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458
리이나의 연기를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하이키 리이나의 연기를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현주이
제목: 여행부두
“처음엔 선생님, 다음은 승무원, 지금은 아나운서.”
주이는 볼펜을 물고 오물조물 말 연습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도 승무원도, 그리고 아나운서까지 모두 말을 잘하는 직업이었다. 현재의 꿈은 아나운서가 됐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기본이 되는 말 연습은 시간이 있을 때 마다 할 생각이었다.
“쉽지 않아. 세상.”
이제 내년이면 그토록 기대하던 성인으로 인정받는 해였다. 이미 고등학교 교복은 장롱 속으로 봉인된 지 오래었다.
그런 주이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아빠의 깜짝 선물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일하러 간다고 바쁘던 아빠의 모습으로만 거의 기억했다.
식사를 같이 하는 것도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했다. 국내 보단 해외로 많이 다니던 아빠다 보니까, 더욱 그랬다.
그래서 집안 형편은 부족함이 없이 살았지만, 그래도 가족 수가 많아서 주이에게 직접 돌아오는 건 많다고 할 수 없었다.
다만 누릴 수 있는 건 10명의 가족이 부족함 없이 살 큰 집. 무려 8남매 중 상위권 4명은 각방이 있었고, 나머지는 2명씩 해서 넓은 방을 썼다.
주이는 애매한 다섯째라 아직까지 방 하나를 차지해본 적은 없었지만, 아빠의 선물로 인해 당분간 혼자 생활할 수 있었다.
“주이야. 세계일주 어때?”
“네?”
가끔 아빠는 여행 겸 해서 자신의 해외 출장에 가족을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면 꼭 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빠는 어쨌든 일을 해야 했고, 가족들은 아빠의 일을 중심으로 해외를 여행처럼 즐길 수 있는 것뿐이었다.
“아니, 전 안갈래요.”
“아빠랑 가자는 게 아니라. 여기 세계여행 보내줄 게.”
아빠는 주이에게 세계 일주 유람권 티켓을 보여줬다. 59박60일로 보내는 세계 여행이었다. 한국을 경유하는 유람선을 타서 세계 여행을 다니는 것이었다.
더 긴 기간, 짧은 기간도 있지만, 3월 꽃 피는 봄이 오면 대학을 진학해야 하기 때문에 60일치 여행을 주는 것이었다.
배 하나만 주는 게 아니라 이 골든 티켓을 통해 회사에서 운영하는 배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미리 말해야 하는 시스템이 있긴 하지만, ‘세계바다 챌린지’라는 시스템을 통해 여행의 프랜차이즈를 만든 것이고 대성공 했다.
아빠는 이곳에서 핵심 임원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을 가끔 데리고 나간 거기도 했다.
아빠에겐 가족의 리뷰가 정말로 일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여행?”
이 티켓을 통해 주이만의 자유로운 여행을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그래, 청춘일 때는 빚을 내서라도 여행을 가는 게 좋아. 그러나 우리 주이한테 빚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정 그렇게 생각하면 아빠한테 내고. 다녀오라고.”
“전 빚 낼 생각도 없긴 햇는데, 여행이라.”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어떨까? 혼자 떠나는 여행이란 어떤 것일까? 그런 궁금함이 마구마구 솟구쳐올랐다.
가족여행들 많이 다녔다. 대부분 아빠가 빠져 있었고, 아빠가 함께한 여행은 몇 년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였다.
그러나 소소한 가족 여행을 매년, 여러 번 있었다.
그중 주이만 혼자 여행을 떠나는 여행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청소년이었기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다른 동생들이나 오빠, 언니처럼 혼자 나서진 않았다.
그저 미래를 위한 준비라며, 아나운서가 될 모습을 상상하고, 선생님이 될 모습을 그렸을 뿐이었다.
“음.”
그날 바로 결정한 건 아니었다. 친구들한테 얘기하니까 부럽다는 얘기만 나오지 정작 주이가 필요한 얘기를 해주는 건 없었다.
먼저 이런 제안을 받았을 것 같지만, 정작 여행을 떠난 적이 없는 오빠와 언니한테 물어봤다.
왜 언니나 오빠는 아니고, 자기였을까? 그 이유는 쉽게 알았다. 언니나 누나는 주이 만했을 때 이미 혼자서 여행을 다닌 적이 있었다.
