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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한 Aug 18. 2023

대한으로

웹소설 1-11화 

    1화     

“차라리 아무 기억도 없는 게 나을지도”     

해가 지어가고 있었다. 늑대와 개가 사냥을 나서는 시간이었다. 어둠이 밀려오고 있는 시간대였다. 서재에 앉아 혼자 주절거리는 재희였다. 잠시 잠들었는지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가 내려놓은 스마트폰에는 수많은 연락이 가득했다.      

‘전역 축하한다’, ‘이제 NASA로 가는 거냐?’ ‘너 짱 박는 줄’, ‘이제 한국 우주에 기여?’, ‘천재가 사회로 귀환했네’ 라는 무수한 메시지들이 있었지만 재희는 스마트폰을 돌려 그들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불렸던 재희였다. 군대에 제대하기 전에 이미 박사학위를 땄지만, 그는 일반 병사로 군대에 입대했다. 평범한 천재였다면 연구를 하든 논문을 쓰든 여러 이유로 군 입대 자체를 기피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재희는 달랐다.      

재희의 서재를 채운 자료만 해도 그랬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 여말선초라는 말 대신, 선말대초의 시대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가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자료들이 가득한 서재에서 재희는 어둠이 밀려들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쳐다보았다.     

재희에게는 꿈을 꿀 때마다 보이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 얼굴들을 어린 날의 어느 날 역사 속에서 비슷한 풍채를 품기는 사람들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절대 믿지 않을 기억이 재희에게 남아 있었다.      

세자로서의 기억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그의 이름은 ‘효명세자’였다. 치욕의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20년 동안 이루지 못한 개혁을 3년 동안 도전했던 어느 세자의 죽음 뒤 붙여진 시호였다.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밝은 자라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역사의 기억이 있어도 현재에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사람들에게 말해도 믿어주지도 않을 일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기억을 숨기고 현재에 적응했다. 그러나 기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불쑥 느껴지는 분노, 자신은 분명히 독살당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당시로 혹시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와 희망을 안고 그 시대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을 공부하다 보니 주변에선 재희를 천재라고 칭송했다. 그때마다 느껴지는 좌절감이 그를 성장시켰다. 아무리 알아도,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까, 자신의 죽음 이후에 무너지는 조선이 더 애처로웠다.      

어린 시절 만난 적 있었던 흥선군에 대한 기억도, 박규수에 대한 기억도, 그들의 행적이 적힌 역사의 기록을 볼 때마다 아려왔다.      

자신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이 된 고종에게도 애증의 마음이 들었다. 그런 세상을 물려줬던 자신이었으니까, 또 자신과 같은 형태로, 그러니 분명 독살당한 것이 분명한 아들 헌종에 대해 안타까움도 컸다.      

그래서 공부하고 또 공부했지만 그럴수록 지금의 이 능력으로 뭐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려만, 과거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아무것도 못 하니까 좌절감은 더 커졌고, 그런 좌절감은 또 운명처럼 재희를 성장시켰다.      

과거의 효명세자 시절에도 천재라 불렸던 재희는, 그 능력이 어디 가지 않고 한층 발전해 현대의 역사를 바꾸고 있었다. 과거의 실패를 통해 엄청난 좌절과 더불어 성장을 이뤄낸 것이었다.      

1950년대, 남과 북으로 나뉘어 군사 작전권이 넘어간 대한민국에서 평시 작전권이 환수 되고 이후에 전작권 환수도 이야기 되고 있는 시점에서 재희는 일반 병사였지만 누구보다 큰 활약을 통해 작권 계획을 짜는 것을 담당했다.      

이를 본 군사 작전 관련 담당자들은 그가 크게는 장자방, 제갈공명의 재림이며, 어쩌면 이순신의 환생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하면서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오죽하면 국방부 장관도 직접 찾아와 칭찬을 할 정도였고, 합참의장의 직권명령으로 그의 당직병이 되어 활약했다. 그리고 군 장교로서의 임용을 군 생활 동안 끊임없이 권유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이는 군 제대 전부터 수많은 연구기관으로부터 특히, 한국 밖 미국에서도 스카우트 제의는 끊기지 않았다. 재희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두 뛰어났다. 그가 그린 그림은 문화작품 ‘동궐도’를 남긴 효명세자의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는지 예술 가치가 뛰어났다. 오죽하면 미래의 노벨상은 모두 재희가 차지할 거란 말과 함께 모두 예약해놓았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그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재희의 씁쓸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알게 된 자신의 옛 기억, 자신이 효명세자의 환생이라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타임머신을 만들어서 그 시대로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에 대해 연구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더불어 다른 모든 이론을 적용해도, 자신이 새롭게 이론을 만들어도 타임머신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나간 시간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     

‘인간의 육체는 절대로 과거를 넘을 수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서재에 있던 자료들을 하나씩 떼어 낸다. 이제 더이상 과거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대한 미련과 죄책감과 좌절 때문에 했던 일들이 결국은 현재를 바꾸고 미래를 바꿨던 것처럼 이제는 지난 과거보단 미래를 보기로 했다. 그래서 미련도, 그리움도 오늘까지만 하기로 한 재희였다.      

자료들을 하나씩 떼어 내다 고종과 그의 아버지, 형의 모습을 서화가 눈에 마주친 재희였다. 고종, 광무제, 자신의 사후에 진행된 일이나 자신의 양자였던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이었고, 형은 친일파로 기록되어 있는 흥친왕 이재면이었다. 사실 그가 직접 나서 매국의 행위를 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아들 이준용의 매국 행위를 눈감아 준 게 컸다. 이준용도 처음에는 배일이었으나 어쩌다 친일파가 된 아이였다.     

그런 모든 행위가 마치 재희는 자신의 잘못 같았다. 자신이 세자인 시절에 개혁에 성공했다면 이렇게 나라가 어려워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비록 여러 일이 벌어지고 아직도 시대는 내면의 평화까지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그때 비해, 국화의 이름처럼 무궁하게 발전해왔고, 발전해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는 재희였다.     

자료를 정리하다가, 문득 방을 나가 지하로 내려간다. 자신이 개발해왔던 이동장치, 흔히 말하는 타임머신의 앞에 선 재희는 기계를 만져본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 얻은 결론,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그 결론을 다시 한번 넘어서 보려 한다. 분해 작업 중이었던 기계를 다시 조립해본다. 그때 연결되어있으면 안 되는 부분에 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다. 뭐지 싶어서 서둘러 전원을 끄려는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한동력도 아닌데, 전원이 연결되지 않은 장치에 불이 들어온 것이었다.      

천재라고 불렸던 효명세자의 실패, 그리고 다시 한번 천재라고 불리고 있었던 재희라는 이름으로도 이렇게 어이없게, 실패하고 마는 것인가, 서둘러 무언가를 해야 했다. 전원이 그냥 들어 올 리는 없다. 무언가 잘못됐는데, 서둘러 작동을 멈추려고 전원 버튼을 누르는데, 피곤하여 본 환상이었을까, 작동이 이제야 시작되었다. 순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사람들이 이런 스파크를 보았던 걸까, 소리보다 빠른 폭발의 열이 재희의 몸을 감싸 안았다.      

아프다는 신호보다 빠른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을까, 늦게서야 도착한 신호들을 받아든 것처럼 삐이익- 경적이 귓가에 맴돌았다. 반짝임에 늦었지만 감았던 두 눈을 뜨니 무언가 느껴지는 게 달랐다. 평소와는 다른 공기의 저항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도 들었다.      

재희가 눈을 떠 바라본 곳에는 조선의 왕좌, 음양의 조화를 그려놓은 일월오봉을 병풍으로 두고 있는 어좌가 있었다.      

재희는 서둘러 정신의 혼미를 방지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곳에선 그림에서 보았던 흥선대원군과 그의 아들 고종이 있었다. 처음엔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진으로 남아있던 모습에 두 사람의 모습을 단번에 기억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어이없게 과거로 오게 된건가, 하며 주변을 살피는데 흥선대원군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 말을 걸어온다. 자신을 재면이라 부르는 흥선대원군으로 인해 재희는 금방 상활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사고로 인해서이지만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과거로 오는 일에는 어찌어찌하여 성공한 것이었다. 자신이 재희가 아닌, 재면이 된 채로 인 듯 보였다. 보이는 시선으로는 알 수 없었으나 흥선대원군이 자신을 부르는 말과 고종이 자신을 부르는 말들로 지금 자신이 적어도 21세기에 살고 있는 재희도, 20세기에 살고 있는 효명세자도 아닌 게 확실했다.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부르는, 형과 아들, 이재면으로 회귀한 것이었다.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해야 했고, 정말로 자신이 이재면으로 환생, 아니 회귀한 것인지 확인도 해야만 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증명할 방법도 몰랐지만, 그래도 지금 흘러가고 있는 상황을 놓칠 수는 없었다.      

“멍청하게 서서 뭐하느냐”      

흥선대원군의 잔소리가 들렸다. 이게 꿈인지 볼도 꼬집어 보았다. 아프고 현실이었다.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과거로 돌아왔다. 자신이 원한 시간대에서는 많이 벗어났지만 어쩔 수 없다.      

한 번 이뤘으니 두 번은 못 하겠는가 싶었다. 그러려면 엄청난 기술이 필요한데 그건 자신의 머리에 있었고, 재료만 모아서 다시 시도해보면 됐다. 거기다 자신이 지금 스며든 것으로 보이는 이 몸은 비록 아무것도 안 해 친일파가 된 영흥왕 이회라는 인물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 다행이라 싶었다.      

자신이 과거로 오고자했던 이유를 비록 처음 목적한 시간대는 아니지만 여기서라도 진행하면 됐다. 자신은 이제 많은 것을 해서 기록 되어진 역사를 바꾸겠다고 생각했다. 그 짧은 시간에 여러 생각을 하는 재희는 가히 괜히 천재라는 칭호가 붙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선 시대를 파악했다.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마주하고 있는 시대에서 어느 시대인가 파악하는 시간을 보내야했다. 흥선대원군 집권기라면 일은 더 쉽게 흘러 갈 터였다. 지금 흥선대원군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허나 아쉽게도 그 이후의 시간대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시간대, 흥선대원군이 아주 잠시 권력을 다시 찾은 시간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서둘러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했다. 지난 과오를 씻을 기회를 그냥 두고 볼수는 없었다.     

노을이 깊게 지고 있는 하늘이었다. 자신과 흥선대원군은 궁을 나란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에게 누군가 다가와 청나라의 군대가 오고 있다는 말을 했다. 흥선대원군이 알겠다며 그를 보내자, 재희, 아니 재면은 그를 붙잡아 지금이 언제인지 묻자, 임오년, 하절기라는 말, 고종의 즉위 후 19년, 임오군란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재면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한 청나라 군대는 이홍장의 부하, 마건충과 오장경, 그리고 위안스카이로 많이 알려진 원세개일 것이다. 다른 마건충이나 오장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원세개는 조선의 발전에 큰 위해가 되는 인물이었다. 재면은 서둘러 앞서가는 흥선군을 잡았다. 흥선군의 자신의 옷깃을 붙잡는 재면의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가시면 안 됩니다 아버님”     

“무슨 소리냐”     

“지금 청나라의 군대로 가시려는 것 아닙니까? 가시면 안됩니다.”     

“그들이 이 조선에서 나에게 무슨 위해라도 가할 성싶으냐? 그러니 네가 아직 부족한 것이다. 우선 그들을 달래 돌려보내야 한다. 그러니 내가 가야지”     

재면은 흥선군을 막을 수 없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렇다면, 우선은 돌아오시기 전까지 제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 칙서를 내려주십시오”      

“뭐라? 금방 갔다 올 것인데 무슨! 무위 대장으로도 만족하지 않는 것이냐?”     

“소자의 큰 걱정을 덜기 위함입니다. 작은 일로 큰 걱정을 덜 수 있는 일이니 행하지 않음보다, 행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오니 넓은 아량과 지혜로 부디 살펴주시옵소서 아버님.”     

쳇, 하며 자신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흥선대원군은 시간이 없다며, 발걸음을 재촉했으나, 재면은 끝내 붙잡아 자신이 흥선대원군의 섭정의 대리가 되었음을 인정받았다. 흥선대원군은 곧장 청나라의 군대로 향했고 재면은 사람을 불러 위치를 알려주고, 그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라 명했다. 그 위치는 충추 목사가 거주 중인 장호원이었다.      

“지금쯤이면 서울은 벗어나 장호원으로 갔겠지. 미안하지만 그곳에서 죽어라 며느리야. 그게 내가 그린 조선의 미래를 위한 것이고, 더 나은 것이다.”     

재면이 일러 준 위치는 임오군란을 피해 중전 민씨가 숨어 있던 곳이었다. 이어 그는 조선의 칼잡이들을 모으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정리하였다.           


2화     

재면은 칼잡이들에게 그림을 주었다. 재면이 칼잡이에게 준 그림은 명성황후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재희의 기억 속에서 명성황후의 사진이라며 알려져 있는 많은 사진들이 있다. 모두 명성황후가 정확히 누군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로 궁궐에 준비된 사진 자료실로 지금의 명성황후의 사진을 확인한 재면이었다. 바로 보고 그대로 그려 칼잡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임오군란이 벌어진 후, 군란의 세력은 바로 중전 민씨를 척결하기 위해 움직였다. 청나라 군대를 불러왔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고 나라를 팔려고 한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었다.      

“민씨를 찾아 죽이자!”     

하지만 그들은 중전의 얼굴을 제대로 몰라 목전에서 중전 민씨를 놓쳤다. 이는 역사에서도 유명한 일화다. 당시 민씨는 궁녀 복장으로 갈아입고 궁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는데, 그만 임오군란의 세력과 마주치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홍재희라는 무예별감이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일어서는 기지를 발휘하며 자신의 누이라고 말하자 군란의 세력은 더이상 의심하지 않고 명성황후를 보내주었다.      

재면은 충성을 다할 뿐이었던 홍재희라는 인물이 홍계훈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이후에 훗날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 때 병사들을 이끌고 이를 진압하려다 실패하자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다가 이로도 힘들게 되자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는 장개를 올렸던 인물이었다.      

그전에는 척왜척양의 가치를 내건 백성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자 경군을 데리고 백성들을 폭력으로 진압한 인물이었다. 왕실에서 보면 충신이긴 했으나 재면의 입장에선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그저 입신양명에 양심도 신념도 팔아 재낀 나라를 망하는 쪽으로 걷게 한 인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거하는 대상으로 두어 그가 도운 명성황후와 함께 역사의 지름길로 안내해 제거하려 한다.     

“저희가 중전을 그냥 보내줬단 말씀입니까?”     

모인 칼잡이들을 보내고 옆에 있던 임오군란을 이끌었던 자가 재면에게 물었다.      

“너희의 죄가 아니다. 모름은 죄가 아니나, 알려고 하지 않는 건 죄다. 앞으로 조선은 많은 것들을 개혁해나갈 것이다.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피하지 않는 것으로 죄를 씻어라.”     

“예?”     

재면이 하는 말의 뜻을 지금은 알지 못하는 이들이기에 재면이 하는 얘기가 그저 어려울 뿐이었다. 재면은 그들에게 ‘곧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알고자 하지 않고 피하지 않는다면 다 알게 될 것이다.’ 말하였다.      

