.”
이상우, 해준의 동기이자 현재 재무실장. 그의 눈가엔 밤샘 기미가 염색처럼 스며 있었다.
“내부 점검은?”
상우는 무거운 서류가방을 내밀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 안에는 해군 함정에 납품될 소나 부품 샘플과 실물 테스트 성적서, 그리고 누군가의 결재 도장이 찍힌 구매 확정서가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우리가 준비한 건, 전부 통과됐답니다. 대신… 방사청 감사팀이 내일 예고 없이 뜬다네요.”
“예고가 떴다는 건 예고 없는 게 아니지.”
해준은 가방을 들어 건물 안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스프링클러가 부서진 천장, 지게차 궤도 자국으로 까맣게 그을린 바닥 일부러 흉물스러운 겉모습을 그대로 뒀다.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회사가 가장 강력한 보호막이었으니까.
창고 한가운데 창백한 형광등 아래, 해준이 USB 메모리를 꺼내 업무용 노트북에 꽂았다. 화면엔 납품 단가 테이블과 리베이트 지급 내역이 엉켜 숫자 폭풍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엔 ‘인력운용 특별비’라 적힌 암호화된 열도 섞여 있었다. 하나씩 클릭할 때마다 누군가의 비리와 직책, 통장번호가 램프처럼 빛났다.
“다들 민간인 되면 함께 나눠 먹을 생각으로 숨겨둔 파일들이지. 이제 우리가 쥐고 흔들 차례야.”
“사장님, 너무 급하게 움직이면 티가 납니다.”
“급해? 우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열 번은 죽어서 돌아왔어. 그러니 이번엔 끝장을 봐야 해.”
해준이 고개를 들었다. 창고 바깥으로 붉은 해가 막 솟고 있었다. 새벽안개가 물러가자 그의 눈에도 오래된 기억이 잠깐 어른거렸다. 초계함 갑판에 퍼지던 쇠비린내와 동틀녘 남해의 소금기, 그리고 법정에서 홀로 흘리던 씁쓸한 땀 냄새까지 분노로 얼룩진 한 사람의 비명이 메아리 치고 있었다.
“안 했어요! 하지 않았습니다!”
십여 년 전, 그의 목소리는 법정 천장을 쓸고 울렸다. 그러나 돌아온 건 정적과 비웃음뿐이었다. 그날 이후 해준은 ‘포기’란 단어를 두고 스스로와 협상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네 시 반, 창고 앞 도로에 군색한 색상의 밴 두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차량 문이 열리자 방위사업청 로고가 붙은 조끼를 입은 조사관들이 내렸다. 그들의 발걸음 사이로 윤활유 냄새가 비에 젖은 시멘트 냄새를 덮었다.
“특별감사반 김석주 단장입니다. 선 대표?”
해준은 출입증을 든 채로 검은 패딩을 여미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인사라고 할 것도 없이 김석주가 손목시계를 흘깃 보았다. 은색 바늘이 04:38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 말없는 초침 소리가 양쪽 귓전을 때리는 듯했다.
창고 안,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김석주는 노트북 화면을 사진 찍듯 훑어보고 재빨리 USB 단자를 봉인했다.
“민간업체 보안 규정, 알고 계시죠? 감사 중에는 외부 저장매체 금지입니다.”
해준은 미소를 지운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상우가 선반 위 상자를 내리다가 실수로 고무 패킹을 터뜨렸다. 낯선 화학 냄새가 퍼지자 조사관 일부가 기침을 했다.
“창고 환기부터 하시죠. 위험 물질이면 법적 문제입니다.”
김석주의 눈빛이 매서웠다. 해준은 상우를 한 번 봐준 뒤 직접 스위치를 찾아 천장 패널을 열었다. 팬이 돌며 먼지와 냄새가 뒤섞여 흩어졌다.
오전 아홉 시, 감사관실 임시 브리핑 룸. 권지원이 커다란 서류철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회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김석주에게 USB 하나를 내밀었다.
“단장님이 찾던 자료, 제가 어제 확보했습니다. 선 대표가 테이블에 놓고 간 거죠.”
김석주는 말없이 USB를 받아 노트북에 꽂았다. 파일 목록에 ‘SEA_TRUTH_01’이라는 폴더가 있었다. 그 안엔 지난 십 년 동안 해군과 사기업 사이에서 오간 회의 녹음, 메신저 캡처, 기밀 전자결재 문건이 빽빽했다.
“이 양이면 산업안보처까지 들썩이겠군.”
“그래서 더 조심하셔야죠. 진실만 보는 건 좋지만, 진실은 칼날이기도 합니다.”