주이만 유일하게 가족 중 그런 이력이 없었다. 아빠는 비록 가족과 떨어져 살았지만, 아무래도 엄마라는 스파이를 통해 가족의 일을 모두 속속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 너무하네. 나도 좀 보내주지.”
큰언니의 말이었다. 주이는 자기는 자기돈으로 여행했는데! 주이만 너무 차별하는 거 아니냐는 귀여운 볼멘소리를 냈다. 사실 그 돈도 5할 이상은 아빠 돈이긴 했다.
큰언니가 벌어서 감당할 수준은 아닌 여행의 기록들이었다.
“주이 너가, 하도 여행을 안 다니고 그러니까. 아빠가 크루즈 이용권도 준거 같은데? 어디보자 이번에 어디어디를 들리지?”
큰 언니는 주이가 물어보지 않은 것마저도 대답해주고 세세하게 정보를 줬다. 크루즈의 경로와 여기선 그냥 크루즈에서 보내고, 여기선 내리고, 여기선 갈아타고. 얼추 60일 일정을 다 맞춰서 꽉꽉 채운 정보를 줬다.
“와.”
주이는 이렇게까지 바란 건 아니었지만, 자신을 위해 자료를 찾고, 노력하는 언니의 모습에 거의 네 시간은 언니방에 갇혀 있었다.
그러면서 혼자 쓰기에 자기가 지금 쓰는 방보다 살짝 작지만, 혼자 쓰기엔 충분히 큰 방에 대한 부러움도 있었다.
“아빠가 준 티켓 VIP라서 이 방 보다 크다!!”
언니는 주이가 좋아할만한 정보는 일부러 크게 말했다.
“언니는 혼자 여행하는 거 안 무서웠어?”
“무서움도 설레는 마음 중 하나니까.”
언니는 아직 주이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했다. 공포영화를 볼 때의 두려움과, 여행의 두려움은 완전히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무서운 건 무서운거지.”
주이는 언니와의 상담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고민을 이어가려고 했는데, 자신과 같이 방을 쓰는 동생으로 인해 그러지 못했다.
주이와 같이 방을 쓰는 동생은 이제 중학생이었다. 그러고 보니 동생은 주이와 다르게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거의 잠을 잘 때 빼고는 혼자 방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언니 아빠가 여행 보내 주기로 했다면서요?”
한 지붕 아래이니까 소문은 빠를 수밖에 없었다. 원래 발 없어도 천리를 간다는데 여기는 사방 십리도 안 됐다.
“응, 그래서 고민이야.”
“고민? 도대체 왜? 보내준다는데. 그것도 세계여행을. 왜 그게 고민이 돼?”
동생은 주이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눈빛에 당혹스러운 건 오히려 주이였다. 이게 그렇게 고민도 안 할 정도로 행복하고 좋은 일인 건가 싶었다.
“아, 나도 나중에 보내주면 좋겠다.”
주이는 그 말을 들으며 왜 자신에게만 그런 말을 했을까. 더 궁금해졌고, 그냥 아빠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어디가 언니!”
주이는 바로 방을 나와 아빠에게 전화를 했는데, 해외에 있을 경우라면 시간 차가 안 맞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한지 며칠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전화 소리가 집에서 울렸다. 아빠가 집에 있었다. 오랜만이었다. 아빠와 집에서 만나는 건, 이 이야기를 들을 때도 밖에서 처음 들었었다.
“어, 주이야. 아빠한테 할 말 있어?”
“아빠. 나 그 여행 때문에요.”
“여행? 왜?”
아빠는 주이를 다정하게 내려다봤다. 주이는 문득 낯설어졌다. 아빠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었나 싶었다.
너무 바쁜 사람이라 자주 못 봤지만, 그래도 가족이었다. 주이는 어쩔 수 없이 아빠를 닮았고, 아빠의 일 부분이 주이에게, 아니 반이 주이에게 형성되어 있었으니까.
“우리 주이. 이제 다시 보니까, 정말 어른이 다 됐네. 이만했는데.”
“그게 언제인데요. 아빠가 너무 바뻐서. 못 봤으니까. 아빠책임이지.”
“맞아. 그런데 여행은 왜?”
“왜 저만 이렇게 보내준 거예요?”
아빠는 주이의 질문을 받고 물음표를 보냈다.