중전민씨를 죽이는데서 임오군란이 임오개혁이 되고, 나중에는 임오혁명으로 기록될 것임을 재면은 알았다. 조선의 개혁의 시작은 중전 민씨의 죽음으로 시작되며 공표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살려두는 것이 위험한 인물들은 많았기에 이 기회에 모두 제거하고자 했다. 칼을 잘 쓰는 자들을 뽑아 그들을 암살하러 보냈다.      

직접 가서 처리하는 게 가장 깔끔하고 뒷말이 적으나 지금 당장은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개혁과 혁명을 위한 준비를 철처히 준비해야했기 때문이었다.      

명성황후를 암살하기 위해 보낸 칼잡이는 총 일곱에 세 팀이었다. 이들은 각자에게 동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이 또한 재면의 계략 중 하나였다.      

중전민씨가 달아난 길을 우선 일러주었다. 첫길부터 추격에 들어간 간 팀이 있고, 중간의 지역부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착해 있을 지역까지 나누어 사람들을 보낸 재면이었다.      

처음으로 보낸 팀이 목적으로 하는 곳은 대궐과 그렇게 멀지 않은 화개동 사어였다. 윤태준이라는 집에 잠시 중전이 은거한 기록이 있었기에 여기서부터 중전 민씨가 제거가 되면 좋겠지만 실패할 수도 있어 팀을 나눠 보냈던 것이었다.      

칼잡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중전 민씨는 한양을 빠져나간 뒤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서로 연락하며 고향의 여주로 가고 있었다.      

이때 칼잡이들은 이근택이라는 인물도 살해하였는데, 실제의 역사에서 중전을 도와 장문오라는 인물이 임오군란의 세력이 이루지 못한 중전을 죽이는 일을 하려던 인물이었다. 갑자기 한양에서 내려온 귀부인을 의심해 앞장서서 습격하려던 때 이근택이 밀고해 황후를 대피시켰던 일이 있었다.      

장문오에게는 상을 주고, 이근택은 죽이는 선택을 한 재면이었다. 재면은 앞으로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자는 상을 주겠지만, 방해하는 자는 그게 누구든 없앨 생각이었다. 그 대상은 위도 없고, 아래도 없었다.      

만약 흥선대원군이나, 고종이 자신을 방해하는 인물이 되면, 가차없이 제거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어렵게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모르나, 하려는 일은 반드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자신의 친척을 살리기 위해 국고를 탕감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재면이 행하는 개혁에 강하게 반대할 사람도 제거하게 되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게 명성황후가 끝일지, 흥선대원군이나 고종도 그 대상이 될지 고민하는 재면이었다. 우선은 이용해 보고, 반하면 그때는 가차없이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칼잡이들이 산길로 충주로 향하고 있었다.     

“후, 그년 빠르게 도망쳤네”

“예! 이 사람아! 그년 이라니 그래도 이 나라의 국모인데!”

“국모는 무슨, 그럼 왜 도망을 치냐?”

“그건..”

“됐어, 우리는 우리 임무나 마치면 그만이야”     

세 사람은 날쎄게 산길과 어둠을 뚫고, 밤낮없이 달려 명성황후가 숨어든 국만산 아래 산골 촌마을에 들어섰다.      

촌마을에 이도령이라 불리는 이시영이라는 불리는 인물이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음식을 하며, 불을 크게 피우고, 정성을 쏟고 있었는데 그게 제 무덤을 파는 일이 될거라고 그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먹은 밥은 그가 생에 먹었던 밥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밥이었다. 중전 민씨를 위해 고기 반찬도 올리고, 크게 돈을 써 소도 잡고, 형평에 어긋난 최고의 대우를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떼갈 이 곱다고 했으니, 그는 떼갈 곱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끓인 국에 간이 맞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뚜겅을 열고 한참 간이 맞는지 확인을 하고 있을 때였다.      

“흐어, 뜨겁구만, 후, 후”     

그가 바람을 내뱉는 순간, 그의 목이 솥 안으로 잘려 들어갔다. 밖에서의 상황을 모르던 중전은 이 난세를 어떻게 헤쳐갈지 고민하고, 고종과 어떻게 연락을 이어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칼잡이들은 기름을 집에 두르고, 불을 지폈다. 그러나 놀란 집안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그 앞에는 원래는 밀사가 되어 고종을 만나 연락책이 됐던 윤태준이 죽어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 중전은 밖에서의 소란을 굳이 확인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밖으로 나가면 칼에 맞아 죽고, 안에서는 불에 타 죽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시영은 나중에 군수가 되어 근면하게 일해 선정을 베풀었지만, 지금의 재면의 계획안에 들지 않아 쓸쓸히 죽게 되는 운명이 되었다.      

충주목사 민옹식은 중전의 집안의 사람으로 원래대로라면 중전이 가야할 길이었으나 피난의 길이 길어지면서 피난지가 알려지게 되면 곤란해져 잠시 유보한 상태였는데, 재면이 보낸 관리에 의해 파직당하고 사약을 먹었다.      

중전이 묶고 있는 방안의 문이 열렸다. 집이 불타고 있어 밖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 진땀을 빼고 있는 칼잡이들이 천으로 가린 입으로 겨우겨우 중전을 보았다.     

불을 지피는 일까진 괜찮았으나 그 화력으로 인해 생기는 매스꺼운 연기와 뜨거운 열기는 그들이 중전의 죽음을 확인하게 하는 것에는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내 몫이 탐나느냐?”     

죽음을 앞뒀기 때문이었을까, 한 나라의 국모였기 때문이었을까, 그 당당한 모습에 기가 눌린 건 재면이 보낸 칼잡이 셋이었다.      

“닥쳐라! 네년이!! 네년 때문에!!”     

눈을 부라리며, 칼로 중전 민씨를 가리키며 금방이라도 달려들것처럼 분노의 포효를 보여주는 칼잡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바로 달려들진 못했다.     

불타고 있는 초갓집으로 달려들면 중전 민씨의 죽음을 앞당길 수 있었으나, 예정에 없었던 자신의 죽음도 함께 추가될 수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타고 있는 집은 이제 서서히 무너지기까지 하고 있었는데, 입은 옷은 볼품없고, 초라했지만 그 기품은 불타는 화염처럼 거세져 가는 중전 민씨의 모습이었다.      

그가 한발짝 나오려하자, 칼잡이 중에 한 명이 뒤에 매고 있던 활을 꺼내 중전을 겨냥한다.      

한 명이 말리며 활을 내려놓는다.      

“그래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소?”     

칼잡이들을 보며 중전은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는가”     

“뭐라? 우리가 참새고, 니는 봉황이라는 말이야?”     

칼잡이 한 명이 목소리를 키우자, 활을 내려놓게 만든 이가 진정시킨다.      

“맞는 말이지, 저분은 지금은 이러하지만, 이 나라의 어머니셨으니, 근데 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이꼴을 만드신 것 아니오!”     

불에 타는 초갓집 소리가 주변의 모든 소리를 잡아 먹고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네 사람의 얘기는 마치 바로 옆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잘 들렸다.      

“그래, 내가 조선의 국모다”     

칼잡이 중 하나가 다시, 활잡이가 되어 중전을 조준했다.      

“저년이 미쳤나봐”     

다른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치자, 활잡이가 그대로 화살을 꽂았다.      

중전이 살짝 미소지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은 중전의 마지막을 그렇게 기억했다.      

중전 민씨가 화살을 심장에 맞았다. 피가 쏟아졌으나, 불길에 금방 산화되는 모습이었다. 한발을 주저 앉아 넘어지듯 쓰러지다가 불타고 있는 기둥을 부여잡고 다시 일 어섰다. 화살 하나가 가슴에 꽂힌 채 였다.      

입에서는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중전이긴 하나 한 사람으로, 남자보다 약한 여자의 신체였지만 이 불길 속에 그녀는 결코 넘어서지도 않고, 자신을 죽이러 온 칼잡이들을 보았다.      

불길이 더욱 거세져 지붕이 무너지고, 기둥이 쓰러지면서 중전의 마지막모습은 화염속으로 사라졌다.      

칼잡이들도 놀라 집을 둘러싼 마당 밖으로 나왔고  곧장 혹시라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삼각편대로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화염 속에 무너지고 있는 초갓집 밖으로 살아 나온 사람은 없었다. 불길이 거세지고 있던 참에, 그래도 한 나라의 국모였던 중전의 죽음을 슬퍼하는건지,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칼잡이중 하나는 불새 하나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착각을 본다. 크게 울부짓으며, 불기둥을 만들어 하늘의 구름속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본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칼잡이의 모습을, 다른 칼잡이가 본다. 하늘 높은지 체감하려고 목이 꺾일 정도로 하늘을 보는 모습에 하늘을 보다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본다.      

“이봐 자네!! 그러다 목이 꺾여버릴걸세”     

중전과 중전을 도운 사람들과 초가집을 불태운 불씨가 빗물에 수그러 들고 있었다.      


3화     

재면은 재희였을 때의 기억과 효명세자였을 대의 기억을 토대로 향후 조선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하룻밤 사이에 정리했다. 청나라군과 함께 귀국한 김윤식이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입궁하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그를 급습해 죽였다.      

새벽, 아직 해가 뜨지 않았을 시간대에 궁으로 들어갔다. 재면은 흥선대원군이 고종에게 잠시 자신을 대리할 것이라는 말을 이미 들은 후였다.      

“아버님이 가시니, 이제 형님입니까?”     

돌돌 말은 두루마리를 무더기로 들고 온 재면을 향해 고종은 탄식하듯 소리쳤다. 재면은 곧장 두루마리를 펼쳐 고종이 잘 볼 수 있게 진열했다. 높은 빌딩 숲과 같은 그림들과 군대 배치도, 철도, 전기선, 군함부터 유람선과 더불어 한양을 토대로 만들어진 지도 위에 그려진 잡다한 많은 것들이 있었다. 고종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외세의 모습과 비슷해보였다.      

“이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전하께서도, 어느 정도 아시지 않습니까, 친히 외국에 배우기 위해 사람들을 파견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싫어서 제힘을 다 꺾어 놓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전하의 뜻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께서도 그게 이치에 맞음을 아실 것입니다. 다만 왕권의 강화와 전하를 위해서 정치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뀌었는지 여쭙고 싶군요. 이런 그림들은 또 무엇입니까”     

“전하와 같이 도모하고 싶은 미래입니다. 이건 그림이나, 이 그림들은 곧 실현될 것입니다. 이 지역은 외국들의 한양과 같은 서울의 모습들입니다”     

재면은 고종에게 자신이 그려온 그림들을 설명했다. 영국의 런던, 프랑스의 파리, 도이칠란트의 베를린, 미국의 워싱턴, 청의 북경 등의 모습들이었다. 재면이 그런 사진은 21세기의 모습들도 있었지만 고종이 실제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런 모습들이 정말 그 나라들의 모습들이란 말씀입니까? 말로는 들었지만 이렇게..”     

실로 엄청난 건축들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하고 위엄있어 보였다. 조선의 건물들이 초라하게 보여질 정도였다.      

“전하께서 파견하신 인사들이 돌아오면 직접 물어보시지요”     

“이런 모습을 왜 들고 오신 겁니까”     

고종이 재면에게 이 늦은 밤, 자신을 찾은 이유를 물었다. 재면은 그림속에 도시들과 더불어 조선의 미래를 그린 그림들을 꺼내며, 향후 조선을 이렇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기와 수도시설의 개설과 정비을 통한 토지개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교통시설 체계화와 더불어 화폐 및 조세 개혁과 군대를 정비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중에서 고종이 듣고도 믿지 못한 이야기는 군대를 크게 3군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육군과 해군은 당연한 것이었는데 공군이라는 개념은 듣도보도 못한 것이었다.      

“앞으로는 공군이 곧 전쟁의 양상을 결정지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아니, 듣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난다고요? 자동차라는 건 들어봤으나, 그 엔진을 통해 하늘을 날 수 있다고요?”     

해외에서 실험되고 있고, 곧 성공할 것이라는 말과 더불어 조선이 빠르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지를 정비하면서 미리 만들어 놓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대비할 수 있고 이는 조선이 곧 초강대국으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라는 말이었다.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얘기만 늘어놓는군요”     

“세상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이를 선도할 수 있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고종은 머리를 흔들며 외국이 아무리 뛰어난 군사력과 높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어찌 하늘을 날 것이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외국보다 더 낮은 기술을 가진 조선이 먼저 할 수 있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우선 옛것을 버려야합니다. 다만 이번 군란의 예를 잘 받들어야 합니다.”     

고종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겨우 자리 잡으려던 때, 아버지를 다시 불러왔고, 그 때문에 중전의 생사는 알 겨를이 없었다. 무능한 왕이란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불현듯 떠올랐다. 잠시 재면이 가지고 온 그림과 조선의 미래에 대한 구상에 홀린 듯이 이끌렸으나 문득 불쾌해진 마음을 애써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이오?”     

“이번에 이런 문제가 생긴 건 처우의 잘못입니다. 봉급이 밀리고 나눠준 쌀에서는 모래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구식의 군대를 몰아내는 신식 군대를 미워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처우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 모습에 화를 낸 것입니다. 우선 봉급을 더 이상 쌀이 아닌, 새로 발행한 화폐로 지급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했다.      

”국가에서는 직접 쌀을 구매하고, 조금 이자를 붙여 파는 방법으로 이익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 간의 거래와 시장을 허락하고, 사농공상이라는 개념을 타파하고, 모두가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 시장이 스스로 자라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국가는 지붕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형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선 쌀을 나눠주지 말라면서 쌀을 팔라는 건 결국 이중으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백성을 다스려야하는데 백성으로부터 돈을 받고 쌀을 팔라는 건 공자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고종은 재면의 말들을 유교라는 이름으로, 공자와 맹자라는 이름으로 행할 수 없는 것들이라며 반발했지만, 재면은 그런 말들을 반박했다.     

“백두산 정상에서 흐르는 물과 한라산 정상에서 흐르는 물은 같은 물입니까? 결국 바다로 흐르는 것은 같습니다만, 다른 물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살아가는 방법도 변해야합니다. 먼저 보여준 그림처럼 외국의 모습을 알고도 변하지 않음은 앞으로도 이렇게 살겠다는 얘기 밖에 안되겠으나”     

잠시 쉼을  가지고 계속 말했다.      

“그렇게 살아도 만족하고 좋으면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만, 우리 조선이 이렇게 살겠다고 해도 그렇게 살게 놔두지 않음은 이미 신미년과 병인년에 보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때 죽어간 백성들의 혼을 어여삐 여기셔서, 더 이상은 그런 피해가 나오지 않고, 잘 사는 나라가 무엇인지 무겁게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병인년과 신미년의 일을 얘기하자 고종이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건 내가 아닌! 아버님의 잘못입니다. 나는 문호를 개방하고자 하고 그럴려고 합니다!”     

“단순한 개방으로 안 됩니다. 안에서부터 전부 다, 하나도 남김없이 뜯어고치고 바로 세워야 합니다. 옛 삼봉 선생께서 하신 전국토의 문서를 불태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바로 잡았듯 그래야 합니다”     

고종과 재면의 실랑이는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사실 고종도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재면의 말이 옳다는 것을 하지만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이란 실로 어려운 법이었고, 특히 자신이 가진 권력은 노리는 자는 많지만 한 번도 자신의 입맛대로 써본 적도 없는 그런 권력이었다.      