권지원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분명했다. 떨림은 없었으나 조심은 있었다.
같은 시각, 남구로역 근처 낡은 오피스텔 11층. 불 꺼진 복도를 해준이 천천히 걸었다. 그가 문패 없는 1107호 앞에서 멈췄을 때, 철문 아래로 사진 한 장이 반 접힌 채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는 로프에 묶인 손목과 군번줄 하나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그리고 손목 위엔 검은 잉크로 숫자 세 자리가 새겨져 있었다. ‘451’라는 숫자였다.
해준은 사진을 집어 들고 묵묵히 주머니에 넣었다.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낡은 체인이 덜컹거렸다. 돌아보자 김석주가 서 있었다.
“모 중사를 찾으러 온 건가? 아니면 숨기러 온 건가?”
“단장님은 지금 감사 중이십니다. 사적인 추적은 직무 범위가 아니죠.”
“사적? 아니지. 너와 나 사이엔 아직 군법이 남아 있잖아.”
김석주가 한 걸음 다가섰다. 두 남자의 그림자가 복도 형광등 아래 겹쳤다. 해준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451, 그게 무슨 코드인지는 단장님도 아실 겁니다.”
“전투준비태세 보고서 번호. 그걸 왜 보여주지?”
“보고서를 조작한 사람이 누굽니까? 십 년 전 내 재판 기록을 다시 봐요. 거짓은 바다에 버려졌지만,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고.”
“자네가 좋아하던 말은 아니지 않은가?”
“좋아하게 되더라구요.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달라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아무도 듣지 못하던 내 목소리를 어느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습니까. 그저 위치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요.”
“허허. 자네 이런 사람이었나?”
“이렇게 만들어 주셔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씁쓸하다고 해야 할 지는 조금 더 보고 결정하죠.”
해준은 사진을 김석주에게 내밀었다. 김석주가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여다보자, 사진 뒷면에 낡은 네임펜으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군번줄을 따라가라.
오후 다섯 시, 서해합동작전사령부 구 문서보관고. 녹이 슨 지하 통로에 커다란 철문이 삼중 자물쇠로 봉인돼 있었다. 해준과 권지원, 그리고 상우가 서류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이곳까지 접근 허가 나오는 데만 반년 걸렸대죠?”
권지원이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래서 반년을 압축할 겁니다.”
해준이 금고형 키패드에 번호를 눌렀다. 451. 철문이 지하공기의 한숨 같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내부는 오래된 파일박스와 필름 릴, 그리고 군사재판 녹취 원본이 먼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상우가 손전등을 켜고 발밑을 비추었다. 그 순간, 구석에서 스프링이 튀는 금속음이 들렸다. 누군가 있었다.
“거기 멈춰!”
권지원이 권총 모양의 테이저를 겨누며 소리쳤다. 어둠 속 인물은 두 손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머리를 짧게 깎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목에는 해준이 잘 아는 군번줄이 빛났다.
“모… 중사?”
얼굴이 초췌했지만 눈동자엔 피하지 못한 후회가 가득했다. 모 중사는 텅 빈 웃음을 지으며 군번줄을 벗어 해준에게 건넸다.
“대표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중령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늦었지만 진실을 말하러 왔습니다.”
해준이 떨리는 손으로 군번줄을 받자, 금속판 뒤편이 비어 있었다. 판을 젖히자 마이크로 SD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모 중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날… 그 보고서는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난 서명만 했어요. 지시한 사람은 ‘451’을 만들어낸 그들이었죠.”
그녀의 시선 끝에는 김석주가 있었다. 언제 따라 들어왔는지 그는 문가에 기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모 중사, 그만하시오. 당신은 아직 군인 신분이야.”
“아니요, 단장님. 전 이제 증인이에요.”
모 중사가 한걸음 나아가자, 김석주의 손이 허리춤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권지원이 테이저 안전핀을 뽑았다.
“공용 총기사용 규칙, 단장님이 더 잘 아시겠죠.”
김석주가 숨을 삼키며 손을 들어 올렸다. 창고 같은 지하보관고 안에 압도적 정적이 내리꽂혔다.
“좋아, 증인 보호 절차 밟지. 하지만 진실이 모두를 살리는 건 아니야, 선해준.”
“살리진 못해도 썩은 고름은 도려내죠.”
해준은 SD카드를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문서보관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환풍기 소음이 먼지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어쩌면 그것은 바다 밑에서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함성 같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어둠 속에서도 문서 함에 새겨진 글귀가 또렷했다
-No Truth, No Honor.
해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진실을 건져 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게 너희들을 잠기게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