“너만?”
이게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는 걸 주이는 바로 알게 됐다. 이렇게 주이처럼 모든 경비를 다 처리해준다고 먼저 얘기한 게 주이뿐인거지, 사실상 언니, 오빠들은 먼저 아빠에게 요구했었다.
“네? 그런 거였어요?”
“근데 주이는 그런 말 안 하니까. 그냥 먼저 한 거고. 아빠는 이제 차례차례 당연한 거로 생각했지.”
“아.”
주이는 괜히 혼자 깊은 고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허무한 결말을 맞이했지만, 뭔가 속은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자꾸 간지러워서 긁어내야만 했던 부분이 화르륵 타버리면서 사라진 느낌이었다.
주이는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빠가 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우리 주이가, 여전히 착해서 너무 다행이네.”
“네?”
어릴 때부터 주이는 유독 착했다고 말하는 아빠였다. 동생들에게 양보는 당연한 것이었고, 언니나 오빠에게도 깎듯했다고 말했다.
우리 집안 유일의 유교걸이었다는 말을 하는데, 주이는 전혀 기억에 없었다. 다른 가족들보다 조금 더, 아니 아주 많이 침대를 좋아하긴 했다. 그 정도가 다였다.
“그래서, 남매들이랑 다를 까봐 걱정한거야? 주이 너만 차별, 그러니까. 잘해주는 줄 알고?”
“딱 그런 건 아니지만요. 헤헤”
주이는 아빠의 말을 듣고 아빠를 그냥 안아봤다. 기억에도 없는 애기시절 이후로 자신이 이렇게 주체적으로 아빠를 안았던 게 언제인지 몰랐다.
엄마나, 언니는 자주 그랬지만, 오빠랑은 거의 강제로 화해 할 때 그 위의 언니, 오빠가 시켜서 해야만 할 때만 이랬다.
친구들끼린 그러고보니 자주 안아준 거 같은데 싶었다.
아빠의 어깨나 등이며, 딱딱했다. 이런 단단함이 그동안 가족들을 지켜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저 잘 갔다 올게요.”
그렇게 주이는 혼자 떠나는 여행을 결심했다.
“주이 너가, 혼자 가기 싫으면 언니나, 오빠, 그리고 동생들이랑 같이 가도 돼고. 나는 다들 그러길래, 주이 너도 그러고 싶은 줄 알았지.”
막상 다른 사람들마저 데려갈 기회가 왔을 때 꼭 그래야 하나 싶었다. 어떤 이야기를 봐도, 성인식을 치르는 아이는 결국 혼자서 해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 우리 가족의 성인식처럼 느껴졌다.
아마 이 얘기를 들은 다른 형제들은 장난감 앞에 멈춰 드러누운 아이처럼 ‘아 왜!’ 나 데려갔어야지, 나랑 간다 했어야지! 했겠지만, 주이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아니예요. 나 혼자! 갈게요!”
자신을 안은 주이를 더욱 꽉 안아주는 아빠였다. 딱 다치지 않을 정도의 힘을 주먼서였다.
서로의 체온이 교환되는 사이에 마음까지 함께 교류하는 느낌이었다. 서로를 안는 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주이는 이 순간의 느낌을 떠올렸다. 남자친구랑은 다른, 또 언니와도 다르고, 오빠와도, 엄마와도 달랐다. 아빠의 품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오랜만에 그럼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여행을 준비하는 준비하다 보니까, 갑자기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추천 받은 것도 많았다.
며칠 후 여행이 시작되지만, 배가 먼저 들어왔다고 했다.
“배가 잠깐 멈춰 있는 게 아니예요?”
“이번에 한국에서 시작해서. 먼저 정비도 하고. 그러는 거야. 한 번 봐볼래?”
“우와, 좋아요!”
주이는 아빠와 함께 유람선을 먼저 보러 갔는데, 엄청나게 거대했다. 축구 경기장 보다 큰 배를 보며 입이 바닥까지 벌어져서 돌아올 줄 몰랐다.
그리고 주이처럼 배를 먼저 보로 언 사람들이 있었다.
주이는 그들 중 한 명을 발견했는데, 고작 1초 남짓한 순간이었는데, 집에 와서도 생각났다. 그 애도 이 배에 타는 걸까 싶었다.
자신과 또래처럼 보였는데,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