허상과 같았다. 내 것이었지만 내 것이 아닌 그런 허상과 같은 것이 자신의 자리, 임금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고종이었다. 지금도 임금은 자신인데,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형이라고 하는 재면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고종에겐 깊은 고민을 주었다.      

“형님의 말씀대로, 이대로 바꾼다고 해도, 어떻게 바꿉니까, 조선이 왜 여태 안 바뀌었겠습니까? 그런 걸 어떻게 하루아침에 다 바꾼다는 말씀입니까? 삼봉이 조선을 열 때도 불교를 비판하며 금지하였지만, 조선에서 불교가 사라졌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임진년에 나라의 핍박을 받던 승려들이 오히려 은혜를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불교의 탐닉을 문제 삼은 거지 불교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님을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주상전하, 결정은 전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바꾸겠다고 결심하시면 제가 반드시 바꿀 수 있도록 옆에서, 성심껏 도울 것입니다”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다만 하룻밤에 결정할 일이 아니니, 깊이 고민해보겠으니 오늘은 그만 물러가세요,”     

고종의 침전에서 나오는 재면은 점점 어둠을 몰아내고 떠오르고 있는 태양 빛을 보았다. 하절기라 태양이 더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때쯤이면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의 군대에 납치당해 마산포로 끌려가고 있을 것이었다.      

또한 자신이 보낸 자객과 군대에 의해서 중전 민씨가 살해당했을 것이었다. 하나는 역사대로 흘러가고 있었고, 하나는 역사에 없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앞으로 역사에 없는 그런 일들을 기획하고 실천해 현실로 만들어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자신도 모르는 재면이었다.      

처음, 자신의 오래된 옛 기억인 효명세자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 노력에 대해서는 실패했고 50년 후의 세계로 왔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그런 장비들을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조선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놓으면 다시 시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우선 자신 앞에 놓여진 시련들을 먼저 극복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는 고종이 허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구상을 실천하기 위해 그에 맞는 사람들을 부르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분제의 폐지와 더불어 과학과 문화와 예술을 위한 투자와 대학설립등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각 준비까지 한다. 고종에게 헌사한 그림에도 외국의 의회제도에 대해서, 입헌군주국에 대해서 있었다. 우선 중요한 부분은 그런 부분이 아니기에 짧게 끝냈지만 분명 필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밤사이에 그저 대화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미 삼사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에 이르기 부족한 언론을 만드는 일에는 고종도 동의했다. 재면은 우선 국가적으로 운영하는 언론과 더불어 사농공상을 폐지하고, 노비제도 폐지를 시점으로 사적으로 운영하는 언론사들도 만들려고 계획했다.      

우선 이 언론사를 운영할 자금이 있는 상단을 물색해야 했다. 역사에 기록된 사실들은 자신이 웬만하면 알고 있었으나 이 시대에 자세한 내막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면서 흥선대원군의 집에서 노역하기도 했던, 훗날 동학농민운동으로 알려진, 고부 봉기의 주도자 중 한 명이자 녹두장군이라 불리는 정봉준을 만나려 수소문했다.      

일본군이 임오군란의 피해를 배상하라는 요구를 해오고 있었다. 재면은 배상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며 집으로 역사 속 갑신정변의 주역자들을 불렀다. 박영효와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홍영식 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실종되자 재면은 대리권자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래 재면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이 모이자 재면은 고종에게 보여줬던 그림 중 일부를 보여준다. 그중에서 이를 알아보는 자도 있었다. 재면은 너희가 이제 곧 조선의 중심이 될 그것이라는 말을 한다. 자신이 구상한 조선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고 준비하라고 한다.      

“이런 것들을 갑자기 보여주시면서 준비하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재면이 그 말을 듣고, 모인 사람들에게 각자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를 나눠주었다.      

“너희에게 각자 할 일을 적어 놓았다. 나는 청국으로 가야할 일이 있으니 이 적힌 대로 행하고 있으면 몇 달 후 내가 돌아올 것이다. 부탁한다.”     

“합하, 이런, 것을 갑자기.. 거기다 궁이 아닌 이런 곳에서”     

재면이 이들을 부른 곳은 자신의 집도 아니었고, 궁도 아니었고, 육조의 거리에서 조금은 떨어진 어느 곳이었다. 현대에는 조계사가 있는 곳이며, 2년 후, 갑신정변의 해에 개국하는 우정총국이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실제로 갑신정변이 시작되었던 곳이었다. 아직은 세워지기 전이었기에 그들은 이 사실을 몰랐고, 재면은 갑신정변과 같은 일을 삼일천하로 끝내고 싶지도 않았다.                               

4화     

삼일천하라는 오명을 남긴 이들에게 미션을 전해주고 청으로 갈 준비를 마친 재면이었다. 그들은 재면에게 받은 두루마리 속의 내용을 살펴보고는 놀란 눈빛으로 재면을 보았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너희와 내가 같이 꾸게 될 꿈이다.”     

그들은 재면이 앞으로 조선에서 만들 새로운 세상을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반응은 알지는 못하지만, 흡사, 여말선초의 시대, 정도전이 구상한 새로운 나라에 대한 의견을 들은 이성계나 이방원의 반응과 같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정몽주와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개혁을 꿈꾸는 갑신정변의 핵심주력자들인 저들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 재면이었다.      

“하지만, 작금의 조선에서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입니까? 이런 꿈을 꾸는 자체가 역모가 아닙니까..”     

걱정이 가득한 질문이었다. 역모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재면이었다. 왕권의 시대는 민주주의 시대의 관점으로 봤을 때 분명한 독재의 권력이니까, 그러나 재면이 보고 온 시대에는 그런 것이 당연한 시대였고 세계가 그렇게 변한 시대였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왔던 재면은 당연히 그런 시대로 흘러갈 것이고 그걸 조금 더 앞당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재면이 마주한 이 다섯 인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나 꿈을 꾸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 것이다.”     

이 중에서 어쩌면 정몽주와 같이 조선이란 새로운 나라가 아닌, 고려에서 개혁에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삼봉 정도전을 만난 포은 정몽주는 그 뜻과 생각에 공감했지만, 방법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려 충신의 입장으로, 정도전을 제거하려고 했다.      

어쩌면 이들 중에도 그런 인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 역사에서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몰락했기에 다른 역사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두렵지 않습니까? 이런 꿈을 꾸는 자체만으로,,”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박영효였다. 그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작금의 조선이 변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어도 어떻게 변해야할지 이렇게 구체적인 방법까진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다는 말은, 왕까지도 포함한 말입니까?”     

“두려우나, 용기내는 것이다. 만들 수 있을 때까지 만들 것이다. 모두가 주인되는 나라가 온다면 그때 백성들이 결정할 것이다. 왕의 필요성마저도”     

그들은 오늘 나눈 대화를 어딘가로 흘리지 않을 것이다. 감히 꺼내는 것조차 역모가 되는 세상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떠나는 일행이었다. 재면은 자신의 다음 단계를 위해 바다를 건너 청으로 향했고, 서재필과 박영효와 서광범, 김옥균 홍영식은 재면이 내린 개인 명령을 실천하고자 했다.      

부호군 홍영식은 이제 막 성균관을 졸업한 서재필과 함께 재면의 명령대로 군편제 방안에 관해서 연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았다. 서재필은 언론에 관해서 연구하며 독립신문 창간을 준비한다. 그리고 홍영식은 새롭게 다가올 세상을 위해서 신분의 높고 낮음이 아닌 실력으로 승진을 하는 제도를 연구하며 새로운 편제를 준비했다.      

이어 재면이 일러준 위치에 군대를 나눠 배치할 영역과 이를 소통하는 우편제도의 기틀을 잡았다. 그 외에도 재면이 일러준 대로 일을 처리하였다.      

영의정에 머물렀던 아버지를 통해 필요한 인재와 접촉하고 재면이 일러준 대로 그들 중 개혁인사를 찾아내었다. 재면이 일러준 인물들 위주로 찾아보았는데 그 중에 김규식과 이회영 같은 인물이 있었다.      

서광범은 갖가지 교육제도에 대해서 손보기 시작했다. 특히 재판 제도와 형벌의 개혁과 법학 교육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그는 박영효와 부르진 않았으나 재면이 언급하기도 한 유길준, 김윤식, 김홍집, 그리고 김옥균과 함께 단발령 도입에 관해서 연구했다.      

김옥균은 재면을 따라 청으로 가게 됐다. 김옥균과 재면의 관계는 살펴보면 재밌었다. 재면이 효명세자 시절 개화의 꿈을 위해 등용한 인물이 박규수라는 인물이었는데, 이 박규수는 어렸을 때 먼저 만난 후 몇 년 후에 과거에 급제한 후 효명세자의 측근이 되었다.      

재면도 이를 기억하고 있는데, 그 박규수에게 개화사상의 영향을 준 사람이 역관, 즉 외교관이었던 오경석이라는 이물이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3년전에 죽었는데, 만약 아직 살아있었다면 재면은 오경석을 분명히 중히 썼을 것이다. 그런 오경석의 제자가 바로,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등 이었다.      

이제는 바뀌겠지만 재면이 기억하는 역사 속에서 고종이 승하했던 1919년, 장례식을 빌미로 삼아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전파하며 대한의 독립을 선포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이 바로 오경석의 아들이었다.      

재면은 이번 청으로 가는 길에 오세창과 김옥균과 더불어 개화파들 인물이었다. 재면이 청으로 가는 배에 오를 때, 김옥균이 그에게 다가왔다.     

“전에 주셨던 내용은 가져가 다 읽어보았습니다.”
 

배의 난간에서 푸른 바다를 쳐다보며 김옥균의 얼굴을 한 번 보다 다시 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쳐다보는 재면이었다.      

“바꾸겠다 생각했고, 어느 정도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합하께서 보여주신 세상은 아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이 배에 탔는가?”     

“이왕 바꾸는 것, 확실히 바꾸면 좋겠다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배에 탄 개화파들 가운데 한 명이 재면에게 인사를 건넸다. 김옥균도 그에게 인사를 했다. 우봉 이씨 완용이었다.      

재면은 서로 일면이 있는 완용과 옥균을 인사시킨 후, 배에 탄 사람들끼리도 인사를 시켰다. 일주일 정도는 어쩔 수 없이 한배를 탄 사람들이기에 잘 지내보자고, 그리고 이후에도 잘해보자는 말이었다.      

재면은 배에서도 계속 글과 그림을 그렸다. 이번엔 한자가 아닌 외국의 말들도 함께 썼다. 개중에는 해외의 문물을 이미 접한 사람들은 재면의 실력을 보고 놀라워했다. 마치 한 개인이 모든 나라의 말을 통달한 느낌이었고, 쓰는 속도가 빠른 데 비해서 글의 모양도 예쁜 것이 맟치 한석봉이 재림한 것만 같았다.      

“합하께서는 어찌 이런 능력을 지금껏 숨겨오셨습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누군가 말했다. 김옥균과 이완용을 중심으로 모두가 대답을 기다렸다.      

“때가 맞은 것이지, 순리를 따랐을 뿐이다.”     

배는 밤에도, 낮에도 멈춤 없이 나아갔다. 높은 파도 하나 만나지 않고 단숨에 청의 영해에 다았다. 얼마안가 마침내 항구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도시는 톈진이었다.      

재면은 데려온 사람들과 역관들에게 임무를 나누어주고 자신은 보정부로 향했다. 대원군은 자신을 찾아온 재면을 보고 놀라 자신이 쓴 편지가 벌써 당도한 것이냐 물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버님, 이제 저와 다시 조선으로 가시면 됩니다, 허나 약조를 하나 해주십시오”     

대원군은 처음 봤을 때 비해 살이 쭉 빠져 있었다. 한 나라의 아버지이기에 대국 청에서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겠지만 스스로 처한 상황이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청 장수 오장경과 마건충과 군사문제에 대한 회담을 하던 중에 갑자기 "오늘 밤 남양만에서 배를 타고 톈진에 가서 황제의 유지를 받아야 한다"며 강제로 배에 태워진 후 납치되었으니 그 심정이 이루 설명하기 어려웠다.      

“주상이 나를 데리고 오라고 시킨 것이냐?”

“전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다만 앞으로 모든 일에 제 뜻에 따라주겠다고 약조하십시오”     

재면은 우선은 아들이 아버지를 걱정해 청에 왔다는 것을 명분을 삼으려 했다. 그리고 청에서 외국의 대사들을 만나려고 했다.      

조선에 있는 대사들은 아무래도 청에 있는 대사들에 비해서 본국에서 힘이 약할 것이고 척화와 쇄국의 정책도 있고해서 아예 파견하지 않은 나라들도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에 있는 대사들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만약 흥선대원군이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느다면 이미 명분은 썼기 때문에 굳이 그럴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일이 벌어지는 진도에 따라서는 고종도 밀어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재면이었기에 자신이 이룩하려는 조선을 강한 대국으로 만들기 위한 길에서는 한 사람의 운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저 그 길로 가기 위한 장기 말들이었다. 스스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약조하마, 내 네가 시킨대로 다할 것이다. 네 말대로 아무 방편없이 이놈들을 만나러 오지 않았어야했다. 내가 늙어 사리판단을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매우 지친 눈으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어린아이의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인 재면의 손을 두 손으로 꽉 붙잡은 채 애걸하듯 말했다. 재면은 그런 흥선군이 가여워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자신의 뜻대로 한다니 지금으로선 흥선대원군을 내칠 이유는 없었다.      

“이곳에 조금 머무르다 조선으로 갈 것입니다. 때가 되면 일러주겠습니다.”     

“이곳에 더 있는다고? 바로 가는 것이 아니더냐?”     

“이곳에서 외국의 대사들을 만날 것입니다.”     

“뭐라?? 외국의 대사들을 만나?! 너는 나를 부정하려 드는 것이냐? 어찌 내가 서양놈들을 만난다는 것이냐?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정녕 이유를 모르느냐?”     

재면은 조금전까지 애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채로 자신에게 호통치는 흥선대원군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버님, 제 뜻대로 따라주시기로 하신 것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재면의 말에 흥선군이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재면을 보았다.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 시킨 것만 그대로 하던 재면이 아니었다.      

마치 한 수 앞을 내다본 것처럼 자신에게 갑자기 청나라의 장군을 만나지 말라며 말했던 모습이며,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맘치 자신이 이곳에 연행될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준비해온 것이며,      

그를 빌미 삼아 청국에 있는 타국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일까지도 예사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일에 반하는 일이었지만, 우선은 재면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 것이냐”     

“길어도 계절이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재면은 흥선대원군을 안심시킨 이후에 자신이 보낸 역관이 보고해오자, 곧장 움직였다. 처음으로 그가 만난 나라의 대사는 조선에서는 불란서라고 불리는 프랑스였다. 그는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나갔다.      

청나라에 세워진 천주교회에서 만나는 두 사람이었다. 대사가 들어오자 재면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대사가 반가워하며 손을 내밀었고, 재면이 이를 잡으며 끌어안고 프랑스식 인사를 했다. 그러자 놀란 반응을 보였다.      

“오, 이런 인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반갑습니다. 루이드 제 오프 루아 대사님이시죠?”     

재면은 통역 없이 바로 불어를 하며 인사를 하자, 루이드가 놀라서 매우 화색 된 얼굴로 재면을 반가워했다.      

“오, 놀라운 솜씨군요. 청에 와서 한 번도 이런 프랑스어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잘하는 느낌이시군요?”     

“이 정도는 불어를 배운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오, 정말 놀랍군요.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렇습니까?”                                         


5화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렇습니까?”     

루이드에게 조선은 낯선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재면이었다. 몇 해 전 정확히 4년 전에 조선과 얽힌 적이 있는 루이드라는 것을 재면은 알았다.      

리델 펠릭스 클레르 선교사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천주교도 학살에 관련한 이야기였다. 분노한 민중들과 그런 화살을 돌려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던 조선 조정의 희생양이었다.      

왕권을 세우려던 백 년 가까이 진행된 천주교도 학살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위해 조선으로 들어온 많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리델도 선교를 위해 조선에 들어온 일행 중에 하나였는데, 살아 돌아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병인박해의 피해자 중 하나였다.      

그를 구출한 것이 바로 루이드였기에 그에게 조선은 그리 좋은 나라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재면을 만나러 온 것은 재면이 편지 속에 재미난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에게 배우고 싶은 것들이 많으시다고 하시면서 프랑스에 대해서 이미 많이 아시는 것이 많아 흥미로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우리 프랑스에 대해서 잘 아시는 거지요? 그러면서 배우고 싶다고 하는 것들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프랑스는 현재, 영국과 더불어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나라이면서 공화정을 이루고 있는 국가이지 않습니까? 비록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원수와 같은 프로이센에게 패한 후, 독일 제국이 선언되는 치욕을 겪었지만,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프랑스 대사의 표정이 일그러짐을 재면도 놓치지 않았다. 자국의 역사의 치부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할양한 알자스-로렌 지방의 오랜 역사는 뼈아픈 이야기입니다. 예전 나폴레옹 황제께서 계실 때는 감히 함부로 덤비지도 못했던 약소국에게 패한 설움과 표트르 대제 때의 위용은 프랑스의 자랑입니다.”     

재면은 자신이 그린 그림 중 여성이 그려진 그림을 가리켰다.      

“잔다르크와 같은 영웅의 끈질긴 투쟁심으로,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꿈을 이룬 나라인데, 무너진 자존심이라도 아직 그 불씨가 꺼지지 않았고, 실제로 이렇게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으니 감히 본받고 싶은 모습이 가득합니다.”     

서재에 책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특히 빅토르 위고와 같은 인물들을 배출한 위대한 나라가 프랑스가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대국으로 부상 중인 미국도 사실 모두, 프랑스가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현재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선물한 여신상도 프랑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사는 프랑스에 역사를 대해서 이야기하는 재면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조선에 이렇게 학식이 깊은 인물들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교인지 불교인지 동양이 예전부터 품었던 내용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이야 많겠지만 서양의 역사를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좀처럼 찾기 쉬운 게 아니었다. 거기다 저 말을 자국어가 아닌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프랑스어로 자유롭게 구사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마치 처음부터 프랑스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자라나고 프랑스에 계속 살아갈 사람과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는 프랑스 대사였다.      

“그렇습니다. 우리 프랑스는 위대한 나라이죠.”     

“그런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본론을 꺼내지는 않았다. 처음엔 차를 마시면서 프랑스에 대한 칭찬을, 다음에 만났을 때는 프랑스 요리를 먹고, 조선 음식을 대접하고 그렇게 몇 번울 조우했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독일 제국과 더불어 영국, 미국, 러시아와 같은 여러 국가의 대사들과도 만났다.      

김옥균와 이완용을 필두로 하여 데려온 개화파들을 이용했다. 한 번은 청나라가 재면의 움직임을 살피다 밖으로 나서는 재면을 막아서는 일이 있었다.      

“가시지 못합니다”     

청나라의 병사가 창으로 재면의 길을 막아섰다. 재면은 창을 손으로 밀어내려 보려 했다. 그러자 병사보다 높은 수문장쯤으로 되어 보이는 자가 재면의 목에 칼을 겨눴다.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재면의 활동이 심상치 않자, 청나라가 직접 제재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때 영국의 대사가 재면을 찾아왔다. 이번이 네 번째 쯤 되는 만남이었다.      

그들은 재면의 일행이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제국과 같은 나라들의 대사가 재면을 찾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곧장 재면을 이유 없이 역류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청나라에 항의했다. 이후 병사들은 소수 인원만 남기고 물러나 역류가 풀렸다.      

각 국가의 대사들은 서로 재면을 만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다른 나라들이 그를 만나는 모습을 보자, 불안해진 측면도 있었고, 그가 본국을 이해하고 있는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생기기 마련인 향수병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재면이 빠르게 그려내는 그림은 마치 본국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만했다.      

재면을 만나고 있는 영국대사가 수백 년의 역사가 한 번에 어울려진 런던 시내의 모습, 템스강에 런던 교의 모습을 보고 환호 했다. 대사는 자국의 그리움을 사실 이방인인 재면에게 풀고 있었다.      

“그대는 어쩌면 나보다 대영제국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 같소만”     

대사가 흡족한 표정으로 재면이 건네준 그림을 받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느낌으로 말했다.      

“어찌 그러겠습니까, 다만, 대영제국이 청나라에 대한 품은 마음은 저도 잘 압니다”     

재면과 대사들의 대화는 대부분이 평범했으나 그중에 은연하게 드러나는 재면의 야심이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그들에게 조선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 펼쳐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대사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재면을 다른 나라 대사들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마치 타로카드의 15번을 차지 하고있는 악마와 같은 재면이었다. 매혹적인 유혹이었고, 피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마음이오? 그대가 아무리 대영제국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해도, 나보다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건 실례가 되는 말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실수를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드린 말씀이었는데, 없던 말로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사.”     

“아니, 이보시오, 하려던 말은 어디 끝까지 들어 보는 게 신사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얘기는 마저 해보시죠, 들으라고 있는 귀인데, 어찌 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저는 그저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얘기하는 거라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지적하여 고쳐주십시오. 그저 저는 최근에 대영제국이 청나라와 소통을 하려고 물밑 작업을 하는 걸 청나라에서 일하기도 하지만, 포르투갈인이자 대주교 이기도 한 구베아 대주교가 막고 있는 사실이 안타까워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하하하, 그대는 어찌 그런 내막까지 알고 있는 것입니까?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마치 미래마저도 알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언가라도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저, 미천한 능력으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상상할 뿐입니다. 제게는 사실 아주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다만 제 스스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 어찌 이룰지 늘 밤새 고민하고 있습니다”     

“허허, 그게 무엇이오. 마치 내가 그 꿈을 들어주면, 그대는 청나라와 우리 영국이 이어지는 걸 도와준다는 말처럼 들리니 당연히 묻게 됩니다.”     

“조선의 백성들이 지금보다 훨씬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계획은 있는데 실천한 밑거름이 부족합니다. 그런 부분들이 걱정입니다. 혹시 대영제국이 도와준다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미천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제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이 도와주기로 했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에서 도와준다면 제 미천한 꿈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있겠죠”     

영국대사의 표정이 의심과 불안, 그리고 확신이 섞여진 채로 확장된 동공으로 재면을 담고 있었다.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의 도움도 같이 받는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면서 또 영국에게 도와달라고 말을 한다.      

무슨 경우인지 재면의 알 수 없는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대사의 눈에는 그저 너털웃음을 짓는 재면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른 대국들이 이미 큰 도움을 주고 있으니, 우리 대영제국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이는군요”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재면이었다. 긴 얘기 끝에 식어버린 차를 보며, 하인에게 다시 차를 데워 오라고 시킨다. 그러자 자신은 됐다고 손짓하며, 불편해진 자리를 뜰 생각을 하는 영국대사였다.      

“그들에게 제가 약조한 것은 청나라를 칠 명분입니다”     

일어서려던 대사가 재면을 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조선의 속담을 아는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한 껏 템포를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청나라를 칠 명분이요?”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영국 빼고 러시아와, 프랑스와, 독일이 청나라를 꿀꺽하는 것이었다. 지난 아편전쟁도 어찌하여 억지로 만들어낸 명분이었다. 전쟁에 승리해 아편을 팔면서 이득을 보긴 했으나 덕분에 다른 곳에서의 이득을 보지 못하게 된 영국이었다.      

프랑스 하면 미국을 생각하며 아직도 치가 떨린다. 그런 나라들이 움직이는데 영국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지금 자신이 영국 대사로 있는 도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절대로 안되었다. 할거면 제일 먼저 처음 나서야지, 아무것도 못하거나 제일 늦는 건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조선은 독립을 원합니다”     

영국대사로써는 그리 달갑지 않은 소리였다. 독립이라는 말은 그랬다. 아일랜드와 인도가 들을까 봐 겁나는 얘기였다. 거기다 미국이라는 뼈아픈 역사가 시려오는 말이었다.      

“그게 어찌, 영국에 도움이 되는 일일 수 있습니까?”     

“대영 제국은 이 조선보다, 청을, 또 일본 제국을 더 좋아하는 것을 압니다.”     

아니다 부정해 보지만 사실인 이야기였다. 굳이 삼국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청일 것이고, 청이 아니라면 일본이었다. 조선처럼 아직 문화라는 개념 자체도 모르는, 대영제국의 입장에선 미개한 나라는 별 볼 일 없었다. 그래서 재면이 신기했던 것이었다. 그런 나라에서 어찌 이런 인재가 나왔을까, 처음엔 마치 동양의 셰익스피어라도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청나라보다, 일본제국보다 더욱 가능성을 가진 나라입니다. 이제 두 나라보다 다소 늦었지만 청의 제후국의 위치에서 벗어나 새롭게 거듭날 것입니다. 이미 조선 내에서는 준비 중이며,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실제로 대사도 들었다. 청나라에 있으니 주변에 관련한 보고를 듣고 거기서 자료를 추려 본국에 다시 마지막으로 보고 하는 게 자신의 위치였던 영국대사였다. 조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조짐이라는 보고를 들었다. 임오개혁이 성공하고, 대대적인 변화를 기획중이라고 했다.      

허나 그 정도가 가히 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나라를 뒤집어 새롭게 개국하는 정도이기에 가능성은 없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런 내용을 말하는 재면을 보고 대사는 어쩌면 그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만약 그런 보고만 들었으면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었다. 청나라에 제후국은 많으니까, 청 조차도 개혁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제후국들은 더 그럴 것이라고, 예외로 일본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자신의 앞에 웃으며 얘기하고 있는 이 재면이라는 사람은 달랐다.      

자신이 본 최고의 천재였다. 아마 본국의 사람이라면 훗날 분명히 총리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6화     

“조선은 나아갈 것입니다”     

재면의 말을 듣는 대사들마다 물었다. 어떤 식으로 나아간단 말인가라는 모두가 공통된 질문이었다. 이쯤 왔으면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재면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포르투갈, 독일 등 대사들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청은 내정에 간섭을 노골적으로 들어내고 있습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란 억지스러운 조약을 체결하고자 하는데, 섭정이 부재중이고, 그 섭정의 대리가 부재중이라는 이유로 미루고 있습니다. 이는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에서 자유롭게 통상권이 규정돼 조선의 상권을 독점하게 되는 법입니다. ”     

재면은 긴말을 스스럼없이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얘기했다.      

”또한 북양대신이라는 청나라의 관료와 조선의 왕을 대등한 지위에 놓고, 조선 내 재판권을 가져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종속관계를 명확히 하려는 일을 하는 행위인데, 이 행위를 저는 가만히 두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구, 우리 주상전하께서도 마찬가지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재면의 말을 들은 영국 대사는 그래서 그게 어떻께 영국에 도움이 되는지 물었다. 재면의 말대로라면 재면을 도와 조선을 돕는 일이 영국을 위한 일이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 해답을 재면이 내놓고 있지는 못했다. 청의 제후 조선을 돕는 일이 영국에 어떤 이로움을 주는 것인지 주판을 굴려보아도 정확한 대답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조선은 새롭게 거듭날 것입니다.”     

“그 말은 이미 수십 번 들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이 새롭게 거듭난다고 해도, 그게 대영 제국과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 조선에는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은 내정간섭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선으로 돌아가 그들을 쫓아낼 생각입니다. 여기에 대영 제국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한 제후국이 아닌, 청국과 같은 천자국의 칭호를 선포할 것입니다. 마땅히 가져왔던 독립을 선언할 것입니다.”     

마시려고 들어 올린 차를 잠시 허공에 대기시키는 영국의 대사였다. 조선의 무리한 도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서 셈을 시작하였다. 조선이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면 청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조선에는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의 군대도 같이 들어가 있다.      

두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는 조선이다. 조선이 아닌 일본제국에 대한 지원을 통해 청나라를 견제할 수 있다. 재면의 말대로라면 조선은 청나라에게 독립을 선언한 후 제국이 될 것이다. 또 빠르게 부상할 것이다. 미국처럼. 그게 과연 영국에게 어떤 이점을 가져다 줄 것인가를 셈하는 대영 제국의 대사였다.      

“이때 청은 반드시 조선을 그냥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겠지요”     

멈추었던 차를 마셨다. 뜨겁지도, 온전히 다 식지도 않아서 적당히 맛이 괜찮았다. 목을 넘긴 차를 두고, 꿀꺽 소리가 났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그리고 지금 듣는 이 이야기를 아예 청에 팔아 버릴까 생각도 했다.      

영국 대사의 생각을 재면이 읽기라도 한 듯 비수처럼 다음 말을 이어갔다.      

“이때 영국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보호해주신다면 조선은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청국에게 선전포고 없이도 전쟁을 하게 되실 것입니다. 만약 영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으나, 부디 청국의 편에는 서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재면이 대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했다.      

”왜냐면 이미 미국과, 독일, 프랑스와, 이탈리아, 러시아와 같은 나라들이 도와주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이라고 할지라도, 세계를 상대로 이겨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건 이미, 미국의 독립으로 증명되었으니까요.”     

지금 이 자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지 협박을 하는 것인지 무엇인지 생각하는 대사였다. 마치 자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내려다 보는 듯 마냥 행동하는 재면의 행동에 화가 났지만,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매우 큰 일이었다.      

청의 편에 서서 전쟁에 돌입한다면 이기기만 한다면 영국이 모든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이야기였지만, 물질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기만 하면 그래도 되겠지만,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외교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재면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가에 대한 신용의 문제도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재면과 대화하고 느낀 것은 감히 허세를 가지거나 운명을 가지고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는 것이 많았고, 그 대부분은 진실이었다.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자국의 내막도, 오히려 재면을 통해 알게 된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자국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상승한 대사의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덥석 약속을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제안이기도하면서 협박이기도 한 재면의 말을 곱씹어 볼 수 밖에 없는 대영 제국의 대사였다.      

“제가 함부러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우선 본국에 보고해보겠습니다”     

우선은 말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하는 대사였다. 그런 대사의 반응을 살핀 대사가 피식 웃으며 대영 제국의 대사를 쳐다보았다.      

“조선은 전 국토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할 것입니다. 세계 최초로 철도를 건설한 영국의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것처럼, 조선은 지금은 세계의 흐름을 따라잡기 급급하나, 곧 선도하게 될 것입니다.”     

조금 더 진지하게 중후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미 하고자 하여 만든, 천문과, 문자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 영국의 청교도 혁명처럼, 조선은 새롭게 혁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영국의 대사는 자신의 표정이 재면에게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 최대한 어떤한 감정도 들어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쯤 와서 살펴보면 처음부터 재면을 만났던 일이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동굴에 같이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이왕 들어간 거 쭉 가서, 다이아몬드라도 발견하고 나오거나, 아니면 터널처럼 뚫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도, 그 얘기는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아직 철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야 하는 미개한 국가라 생각했는데, 마치 철도의 이용 방법과 건설 방법 등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것처럼 얘기하며 그와 동시에 우리 옥스퍼드와 같은 대학들을 건설하고, 공업을 육성하는 얘기는 정말 재밌었습니다.”     

대사는 구미가 당긴다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아직 대영 제국에서 조차도 실행되지 않았던 전국토를 지하화 한다는 얘기는 흥미롭고, 참신했습니다.”     

“영국이 조선의 독립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조선은 스스로 일어난 강인한 힘과 대국들을 도움으로 승리할 테니, 이후의 일은 영국과 함께 멋지게 해보고싶습니다.”     

영국대사는 얘기를 듣다 보면, 처음엔 재면이 청으로부터 독립할 힘을 얻기 위해 찾아온 것처럼 들였으나, 아예 더 나아가 승리한 이후의 조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미 청에게 승리할 것이란 건 기정사실화처럼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셈이 더 복잡해지는 대사였다.      

“아직 영국이, 돕지 않겠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어떤 도움을 주시려고 하는지 여쭤보겠습니다.”     

아뿔싸, 말을 해놓고 보니 실수였다는 것을 알게 된 영국대사였다.      

“들어보면 조선은 이미 준비가 끝난 거 같은데, 우리 대영 제국이 무엇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럼 영국은 전쟁 이후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전쟁에 참여한 다른 대국들과 이후의 승전품을 나눠 가지려면 생색은 내긴 해야겠으니 대영제국의 무적 Z 함대를 황해에 배치해주십시오”     

“그냥 들러리만 서라는 것입니까? 대영제국을 뭘로 보고!”     

“그럼 대국의 연합군 군대를 수송하는 임무를 맡아 주지 않겠습니까? 미리 준비한 군대로 청나라가 조선에 간섭하자마자 청나라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들러리가 아닌 가장 핵심이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노력해보겠습니다.”     

“조선이 은혜를 갚는다는 확실한 보증으로 많은 양의 차관을 매입했습니다. 영국도 함께 하시겠습니까? 말로만 은혜를 갚는다고 하는 것은 쉬우나 차관을 빌려, 높은 이자로 갚은 것은 실질적으로 확실히 은혜를 갚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 제안을 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냉전의 시대처럼 말이 없기도 했으나 곧 화해와 협력의 악수를 했다. 영국의 대사는 재면이 말하는 차관의 액수를 듣고 놀랐다. 분명히 자신이 말린 느낌이었는데, 이미 말로 한 게 아닌, 서명조차 끝난 이후였다.      

그 정도의 금액이면 지금의 영국을 만들 수도, 조선의 백년을 살 수도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걸 다 차관으로 빌리다는 것입니까?”

“타국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어찌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재면이 생각하는 조선의 미래가 궁금했다. 차관을 빌리는 일은 사실은 이렇게 쉽게 허락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청의 인구가 현재 전 유럽을 합친 인구보다 많습니다. 그런 청을, 이번 전쟁으로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조선이 그 연합의 선두에 서게 되니, 영광입니다.”     

“조선이란 나라는 예전부터 상국으로 청을 모시면서, 척화로 내정을 살폈던 나라죠, 그러면서 청의 옆에서 잘 살아남은 처세술을 내가 오늘 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약 된 내용처럼, 청교도를 인정하고 영국의 차관을 어디다 사용했는지 알려주시면 됩니다.”     

“예, 약조하겠습니다.”     

대사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으나, 재면은 약조된 차관의 사용 여부를 전부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말한 것처럼 철도를 깔고 대학을 설치하고, 청교도 교회를 설립하고, 그러한 부분은 부풀려 알리겠지만, 실질적으로 사용할 군사력은 철저히 비밀에 부칠 예정이었다.      

마치 약조가 끝난 것처럼 얘기했지만 아직 협상의 진행 중에 있는 나라들에게 잘 써먹을 작전이었다.      

재면이 가장 많은 차관을 빌린 곳은 러시아였다. 조금 오랜 후의 일이지만 러시아는 망할 것임을 알기에 더욱 대놓고 차관을 빌려 갚지않을 속셈을 가지고 있는 재면이었다.      

“조선의 차는, 향이 참 좋군요.”     

러시아 대사는 재면과의 대화를 특히 즐거워했다. 그는 만주지역과 극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넓히는 데 관심이 많았는데, 청나라 때문에 교류가 부족한 조선에서 특히 영향력을 넓히려 했다.      

“이 철도 노선이 만들어지면, 정말 엄청 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였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은 러시아 대사는 어떻게 착공도 되지 않은 러시아의 계획을 알고 있는지, 처음엔 재면을 무척이나 경계했지만, 나폴레옹도 넘지 못한 러시아를 칭찬하는 재면의 말부터 시작하여 러시아을 치켜세우며, 특히 러시아 대사를 치켜 세우는 재면과의 대화를 좋아했다.      

그러면서 발트해의 문제로 인해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만큼은 러시아와 협력관계에 있는 독일과, 동맹 관계에 있는 프랑스, 적대관계까지는 아니라도 대치 관계라고 볼 수 있는 일본과, 미국, 영국을 이용해 조선에 이로운 외교를 이끄는 모습을 보고 이를 잘 이용해 러시아에 크게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면은 중국의 경극처럼 수많은 가면을 쓴 모습으로 각국의 대사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7화     

각국의 외교 대사들은 자신들이 취합할 수 있는 정보로 재면과 마주했다. 처음에는 그저 신비한 동양의 어느 한 허름한 국가의 섭정의 대리를 맡은 왕족일 뿐이었으나, 그가 알고 있는 신비함은 필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뉘는 시기에 갑자기 많은 사람에게 기적을 보여준 어떤 이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재면은 그처럼 직접 기적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도저히 한 명의 인간의 지식이라고는 볼 수 없는 지식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스마트폰도 없는 상황이라 그런 상황이 그저 한 명의 성인이 조선이라는 동쪽의 끝자락에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당시엔 컴퓨터도 개발되기 전이라 수많은 지식을 늘어놓는 재면의 모습에 외교 대사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도 자국에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고, 그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다시, 대국 중의 대국이면서 전쟁의 위험 요소는 적은 청나라에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청을 아예 꿀꺽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보다 나라에 기여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하, 꿀꺽이요? 하하하”     

러시아의 경우, 재면은 동맹국인 프랑스와 교차검증을 할 경우가 있기에, 프랑스 유학 출신이기도 한 김옥균을 제대로 활용했다. 러시아 대사를 자신이 만날 때는 프랑스 대사에게는 김옥균을 보냈고, 다른 나라에도 각기 한 국가 이상은 담당하게 하였다.      

그중 미국에는 이완용을 보냈다. 이완용은 미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와의 교류에도 상당히 공을 세웠다.      

러시아의 철도건설에 조선에서 노동을 빌려주고, 차관을 빌려오는 방법을 빌렸다. 또한 시베리아 철도를 만주와 한반도의 부산포까지 연결하는 방안으로 러시아와 조선의 교류를 확실하게 했다.      

조선이 시베이라 횡단철도의 50%를 부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우선은 러시아로 차관으로 빌려서 나중에 갚겠다는 계산이었다. 제 3자의 시선에서 보면 도저히 납득히 안되는 처사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 대국들이 조선에 넘겨준 사실들을 각국의 첩보로도 조금은 융통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조선에게 상당히 많은 차관을 빌려줬는데 그 배경이 궁금해 이완용이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차관을 빌려 오실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재면은 완용을 보며, ‘너도 필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최선을 다한다면’이라는 말과 함께 그 방법을 일러주었다.      

러시아에게는 참호 기술과 건물들을 이동시키는 기술을 전수해주는 대가를 치뤘다고 했다.      

“건물들을 이동시키다니요.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듣고 있던 완용이 놀라 그런 게 가능할리 없다는 표정으로 재면에게 물었다.      

“있다. 가능하다.”     

실제 2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의 공장 지대에 타격만 가하면 러시아는 쉽게 항복을 할 것이라 판단하고 무리한 진격을 했는데, 남은 것은 텅빈 도시의 모습만 있었다. 러시아는 실제로 건물들을 철도로 연결해 이동시키는 역사상 유례없는 일을 저질렀다.     

그보다 수십 년 먼저, 어차피 자국의 기술이었테지만, 재면이 러시아에게 이를 알려주겠다는 협상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엄청난 차관을 받아 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핫팩의 기술을 전수하면서 얻어 올까 생각했지만, 핫팩은 조선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도구로 쓰일 것 같아 우선은 타국에 전파하지 않고 감추려했다.      

이렇게 원래 자국의 기술이지만, 그 기술을 먼저 알게된 이 시점을 살려 재면은 다른 국가에도 원래 자국의 기술을 팔면서 차관을 얻어왔다. 대표적으로 미국에는 이미 진행 중인 비행체의 기술을 전파하는 조건으로 많은 차관을 가져왔다.      

이렇게 각 국가마다 하는 얘기와 얻어 온 결과는 달랐지만 공통된 점은 하나가 있었다. 바로 청나라를 공격할 명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기술을 알고, 미래를 안다고 해도 지금 당장, 작금의 조선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필요한 게 너무 부족했다. 자원도, 시간도 부족했다. 그런 부분을 이런식으로 채워가는 재면이었다.      

가장 설득하기 어려웠던 나라는 독일 제국이었다. 이제 막 전성기를 맞이한 독일 제국은 철과 피의 힘이라는 철혈정치를 보여주고 있는 신생 제국이었다.      

외국 대사를 만나는 일에도 가장 애를 먹은 것도 독일 대사를 만나는 일이었다. 독일은 유일하게 재면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래서 삼국 동맹의 힘을 빌어 오스트라이-헝가리 제국과 이탈리아 제국의 대사를 도움을 받아 느께서야 만날 수가 있었다.      

“타국의 대사들을 만나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모르겠군요.”     

다소 낯선 반응으로 재면을 대하는 독일 대사였다. 독일은 프랑스를 꺽고, 기세를 몰아 확장 정치를 펼치고 있는 꺾이지 않는 콧대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국가와 싸워 식민지를 빼앗기도 하면서 가장 식민 제국주의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는 나라였다.      

특히 발트해에서 러시아와 대치중이었고,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와 대치중이었고, 여러 지역에서 늦게 세상으로 나온 혈기왕성한 청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 무너질때만해도, 합스부르크 왕가가 무너지고 있기에 게르만 민족이 다시 이렇게 일어날 수 있었을 거라고, 그런데 그걸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를 임명한 빌헬름 2세가 이루어 냈다.      

자신들의 확장을 위해, 자신들과 입장이 비슷한 이탈리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삼국 동맹을 맺게되었고, 스페인에도 자신들의 친족을 왕족으로 세움으로 프랑스를 압박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고 있는 국가는 현재 독일 제국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동쪽 변방 조선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콧방귀를 뀌어도 어쩌면 그 반응은 당연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만나 뵙기가 힘들었습니다. 대사”     

재면이 허허,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도, 자신의 시간을 뺏기기라도 한 표정으로 재면을 대하는 독일 제국의 대사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어되었다.      

“그래, 그대가 무슨 짓을 하는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우리 독일 제국의 이름도 오르락 내리락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시오?”     

재면이 하는 모든 이야기가 완벽한 비밀은 아닌 모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재면은 웃으며 전혀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독일 제국의 대사를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저와 대면하신 것은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관심이 있다 없다, 무슨 자세한 내막도 모르는데 내가 어찌 판단한단 말이오? 독일은 피에 굶주려 있소.”     

재면은 이런 나라이니까,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히틀러의 피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니겠지 생각하는 재면이었다.      

“피와 철의 정치, 익히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많은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고 들었소, 그대가 보낸 편지도 잘 봤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본국에 첩보원을 심어두었는지 보고를 해야 했고, 덕분에 많은 의심받는 이가 죽었소.”     

재 면으로서는 현재의 외국의 정세마저 알 수 있는 겨를은 없었기에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어쩌면 역사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었기에 신중하게 대화를 이어가야겠다고 마음먹는 재면이었다.      

“이거까지는 몰랐던 모양이지요?”“     

”어찌 제가, 다 알겠습니까?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이야 말로, 모든 걸 알고 계실 뿐이겠죠.“

”하느님을 믿소?“     

그의 경계가 다소 풀어지는 표정으로 재면에게 물어왔다. 재면은 그가 절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 믿는다 안 믿는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독일 제국의 역사에 종교 개혁을 볼때면 눈물을 머금습니다. 신이 우리를 버린 게 아닌, 우리가 신을 버렸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아프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허허, 정말 귀신처럼 많은 것을 알고 계시오.“
 

”대사께서는 귀신이라는 말을 꺼내신 걸 보니 저보다 신앙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긴장은 갑자기 사리지고 웃음꽃이 피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생겨 난 국가주의를 이야기하며, 다른 국가의 대사들처럼 그 나라의 역사를 말하며, 대화를 이끌어내는 재면이었다.      

”들었던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하하, 이런 분을 이제야 알아보게 되다니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대사의 친절한 태도의 재면은 첫 만남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다른 대사들처럼 여러 차례만나며, 조금씩 그 속을 들어내면서 독일 제국으로부터도 차관을 얻어낼 수 있었다.      

특히 독일 제국의 높은 기술을 이끌어 내고, 협력하기 위해 했던 대화는 가히 대단했다. 재면은 어느 때처럼, 미래에서 본 그래서 알고 있는 지식 중 하나를 그림으로 그려 대사에게 보여주었다.      

”이 얇은 대포에, 쇠사슬로 묶은 바퀴들이 많은 이건 뭐요?“     

”보어 전쟁 때 나온 장갑차를 기억하십니까? 대포를 실은 차입니다.“     

”그렇소만, 그다지 특별한 건 아니지 않소?“     

“그걸 조금 더 개량시켜 만들어 본 것입니다. 포를 이렇게 좌우로 움직이고, 실탄을 실은, 탱크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탱크요?”     

“과거 조선에는 신기전이라는 요즘 말하는 전차와 같은 화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조금 더 발전시켜서 조선에서 대포를 차로 운반하는 정도가 아닌 대포와 차가 하나인 형태의 새로운 도구를 계발하고 있습니다.”     

“...”     

그는 놀라운 시선으로 재면을 보았다. 그러다 땀을 흘렸다. 움직이는 대포라, 실로 위협적이고 대단한 물건이었다.      

“어찌, 이런 일을 나에게 말해준다는 말입니까?”     

“차관을 빌리는 것은 당장의 조선이 부족한 부분이지만, 확실히 갚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전차계발은 조선의 급비사항이고 타국에는 발설하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이 기술을 독일 제국과 조선이 함께 개발하면서 조선은 독일의 신뢰를 절대 깨지 않겠다는 약조와 같은 것이지요.”     

재면이 그린 그림에는 탱크의 모형과, 발포하는 장면과 피격된 형태, 이동할 수 있는 속도와 엄청난 대인살상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사는 청나라의 성벽이 그려진 그림을 가리키며, 허허, 넉이 나간 듯 웃었다.     

“이제 성벽은 거추장스러운 시대가 되겠군요.”     

“조선이 계속 청국의 제후로 남았을 경우 이런 자료가 모두 청국의 것이 됩니다. 그런 게 나을까요?”     

확인할 방법은 없으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재면이 보여주고 있으니 진실이겠지 생각하는 대독일 대사였다. 조선이 전차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전차가 개발될 거라면, 자신에게 우호적인 나라가 될 조선에서 갖고 있는 것이 나았다. 거기다 그 기술을 함께 개발해 독일도 전차로 무장하면 좋았다.      

“내 재상을 설득해서라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도록 하겠소, 청의 시대가 곧 끝나겠군요.”     

“그 정도까지야 되겠습니까. 이빨 빠진 호랑이도 호랑이죠, 그저 조선이 독립해, 이런 기술과 문화를 바탕으로 평화를 도모하고 싶을 뿐입니다.”     

8화     

“청나라를 도모한다라, 엄청난 꿈입니다.”     

“하하, 무슨 오해가 있습니다. 청나라를 도모하는 일이 아니라, 벗어나는 일일뿐입니다. 원래부터 조선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나라였습니다. 아주 오래전 조선이 계승한 옛 국가들을 쭉 나열해도 그렇습니다. 만주지역의 넓은 영토를 가졌던 고구려, 그 밑으로 백제와, 신라, 가야와 더불어, 고려도 그렇습니다.”     

재면은 말을 하면서 자신이 백제의 이야기를 꺼내며, 일본에 있는 칠지도의 보물을 본 외국의 대사에게 그건 백제가 하사한 무기이고, 이는 천년도 전에 만들어진 기술이라고, 문자도, 천문도 스스로 깨우친 나라가 이제는 개화를 스스로 하려고 하니, 반드시 성공하는 일 외에 다른 결과가 있을 수 있겠냐고 자신만만했던 일이 떠올랐다.      

“참 대단합니다. 귀공은, 할 수 만 있다면 본국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살짝 띄운 미소로 답례하는 재면이었다. 대화의 시간이 끝나고, 그는 자신이 데려온 사람들을 한 번에 다는 아니고 2명 3명씩 따로 불러 얘기를 나눴다. 같은 얘기를 하더라도 자신이 수고를 하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꼭 한 명에게, 약조가 적힌, 도장이 찍힌 문서를 보관하게 하였다.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맡기지 않았다. 자신이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음을 대비하였다. 그들은 각자 서로 떨어진 여관에 머물렀다. 서로 서로의 위치를 몰랐다. 재면도 몰랐다.      

이곳은 어쨌든 청나라의 영토였고, 청나라의 방해는 처음 이후에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뒤를 밟는 다든지 하는 모습들은 끊이지 않았다. 이는 재면 뿐만 아니라, 재면의 일행 모두가 당하고 있었다.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서 소요를 일으키지 않으며, 도박장이라던지, 투견장이라던지 그런 장소를 골라 얘기를 나누는 재면이었다. 공사관을 찾아가는 일은 드물었다.      

재면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대사들은 직접 그런 수고스러움을 겪으면서도 재면을 만나러왔고, 재면에게 약조했다.      

옆에서 돕던 이완용과 김옥균이 재면의 능력을 높이샀다. 어느 날은 재면이 여관을 빌려 방에 들어가지 않고 술 한잔을 따른 채 마시지도 않고 쳐다보고 있자, 김옥균이 다가와 앞자리에 앉았다.     

“왜 방에도 들어가지 않으시고, 술도 마시지 않으십니까?”     

“술잔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재면이 다과를 담은 그릇을 비우고 그 안에 술을 따랐다.     

“작은 술잔에 비친 내 모습은 술잔 만큼이나 작으나, 이 그릇에 비친 내 모습은 그릇만큼 작다.”     

“여전히 작군요”     

재면이 웃으며 김옥균을 쳐다보았다.      

“그래, 여전히 작다.”     

“그럼 더 큰 그릇에 담으셔야겠습니다.”     

“그정도를 마시면 죽지 않을까?”     

김옥균이 주방에 부탁하여 큰 대버을 가지고 오자 재면이 살짝 걱정스런 말투로 말했다.      

“옛 정철이란 자는 술을 더 먹고 싶어서 임금이 하사한 술잔을 조금이라도 더 키워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일화가 있지, 자네는 술을 좋아하는 가?”     

“싫어하진 않습니다.”     

김옥균이 술잔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재면이 이를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속 이야기를 꺼낸다.      

“이렇게 신중했던 자네가, 그리 대담한 일을 저질렀더니”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하고 넘겼다. 실제 역사 속에 2년 후, 갑신정변을 일으킨 후 힘든 생을 살다가 결국 마지막엔 암살을 당해 죽은 모습을 떠올리는 재면이었다.      

“이제 끝나간다. 곧 떠날 것이다.”     

재면의 말을 듣던 김옥균이 주변을 둘러본다.      

“조선과 다르게, 참 많이 변한 모습입니다. 조선도 곧 이렇게 변하겠지요?”     

“더, 더 나아질 것이다.”     

재면의 말에 김옥균은 무언가 가슴속에서 끓어오름을 느낀다. 언제부터 느낀지 모르겠으나 재면을 따라다니면서 재면의 대단한 능력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두 손과 발로 도우면서, 처음 재면이 건네주던 그림들을 떠올린다.      

“우리가 함께 꿀 꿈이라 하셨습니다.”     

무슨 소린가 싶어서 옥균을 보는 재면이었다. 아,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인가 하여 눈을 끔뻑거린다.      

“처음엔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이해가 됐습니다. 우리가 꿀, 아니 이룰 꿈을 알겠습니다.”     

“그때부터 알았어야지.”     

“소인이 미천하여,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현대의 장난은 지금에는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재면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신분은 아주 높은 왕족이 아닌가, 나중에는 이런 신분제도 없애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했다.      

실제로 대사들을 만나 그런 얘기도 했다. 몇 없었다. 아니 프랑스가 유일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분제 자체 폐지하는 얘기는, 다시 생각해보면 신분제가 문제가 되고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살다 온 세상은 적어도 태어나면서 정해진 신분은 없었다.      

“달이 높게 올랐다. 더 올라 사라지기 전에 이제 그만 자고, 내일을 도모하자꾸나, 이젠 더 바빠질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재면은 특히 신경을 쓰는 나라 독일 제국, 대영 제국, 프랑스 공화국, 러시아 제국, 미 공화국, 이탈리아 제국,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을 필두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벨기에 등의 나라들과의 약조를 살폈다. 대영 제국에 권유로 어쩔 수 없이 만난 일본 제국과는 사실 별 얘기 하지 않았다. 일본은 청나라처럼, 할 수만 있다면 전쟁이라도 하고 싶은 감정을 느끼는 재면이었다.      

“민족주의란 바보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시대에, 이렇게 살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군”     

논외로 생각하며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리를 해야 하는 일이기에 일본 제국의 대사도 만났다. 다만 아무런 약조도 하지 않고, 정말 역사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미래에 대한 어떠한 힌트도 주지 않고, 오히려 함정에 빠트렸다.      

자국의 역사와 더불어 유창한 일본어로 인해 다른 대사들처럼 일본 대사도 재면을 좋아했지만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다만 일본 대사가 먼저, 임오군란의 피해를 적당히 마무리하자는 제안을 해오면서 그런 부분 하나만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재면은 혹시라도 자신이 놓친 것이 없나 살펴보았다. 그런 중에 흥선군 때문에 일을 그리칠 뻔한 게 떠올랐다. 한창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던 재면을 급히 흥선군이 불렀다.      

재면은 일을 마치고 가겠다고 했지만 당장 오라는 말에 직접 재면을 찾아오려던 흥선군의 횡포에 못이겨 만나러 가야했다. 흥선군이 움직여 청나라가 시끄러워지면 모든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재면이 흥선군을 찾아가자 대뜸 벼루를 던지는 흥선군이었다. 재면은 다행히 잘 피했다. 순간 벼루를 주어 벼르장머리 없는 흥선군에게 다시 던져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꾹 참았다. 흥선군이 잔뜩 흥분해서는 너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거냐! 며 매우 호통쳤다.      

독일 제국의 관한 일 때문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이었다. 재면의 할아버지이자,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쳐 도굴해간 지난날의 일 때문이었다.      

재면은 흥선군을 겨우 말리며, 앞날의 조선을 설득했다. 전부 말할 수는 없었으나 독일 제국이 제공해줄 차관과 전차에 대한 정보로 향후 누구보다 강한 육군, 군대를 가질 조선을 말했지만, 흥선군은 지금 당장 성과도 없는 일을 믿지 않았다.      

“네놈이! 내가 나중에 어찌 아버님을 뵐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냐!”     

분노한 흥선군은 가만히 두면 일을 망칠 것임이 분명해 재면은 침착하게 말을 되풀이 했다.      

“아버님, 신미년, 병인년, 병자년, 우리가 왜 당했습니까?”     

흥선군의 치부를 건드렸다. 패배한 싸움에, 척화비를 세우며 잘했다고 홍보했던 그 시절, 그래서 결국 개화파의 반대에 의해 물려나게 된 사건이기도 한 그 일들을 꺼냈다.      

“그런 나약한 조선을 이제는 끝내려 하는 것입니다. 독일 제국은 지금 대영 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큰 성장을 보이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게 얻어 올 수 있는 건 얻어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도리가 있는 것이다! 맹자께서! 공자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가르침은 그런 것이 아니야!”     

“아버님, 사사로이 저에게도 할아버지입니다. 국가로 봐서도 왕족의 묘이지요. 다만, 그 왕족은 나라가 있을 때, 왕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 게 아니라,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다고 말하는 가르침도, 유학에서 가르치는 도리가 아닙니까?”     

“네놈이 나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냐?”     

“진정한 유학자는 세 살배기 아기에게도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재면의 강한 모습에 흥선군이 흠칫 놀랐다. 손에 든 붓이며 갖가지 도구를 큰 한숨과 함께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대화가 좀 되는 느낌이었다. 겨우 한숨을 돌린 흥선군은 그래도 안 된다고 했고, 재면은 아직 받아내지 못했지만, 독일 제국이 정식으로 사과를 했다고 거짓말했다.      

흥선군은 그제야,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라는 모양새를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보여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음에 독일 제국을 만났을 때 실제로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문서를 조선에 보내기로 약조했다. 지금으로선 조선도 독일도 이제는 서로를 놓치 않는 방향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의 미래를 아는 재면의 생각이었고, 재면을 통해 조선을 엿본, 독일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어느 정도 목표한 바를 이룬 재면은 이제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조선으로 돌아가 할 일도 많았다. 쉼없이 시간을 썼다. 다행히 허비하지는 않았다. 허나 아직 갈길이 멀었다.      

재희로 살았던 시절, 그토록 그리던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시대라고 볼 수 있었지만, 결국은 이렇게 해냈다. 사실 아직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었지만 대나무가 뿌리를 먼저 크게 내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엄청난 성장을 하는 것처럼 재면이 기획한 조선이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조선의 지형처럼, 산 넘어 산이라 아직 가야할 길은 멀었기에 여기서 쉬어 갈 생각이거나 지치면 안 되었다. 재면 문서들을 살피고 혹시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또 보고 수정하고 살폈다.      

지금 조선에서는 자신이 맡긴 일들을 처리하고 있을 인재들이 있었다. 그들을 믿어야 했다. 이미 바뀌고 있는 역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분명히 해야했다.      

재면은 자신이 살던 집과 세상을 그렸다. 지금 조선의 백성들을 누리지 못하는 삶이나 곧 누리게 될 평범한 삶이었다.      

“얼른 이런 세상을 선물해야지..”     

여관 방에 그린 그림을 펼쳐보고, 잠시 옛 기억에 빠졌다. 지금의 시대라면 사진도 나왔을텐데 어서 들여서 자신과 혁명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역사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사니까,,”     

자신이 하고 있는 있는 조선의 역사가 될 일이었다.

조선의 역사를 바꾸는 일이었다. 

9화     

계절이 바뀌고 하늘은 높고 말은 살쪘다. 재면이 바다를 건너 청나라로 넘어온 지 어느덧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대사들을 만나 차관을 약속받았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삼국은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과 미국이었다.      

기술을 토대로 재면에게 차관을 빌려주면서 자국에서의 입지도 동 들어 상승한 듯 보였다. ㅎ흥선대원군은 재면이 온 이후로 조금은 숨을 돌렸으나 여전히 재면의 행동들이 너무 급작스럽게 바뀌어 적응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흥선대원군에게 오랜만에 문안 차 인사를 오는 재면의 모습을 보고 흥선대원군은 재면이 반가웠으나 이를 속이고 크게 꾸짖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며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이냐, 들어보니 나라를 팔러 다닌다는 소문도 있던데 사실이냐?”     

나라를 팔러 다닌다는 소문, 그런 소문은 누가 만들어 내는 걸까 하고 재면은 생각했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자신이 그리는 미래의 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겠다 싶었다.      

“아버님을 조선으로 데려가기 위한 작업을 진행중입니다.”     

재면의 한마디에 흥선대원군은 더 이상 목청을 높이지 못한다. 재면에게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었기에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찬 일이었다. 평생을 살았던 조선, 생을 다해 위했던 조선이었다. 비록 아들과 척지며, 양자로 들인 재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도 있었다.     

“준용이 소식은 없는냐.”     

“조선으로 가게 된다면 직접 물으시죠.”     

인사도 전하지 못하고 놓고 온 손자의 얼굴이 떠오른 흥선군은 갑자기 가슴이 미어졌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는가 싶었다. 갑자기 변한 적장자의 모습이 낯설어서 그랬을까,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은 차자이자 임금인 고종이 얄미워서일까, 조선이 그리웠으나, 조선이 그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내가 하던 일을 모두 부정할 생각이냐?”     

한동안 말없이 서성이던 재면과 흥선군이었다. 흥선군이 먼저 침묵을 깼다.     

“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심는 일이라고? 나도 그랬다. 예전에 그런 말을 하신 분도 계셨지.”     

흥선군을 보던 재면은 날이 저물어 붉게 타오르는 해를 보며, 익어가는 날을 보며, 이제 때가 오고 있음을 알아챘다.      

흥선군은 재면의 말에 어릴 적 만났던 조선의 희망이라 불렸던 효명세자를 떠올렸다. 3년동안의 개혁으로 조선에 희망을 보여주었지만, 갑자기 피틀 토하며 죽었다.      

독살을 의심했으나, 어의는 독살이 아니라고 했던 일이 있었다. 이후에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도 직접 친정을 하겠다고 나선 이후에 아버지인 효명세자와 비슷한 죽음을 당했던 일을 떠올렸다.      

“희망과 절망은 늘 같이 있더구나. 네가 보이는 행적이 나는 미덥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보여주는 모습은 감히 내가 아는 네 모습이 아니라, 과거 어느 존경해 마지않았던 분을 떠올리게 한다. 아비로 응원하지만, 내가 틀렸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흥선군의 말을 들은 재면은 곰곰이 생각한다.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의 별처럼, 생각이 공존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런 시대가 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이 시대에 맞게 세상을 바꾸고 그 시대를 앞당기려고 하는 재면이었다. 그런 재면의 생각을 흥선군이 알리 없었고 말한다고 해서 믿을 리 없었다.      

“적어도 지금, 여기서는 제가 아버지보다 하고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게 많은 것 같습니다.”     

재면의 말에 흥선군의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끼고 재면을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그 호랑이 같던 표정을 재면이 무서워하며, 기분이 나빠진 흥선군에게 억지로라도 지는 모습을 보였다.      

흥선군도 그런 장자의 모습을 기대하였다. 동생과 싸우고 난 후면 늘 이런 모습을 보였던 아버지 였었던, 이전의 재면은 그랬으나, 지금의 재면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재면이 아니었기에 그랬다.      

“조선으로 가서도, 제가 틀리지 않았음만이 증명될 것입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저는 제 할 일을 하러 가겠습니다. 조만간 모시러 오겠습니다.”     

재면이 인사를 올리고 사라지고, 흥선군은 그런 재면이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응시했다. 언제나 자신의 편이었던 아들이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임오군란을 수습하고 있던 중에 청나라 군대가 파견되어와 그들과 군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나려 했을 때, 처음으로 재면이 그를 말렸었다.      

그때부터 재면이 달라졌었던 것인가 생각했다. 자신에게 전권의 위임을 해달라고 말했던 모습, 지금은 중요한 시국에 책임자가 사라지면 안 된다고 말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 말을 들었다면 지금 상황은 달라졌을까? 그럼, 지금 저 말들을 믿고 지지해준다면 조선이 달라질까? 그런 생각을 하는 흥선군이었다. 하지만 흥선군은 이제 와서 어떠한 답도 알 수 없었다. 피곤하여 지쳐가고 있었다.      

*     

재면이 대사들을 한 자리에 모두 모아 초대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첩보전을 펼치전 각 나라의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외국에선 이렇게 파티를 자주 연다고 하죠? 조선에서는 연회라고 합니다. 큰일을 도모하기 직전이나 이후에 성대한 잔치를 엽니다.”     

서양식 제조술인, 붉은색의 술, 와인을 능숙하게 내밀며 잔을 권하는 재면의 모습에 김옥균과 이완용 등 이미 서양 문물을 먼저 접했던 조선인들을 쉽게 따라 했으나, 그 밑으로 처음으로 접하는 조선인들은 어색하며, 떡 하나 없나 살펴볼 뿐이었고, 외국의 대신들은 신기한 모습을 본 것처럼 재밌게 웃었다.      

재면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신들을 불러 모은 것도 놀랍고, 이렇게 많은 나라가 참여한 것도 놀랐다. 회담이 아니고서야 이런자리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고, 회담에서조차 이런 광경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친교의 모임은 아닌 것이 분명했기에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재면이 나눴던 대화처럼 이들도 그런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게 모르게 첩보전이 펼쳐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재면이 이렇게 자신들을 불러 모은데는 또 그만한 이유가 있을까 기대반, 걱정반 하게 되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저는 내일, 조선으로 돌아갑니다.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인사를 전하려고 이렇게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약속이 우리를 위대하게!”     

“우리의 약속이, 우리를 위대하게!”     

갑작스럽게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긴 재면의 말이 있었다. 이는 다른 나라들에게 어서 약조한 차관을 빨리 융통시켜달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조금의 의심을 아직 거두지 않은 대사들도, 이렇게 대놓고 다른 나라의 대사들을 한 자리에 초대한 재면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런 국적이 다양한 사람들이 회담도 아니고 한 자리에, 그것도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 청나라의 제후국에 불가한 작은 나라를 위해 모이다니, 믿을 수 없었다.      

자신들이 약조한 것처럼, 그들도 무언가를 약속하고, 무언가를 받아냈겠지, 앞으로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숙제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들은 재면에게 숙제를 받은 느낌이었다.      

만약 당신들이 약조한 것을 약속한 시일내로 제대로 배달하지 못하다면, 당신에게 약조한 것들을 여기 있는 다른, 그대들이 싫어하는, 프랑스는 영국이나, 독일, 독일은 영국이나 러시아, 러시아는 미국이나 독일 등에게 나눠 줄 것이라는 그런 압박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밀담을 통해, 비밀의 약속을 통해 모여서 얘기를 나눴다고 해도 이쯤이 되면 청나라에게도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 조정이 조선 왕족이자, 섭정의 대리인 재면이 청나라에 파견된 주 외교공사관들의 대사들을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보고되었다.      

“그렇게 모이도록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건 대국의 망신입니다!!”     

청의 대신이, 담당자를 문책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떠들고 있을 게 아니라 조치를 취해야하는 거 아니겠냐는 말이 이었다.      

처음에 재면이 청으로 와서 멋대로 움직일 때, 이를 막으려 했으나 각 국의 대사들의 항의로 자유롭게 해주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놔둘 수는 없다는 얘기를 했다. 아버지처럼 감금을 시키던지, 아니면 쫓아버리던지 둘 중 하나는 해야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뤘고, 일단 쫓아낼지, 가둘지는 잡아놓고 얘기해보자고 얘기했다. 그들은 곧장 병사들을 보내 재면을 잡아드리려 했다.      

한참 파티가 절정에 올라 사람들이 취하고 있었을 때였다. 김옥균이 재면에게 다가와 준비가 다 되었다고 말했다. 재면은 알겠다고 하고, 연회장을 나가려고 할 때, 영국 대사가 다가왔다.      

“아직 할 얘기가 많은데, 본국으로 귀환하신다고 하니 헤어진 연인을 보내는 기분이군요”     

“헤어진 연인이라면 보내야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맞네요. 취해서 말이 잘못나왔습니다. 아무쪼록 대영 제국이, 조선을 지원하겠습니다. 조만간, 특별한 교육자들이 요청대로 파견될 것입니다.”     

다른 대사들이 대영 제국의 대사와, 재면의 말을 몰래몰래 엿듣고 있었다.      

인재의 파견과 비슷한 얘기를 재면과 나눈 사람들은 저 대화가 무슨 대화인지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런 대화를 하지 않은 대사들은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이지하며, 자신과 나눴던 대화로 둘의 대화를 유추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재면이 웃으며 대영 제국의 대사의 귓가에 조심히 일러줬다.     

“다른 대사들이 저희 얘기를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난 표정이네요.”     

한 번의 딸꾹질을 한 대영 제국의 대사가 그런 모습을 보고 웃었다가, 포르투갈의 대사를 보았다. 자신들을 방해물, 그를 보자 대뜸 다가가는 대영 제국의 대사였다.      

재면은 서둘러 담을 넘었다. 멀쩡한 문을 나누고 담을 넘은 후, 기다린 옥균과 일행과 함께 말을 타고, 곧장 항구로 향해 달렸다.      

재면의 일행이 사라진 후, 연회장은 오직 외국 대사들 밖에 없었을 때 청나라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재면을 찾았으나 없었고, 대사들이 이게 무슨 짓이냐며 따지고 들고, 소란을 피웠다.     

“일단 다 잡아 들여라!”

“네? 대사들을요?”“

”그래! 다 일단 잡아!“     

재면의 일행이 항구에 도착하니, 가장 빠른 상선을 운영하는 포르투갈이 대여해주기로 한 바로우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 올라타자 흥선군이 체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한 채 재면을 보고 있었다.     

”아니, 무슨 일이냐“     

”조선으로 갑니다.“     

”이렇게 갑자기? 도망치는 것이냐? 아닌 밤 중에 홍두께처럼 왔다가 그렇게 또 가는구나“     

포르투갈 상선이 움직여 항구를 떠났다. 뒤늦게 청나라는 항구로 와 조선인이 탄 모든 배를 검문했지만 재면은 없었다. 흥선대원군 또한 사라진 것을 알아 챈 청나라는 서둘러 조선에 있는 청의 군대에게 장개를 띄웠다.           

10화     

망망대해를 건너며 조선으로 향하고 있는 포르투갈의 상선에서 재면은 이제 조선에 도착하면 무엇을 할지, 정리한다. 파도가 높아 배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생각한다.      

열강들과 약속한 청을 치기 위한 명분, 조선의 독립부터 생각한다. 미리 준비하라고 일러놓은 것에 조금만 손을 보면 되겠지 생각한다. 이미 현대사회에 형틀을 일러주어 이를 지금의 조선에 맞게 조금만 변형시키라고 말해 놓은 터였다.      

재면의 방으로 노크소리가 들리고, 들어오라는 신호를 내자 이완용이 들어왔다. 이완용은 잼면에게 인사를 한 후, ‘주무시지도 않습니까?’ 라고 물어왔다.     

“할 수만 있다면 잠도 안자고 싶은 심정일세”     

“대단하십니다. 예전에는 이런 분이신 줄몰랐습니다.”     

완용의 말을 들은 재면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기록된 역사 속 이완용은 그냥 쓰레기니까, 그래도 능력은 있었고 능력에 조선의 상황이 너무 요지경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본 것을 떠올린다.      

독립협회를 초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독립문의 글자를 새겨 넣기도 했던 지금의 자신의 앞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누구보다 조선의 독립에 애썼던 사람이었지만, 고종이 독립협회고, 독립신문이고 전부 부숴버리고 왕권을 강화시키려 하자 방법을 달리했던 사람, 그러다 친미, 친러, 친일을 통해 마침내, 역적이 되어버린 그 완용이 자신 앞에 있었다. 지금의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둘도 없는 만고의 충신이었다.     

이런 모습이 계속될까? 역사가 바뀌고 있듯 완용도 바뀔까? 그런 생각을 하는 재면은 자신의 수염을 다듬었다. 이 시대로 회귀한 후 제일 적응이 안 되면서도 빨리 됐던 게 이 수염이었다. 이 수염도 곧 단발령을 통해 자르게 되겠지만 이렇게 한 번 다듬기 시작하면 계속 다듬게 되었다.      

“개화를 꿈꾸긴 했으나, 이렇게 이룰 수 있을까 아직 의심스럽지만, (재면이 살펴보고 있는 문서들에 시선을 두다가 다시 재면을 보는 완용이었다) 또 하다보니 정말 될 것 같다는 그런 희망이 들었습니다. 많이 배웁니다.”     

그러면 다행이지. 생각하는 재면이었다. 만약 실제의 역사처럼 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을 것 같은 낌새가 보이면 바로 처단할 것이다. 어찌 보면 며느리인 중전도, 숨어 있는 곳을 알리며 목숨을 거두라했다.      

지금쯤은 안타깝지만 죽었겠지, 돌아가면 그래도 장례만큼은 중전의 대우를 해주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재면이었다.      

완용을 보니 오래전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독립을 외치던 독립투사 하나가 늙은 완용에게 칼을 배에 찔러 넣었는데, 완용이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서는 그 청년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100년전 독립군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은가? 라는 질문을 누군가 했었을 때, 자신의 옆에 있던 친구가 대답했던 내용이었다.      

이완용을 만나고 싶다고, 앞서 말한 얘기를 말하며, 만약 반드시 독립이 온다는 것을 알았어도 그랬을지 궁금해서, 반드시 독립이 온다고 알려주고싶다고, 그래서 만나고 싶다는 얘기였다.      

재면은 그 얘기를 떠올리며 완용을 보았다.     

“반드시 독립이 온다.”     

“예,,?”     

재면은 자신이 그 친구를 대신해 이완용에게 반드시 독립이 온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제 그 친구의 한은 풀어주었구나 생각했다. 조선으로 돌아가면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했다.      

우선 준비된 개혁들을 하나하나 실현해야했고, 무엇보다 독립선언을 통한 자주국가를 선포해야했다. 실제 역사에서 조선을 참 많이도 방해했고, 지금 조선에서도 그 짓을 펼치고 있는 원세개를 제거해야겠다 마음먹는 재면이었다.     

원세개를 제거할 방법을 구상하는 재면은, 어떻게 제거할까 고민한다. 조선의 땅이니 공식적으로 제거를 해야할까? 그러면 그 파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고민해보았다.      

당장 청나라가 이끌고 조선 땅을 밟을 것이다. 이는 열강들이 참여할 명분이 적다. 청나라 입장에서 원세개라는 자국의 관료의 복수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암살을 해야겠다.’     

재면은 원세개애 대한 암살에 대한 준비를 했다. 우선 조선 땅이라고 해도, 3천 이상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나라 장군을 쉽게 죽일 수는 없었다. 지난번 훈련시켜 놓으라고 했던 칼잡이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 인지에 따라 가능의 여부가 결정되었다. 자신도 틈틈이 연습해온 실력으로 앞장 설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리 운동 실력이 좋아 보이지 않았으나 세자 시절과 재희의 시절의 감각은 잊지 않았기에 재면으로소도 충분히 지키고 벨 수 있을 정도의 실력으로 쌓아놓았다. 정말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재면의 모습이었다.      

배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조선의 항구에 당도했다.      

대원군은 배 위에서 육지가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갑판에서 눈물을 머금은 표정으로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조선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을 수습하려고 만난 청나라에 갑자기 끌려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렇게 돌아올 수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천천히 한땀 한땀 모두를 느껴보고자 했다. 천천히 조선 땅을 밟은 흥선군은 모레 한줌을 두 손으로 펴서 올려다보고 냄새를 맡았다. 재면 입장에선 청나라와 현대의 시대보다 정말 더러운 조선이었지만 흥선군에겐 감회가 새로울 뿐이었다.      

흥선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곧 당도하고, 한양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의 군대와 조선 시위대가 대치중이었다.      

원세개는 흥선군이 돌아온 사실을 알고 놀라 직접 마중나왔다.      

‘곧 죽을지 모르고 나대는군’     

재면이 원세개를 보고, 원세개는 흥선군을 보았다. 두 군대가 대치 중이었다.      

“허,허, 이게 무슨 일인지, 그대들이 벌인 일에 대해서 들었소. 감당할 자신이 있는 건지?”      

원세개가 앞으로 나와 일행을 가로막았다. 전리품을 획득해 온 것처럼 바리바리 싸들고 온 일행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청나라에서 뭘 훔친거요? 돌려줘야겠소만?”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원세개를 필두로 청나라의 군대가 금방이라도 발포할 것처럼 진형을 짰다. 조선 땅에서, 고작 5천의 병사들 가지고 이렇게 조선 한복판에서 저런 짓을 저리 대놓고 하다니, 재면은 화가 돋았다. 자신의 계획이고 뭐고, 당장 베어버리고 싶었다.      

원세개를 제거하는 일을 생각보다 앞당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짜피 빨리 죽일 생각이었지만 더 빨리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장군께서, 여기를 청으로 오해하고 계신가 봅니다.”     

자신이 일러 주대로 훈련했으면 이 시위대는 뛰어난 군대다. 재면은 자신과, 조선을 믿었다.      

“맞지 않습니까? 조선은 청에게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고, 세 번 절을 하며, 군신의 예를 갖춘 나라입니다.”     

“그건 인종 임금께서, 숭덕제께 한 일이지요”

“숭덕제? 말이 채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공자.”     

후, 한숨을 크게 쉬는 재면이었다. 계획대로 하면 된다. 여기서 우발적으로 나서면 안된다. 참고 참고 참았다. 참은 인을 세 번 생각했으니 사람을 구했다. 원세개를 구했다. 그리 생각하는 재면이었다. 상황의 급박함을 보고 나서는 이가 있었으니 흥선대원군이었다.      

“자네, 지금 여기서 전쟁이라도 하려는 건가?”     

“전쟁, 전쟁까지 가겠습니까?”     

원세개의 말을 들은 시위대가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온 사람들이 분노하는 표정이 보였다. 김옥균, 이완용, 오세창 등의 분노가 보였다.      

자신이 참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참지 못해 일이 잘못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대놓고 원세개와 충돌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대국이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보호할 명분이 필요하다. 독립을 선언한다던가 하는, 그런 명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겠다는 겁니까 전쟁?”     

시위대가 뒤로 물러나고, 거기서 고종이 나왔다. 재면이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그러고 보니 시위대는 애초에 왕의 경호대였는데, 그렇다고 고종이 이 한양 도성 외곽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재면이었다.      

원세개가 조금은 당황한 듯 하였지만, 이미 조선 왕에서 자신이 왕보다 높다는 듯 위세를 떨쳤던 자였기에 다소 놀랐으나, 콧방귀를 뀌며 비웃을 뿐이었다.     

“임금의 말을 무게가, 어떤 건지 아십니까 주상? 제후국의 왕으로서 황제 폐하께 역모라도 꾀할 셈입니까?”     

원세개의 말을 뒤로 하고 고종이 재면에게 걸어왔다.      

“형님께서 남기고간 그림들, 책들 잘 보았습니다. 빠른 채비로 떠나셨으면서도 많은 것들을 남겨 놓으셨더군요. 엊그제, 스페인과 영국에서 도착했던 내용물 때문에 청으로 가신 거죠?”     

원세게개 이마를 찌푸리며 고종의 말을 독해하려 했다. 청으로 간 이유를 말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청에서, 무슨 짓을 꾸민겁니까.”     

고종은 원세개의 말을 무시하고 재면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형님의 집에 가보았습니다. 어릴 적의 반가움과 더불어 저한테 보여주셨던 것보다, 많은 자료들이 있더군요. 거기서 이런 것을 보았습니다.”     

재면은 고종이 본 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담아 놓았기에, 자신은 왕족이니 함부로 누가 뒤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고종이 직접 찾아보았다니. 고종이 제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은 임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종은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원세개에 던져넣었다. 원세개는 조심히 그 두루마리르 주워 펼쳐보았다. 원세개가 보고 놀라 급히 말했다.     

“이런! 역적들을 처단해라! 전군 발포해라!”     

청나라 병사들이 우왕좌왕 놀라 했다. 고종이 팔을 들어 내리자, 조선의 시위대가 발포했다. 총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흥선대원군이 놀라 고종과 재면을 끌어안았다. 그래도 아들 둘이라고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고종이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끌었다.     

“해보십다. 형님”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고종의 뒤로, 해가 보였다. 발포 소리가 끝나지 않았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조선군과 청나라군이 있었다. 총알은 신기하게도 세 부자를 피해갔다.      

김옥균과 이완용이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원세개가 모든 청나라 군을 끌고 온 것이 아니라 청나라군이 다 쓰러진 후 격전은 끝났다.      

원세개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고종이 원세개에 보여준 재면의 그림은 환구단이었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일은, 오로지 황제만이 가능한 일이었고, 이를 계획했다는 것 자체가 청 황제에 대한 역모였다.     

400년 전, 장영실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배출하고도 명 황제에 대한 권위 대한 도전이었다는 이유로, 조선은 스스로 만든 달력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400년 후, 세종 대왕마저도 결심하지 못한 일을, 오늘날의 고종이 하고 있었다.      

그 든든한 후원자로, 고종의 양아버지의 환생자인 재희가 회귀한, 고종의 형 재면이 있었다. 그리고 두 자식을 끌어안으며, 다른 미래를 꿈꾸게 된 흥선군과 이를 지켜보는 개화파 김옥균과 이완용이 있었다.      

전투에 패배한 원세개는 분노한 채 퇴각한 후 파견된 군대를 모두 이끌어 대궐을 포위하려고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 군대가 청나라의 군대 무장해체를 하고 있었다. 분노한 원세개는 본국으로 서둘러 귀국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원세개는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날 밤 재면이 직접 원세개를 암살하기 위해 나섰다.      

조선은 원세개의 죽음을 상처가 덧나 생긴 후유증으로 발표했다. 청나라는 진상조사를 요구하며 사신을 파견했다. 조선은 그 기간 동안 독립을 선포한다.           

11화     

경복궁 근정전에 문무백관이 모여 정세를 논하고 있었다. 지금가장 크게 논하고 있는 것은 제국 선포였다.      

재면은 계획처럼 원세개를 암살하지는 못했지만, 죽였다. 일이 더 크게 벌어진 것이다. 이쯤 되면 제국의 선포는 몰라도 독립선언을 빨리 해야만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중에 앞으로 나서 말했다.      

“신 이재면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청나라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원제국마저도 하지 못한 간섭을 하려고 합니다. 이에 조선의 충신으로 주상전하께 고합니다. 천하를 도모함에 조선의 백성들은 청의 2억에 인구 미치지 못하는 2천만의 인구를 가졌으나, 이는 유럽의 인구가 채 2억이 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많은 숫자입니다.”     

재면의 얘기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구의 기술을 보아 제작된 지구 본이라는 기구를 보면 반도의 크기는 세계의 크기에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이전부터 이뤄 놓은 성과를 보면 선진 국가로 칭송받아 세계의 정세에 으뜸 중 하나인 독일 제국의 구텐베르크보다 백 년은 앞선 기술을 고려 시대 이미 개발해왔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하늘을 읽는 능력을 통해 이미 직접 하늘과 소통하는 천문을 깨우쳤고 스스로 기록하는 문자마저도 창안한 일이 수백 년 전의 일입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재면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이는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이 감히 눈을 밖으로 두지 않고 안으로 두어, 스스로 수련하고, 깨우치려고 했으나 세상의 흐름이 이에 맞지 않아 나라의 기틀마저도 위험해지고 있는 지금입니다. 나라가 위험해질 때마다 의병이란 이름으로 백성들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때, 더이상 옛 성인들의 이야기만이 맞다 주장할 수 없다고 사료 되옵니다.”     

동의를 표해 고개를 끄덕이는 자가 태반이었으나 다소 표정을 어둡게 하며 반대를 표하는 자들도 있었다.      

“특히 성인들로 추앙받는 공자, 맹자 선생은 사대의 예를 다해 모신 중국의 선인들이지 조선의 선인들이 아닙니다. 조선에도 민족의 얼을 홍익인간의 뜻으로 세우신 단군이 있고, 태왕들과 어라하와 이사금으로 스스로 칭제하였던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와 발해가 있습니다.”     

옛 나라의 얘기들이 나오는 이유가 궁금해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을 계승한 천자국 고려가 바로 고려 이전의 역사입니다. 그 고려를 계승한 조선은, 스스로 명을 치려 했으나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자정작용을 해 평화를 사랑했지만 이상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조아리는 것이 아닌, 위대함을 보여주어야 할 때라고 사료됩니다.”     

고종이 가만히 집중하여 재면을 보고 있었다.      

“이는 필시 하늘의 뜻이고, 땅의 지혜라고 봅니다. 그래서 신 이재면은, 주상전하께 청의 제후에서 벗어나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지켜내는 독립국임을 선포함과 동시에 불가 스럽게 맺어진 모든 협정을 파기 할 것임을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재면의 긴 보고가 끝났다. 모두 재면을 보고 있었다. 재면이 이끄는 개화파가 흥선대원군을 따르는 온건파가 서로를 마주보며 대립하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임오개혁은 온건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고종과 흥선대원군에게로 향햇다. 재면이 자리로 들어가자 흥선대원군이 앞으로 나왔다.       

“스스로 지켜내고, 스스로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힘을 빌리는 것은 어리석은 법입니다. 주상.”     

흥선대원군은 재면에 비해 짧게 말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를 보고 김옥균이 길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온건파의 수장인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들을 지지하니, 이제 누가 이재면의 주장을 막겠는가 싶었는데, 이때 박영효와 서재필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사람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재면에 대한 반대였을까?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한 독립의 선언이 아닌, 칭제를 건하였다.      

그러자 고종이 눈을 감고 잠시 생각했다. 모두가 고종의 생각을 기다렸다.      

겨울이었다. 밖은 추었다. 오도돌 떠는 신료들도 있었다. 문무백관을 멀리서 지켜보는 어린 이들도 있었다. 역사대로라면 훗날 순종이 되는 이척과, 재면의 아들 이재선이었다.      

“칭제라, 제국을 말하는 가?”     

고종의 질문을 받은 신하들은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 말을 꺼낸 서재필과 박영효가 말했다. 그들은 입헌군주국으로 개국하여 의회와 내각을 구성해 치세를 떨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쪽에선 다른 방향을 제시했는데, 쉽게 말해 박영효와 서재필이 주장한 입헌군주제의 방식은 총리 중심으로 정치 시스템이 돌아가는 영국식이었고, 다른 주장은 황제의 중심으로 정치 체계를 갖는 독일식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재면이 시끄러운 시장바닥처럼 변해버린 관료들을 앞에서서 고종을 보았다. 고종이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킨 이후에 재면에게 말하라 일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입헌군주제의 방식은 나중에 다시 논의해도 됩니다. 하지만 정할꺼면 빨리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독일도, 영구도 아닌 조선 식의 새로운 방법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삼봉 선생의 재상 정치처럼 재상들이 논의하고 군주가 결정하는 일입니다.”     

고종은 재면의 말을 듣고 표정이 일그려졌다. 결국은 황제에 올라도 권력은 지금보다 낮아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민영익이 나서서 말했다.      

“왕의 권력보다 높은 것이 황제의 권력입니다. 칭제를 통한 권력의 향상은 모든 결정은 결국 황제를 통해야 옳은 줄 압니다.”     

“그 뜻이 옳다.”     

재면이 민영익에게 반대하기도 전에 고종이 말했다. 여기서 더이상 말을 이으면, 이는 고종에게 반하는 행위가 되었기에 재면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의견을 낼 수 있는 위치는 오로지 흥선대원군 정도 밖에 없었지만, 두 아들의 대치 상황을 그저 못마땅하게만 바라보는 흥선대원군이었다.      

“그대들의 뜻이 옳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함을 만세계에 선포할 것이다.”     

고종이 칭제를 결심하고 말했다. 그러자 만세 소리가 이었다. 지금껏 고려 이후로 불러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몇백년만에 아니 원나라에 국권을 침탈당하고 수 백년만에 불러보는 만세합창이었다.      

고종이 손을 들어 합창을 멈추게 했다.      

“이제 고민인 것이 있다.”     

문무백관이 고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라의 기틀이 바뀌는 것인데, 나라의 이름을 그대로 조선으로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이름도 옛 개국을 통했을 때 대명에 화령과 조선중 하나를 선택 해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은 이름이 아닌가.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근정전이 다시 한 번 소란스럽게 변했다. 고종의 말이 맞았다. 조선이라는 이름을 대체할 말을 찾기 위해서였다. 가락, 계림, 구루, 구리, 가우리 등 많은 이름들이 오고 가던 중에 재면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대한을 말해야하는 건가’     

당연히 알고 있었던 미래였기에 말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상하게 입이 무겁고, 발도 무거웠다. 기다리고 싶었다. 자신이 나서는 것보단, 왜 그런지 자신도 몰랐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때 고종이 다시 한 번 모두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고종이었다. 그런 고종을 바라보는 재면은 처음으로 회귀한 이후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전율이라고 표현에 맞는 것인가 싶었다.      

분명 실제 역사에서 이런 장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게 하늘이 정해준 천명인 걸까, 운명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그림을 보고 그때부터 쭉 생각해왔던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재면이었다.      

”.....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마침내 대한제국의 선포를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하늘이 제사를 지내는 천제가 끝나면 이제 조선은 제국이다. 정확히 대한제국이 되는 것이다.      

비록 처음부터 민주주의에 가까운 형태는 아지만, 운명이 대한제국을 택했듯이, 역사가 대한민국을 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운명의 다리 역할을 재면 자신이 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칭제를 결심한 이후 곧장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재면이 미리 올린 대로 제국의 구성을 하기로 시작했다. 전기와 철도와 같은 각종 설비와 더불어 화폐와 토지 개혁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제 그 시작의 첫단추를 꿰는 일만 남았다.      

일본군은 대한제국에게 요청에 의해 반발하며 군대를 본국으로 후퇴시켰다. 청나라의 나머지 군대는 항복해 포로로 있다. 재면은 이들은 어차피 나중에 적이 될 사람들이었기에 계속 구금하고 있던가, 아니면 모두 처형시키는 방향을 고민 중이었지만,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제국의 아침에 일으키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다.      

사방의 신을 가리키는 커다란 네 개의 북을 치며, 그 위로 황룡과 천젱에게 직접 비는 천자의 제천의례을 거행하는 고종, 아니 광무제였다.      

재면 자신이 효명세자인 시절에도 이 정도는 생각못했었다. 칭제라니, 현대의 재희에야 이런 역사를 아니까 이런 거지만, 어쩌면 고종도 대단한 인물이었는데, 시대가 그래서, 상황이 그래서 자신이 아는 나약한 모습으로 밖에 남지 못했던 게 아닐까 생각하는 재면이었다.      

당장에 그렇게 많은 반란 모의들, 지금 고종을 돕고 있는 박영효와, 서재필은 수많은 반란을 모의해 고종이 매우 혐오하는 인물들이지 않은가, 오히려 좋아했던 이완용이 마지막에 배반하는 것도 재밌는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하나 된 마음으로 황제를 돕고 있었다.      

황제가 제천의례를 거행하고, 내려오는 길에 광무제가 옆에 있던 재면을 보고 말했다.      

”이제 시작이군요 형님”     

역사에 기록된 사실 때문에, 처음 봤을 때는 나약하게만 보았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고, 이런 대사까지 치니까 달리 볼 수 밖에 없는 재면이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폐하’라는 말을 황제가 듣고 생각하였다. 듣기 좋은 말인가, 무겁고, 책임있는 말인가 생각하는 듯 보였다.      

조선의 독립선포는 곧이어 독립신문을 통해, 황립 신문을 통해, 세계 곳곳에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아득히 넘어 만리를 넘어 전파되었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게도 또 청나라에게도였다.      

청나라는 자신의 군대를 돌려보내지 않고 포박하고 있고, 제후국으로서의 충심을 버리고 역모의 죄를 저지르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꿔 칭제를 선언한 대한제국에게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하였다.     

“이상, 황제 폐하의 황명을 받으시오”     

청나라가 보낸 사신이 자신이 충성하고 있는 청 황제의 황명이 적힌 문서를 읽었다. 당당했다. 가히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하지만, 제국으로서의 위용은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최신 아포를 통해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을 때 그 위용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      

광무제가 반응하기도 전에,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재면이 앞으로 나서서 친위대에게 일렀다. 그 말을 들은 광무제도, 청의 사신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지 의심하며 놀랐다.     

“저자를 가두어라”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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