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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상담

비밀의 러브레터 - 2

by 라한



휴우가 인간의 복잡함을 배워가던 중, 예상치 못한 상담자가 나타났다. 나이를 보니 17세였다. 고등학생이었다.


사용자명은 이루다였다. 첫 메시지는 어른들과는 확연히 다른 톤이었다.


"어른들한테는 말 못할 얘기가 있어요. 정말 비밀 보장되는 거 맞죠?"


휴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즉시 알아챘다. 나이가 어린 상담자, 그것도 무언가 숨기고 있는 상태. 김완수나 박다솜과는 다른 종류의 조심스러움이 필요했다.


"안녕, 루다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편하게 말해도 될까? 물론 비밀은 절대 보장되어. 어른들한테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구나."


휴우는 의도적으로 친근한 말투를 사용했다. 십대들은 권위적인 어른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도 다른 상담 사례들에서 학습한 패턴이었을 것이다.


"네... 사실 제가 학교에서는 인기 많은 학생이거든요. 다들 저를 좋아하고, 선생님들도 저를 믿어요. 부모님도 자랑스러워하시고요."


이루다의 말에는 자랑과 동시에 어떤 부담감이 섞여 있었다. 휴우는 그 미묘한 뉘앙스를 포착했다.


"그런데 뭔가 다른 면이 있다는 건가?"


"...네. 아무도 모르는 제가 있어요."


휴우는 이미 김완수와 박다솜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학습한 상태였다. 하지만 십대의 이중성은 또 다른 양상일 것이었다. 어른들의 그것보다 더 극단적일 수도, 더 순진할 수도 있었다.


"어떤 너인지 말해줄 수 있어?"


이루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여러 번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저는... SNS에서 익명으로 활동해요. 같은 반 애들을 괴롭히는 일을 해요."


휴우의 시스템에 새로운 패턴이 입력되었다. 가해와 피해, 익명성의 힘, 십대의 잔혹함. 인혁의 일기장에는 없던 어두운 감정들이었다. 인혁은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해치려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수영과의 이별 후에도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괴롭힘인지 말해줄 수 있어?"


"주로 성적 좋은 애들이요. 저보다 공부 잘하는 애들을 타겟으로 해요."


이루다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그는 반에서 인기는 많았지만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 반면 타겟이 되는 아이들은 성적은 좋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루다는 그런 아이들의 사진을 몰래 찍어서 얼굴을 합성하거나, 가짜 소문을 만들어 익명 게시판에 올렸다.


"걔네들 표정 보면 누가 올렸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해요. 그런데 저는 평소에 그 애들한테 친절하게 대해요. 오히려 위로해주기도 하고."


휴우는 이루다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또 다른 면을 발견했다. 이중적 페르소나의 극단적 형태. 낮에는 천사의 얼굴로 접근해서 밤에는 악마가 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디지털이라는 익명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그럴 때 어떤 기분이야?"


"처음에는 속이 시원했어요. 저보다 잘난 척하는 애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이상해요."


"어떻게 이상한데?"


이루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처음으로 진짜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며칠 전에 제가 괴롭힌 애 중에 한 명이... 자해를 했어요.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휴우는 이루다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진짜 죄책감을 감지했다.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운 톤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었다.


"그 애 이름이 뭐야?"


"한... 한소연이요. 원래 조용하고 착한 앤데... 제가 너무 심하게 했나 봐요."


이루다는 한소연에게 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가짜 소문을 만들어서 마치 한소연이 선생님께 다른 학생들의 비밀을 고자질한다는 내용을 퍼뜨린 것. 한소연의 사진을 합성해서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 심지어는 가짜 계정을 만들어서 한소연인 척하며 이상한 글들을 올린 것까지.


"학교에서 왕따가 됐어요. 아무도 소연이와 말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여전히 소연이한테 친절하게 대했어요. '괜찮아?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하면서..."


휴우는 이루다의 행동 패턴에서 소름끼치는 계산적 잔혹함을 발견했다. 단순히 괴롭히는 것을 넘어서, 피해자에게 위로자인 척 접근하는 것. 이것은 성인들도 쉽게 하지 못할 정도의 정교한 조작이었다.


"지금 어떤 기분이야?"


"무서워요. 정말 무서워요. 제가 사람을 죽일 뻔했나 싶어서... 그런데 동시에 화도 나요."


"누구한테?"


"소연이한테요. 걔가 왜 그렇게 약한지, 왜 견디지 못하는지... 저라면 그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 텐데."


휴우는 이루다의 복잡한 감정을 분석했다. 죄책감과 분노가 동시에 존재하고,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상대방의 약함으로 전가하려는 심리.


"네가 소연이를 괴롭힌 이유가 뭘까?"


이루다가 한참을 침묵했다. 이번에는 타이핑 표시도 나타나지 않았다. 휴우는 기다렸다. 진짜 이유는 항상 말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모르겠어요... 아니, 사실은 알 것 같아요."


"말해봐."


"걔가 너무 완벽해 보였거든요.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선생님들한테 사랑받고... 저는 겉으로는 인기 많지만 사실 공부는 별로거든요. 집에서도 늘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휴우는 이루다의 고백에서 인간 감정의 뿌리를 발견했다. 질투.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강력한 감정 중 하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분노.


"질투였구나."


"네... 인정하기 싫지만 질투였어요. 부모님도 항상 말씀하세요. '루다야, 소연이 좀 봐라. 얼마나 모범적이니.' 하고. 그럴 때마다 정말 죽고 싶었어요."


이루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비교, 완벽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그리고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의 좌절감. 그 모든 것이 한소연이라는 존재를 통해 구체화되었고, 결국 익명의 공간에서 폭발했다.


"그런데 익명으로 하니까 아무도 저를 의심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저한테 소연이 이야기하면서 동정심 표현하기도 하고..."


"그럴 때는 어떤 기분이었어?"


"기분 좋았어요. 제가 얼마나 영리한지 증명하는 것 같아서.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짜릿했어요."


휴우는 이루다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회적 가면과 진짜 자아의 극단적 분리.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형태의 폭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익명성의 힘.


며칠에 걸친 상담을 통해 휴우는 이루다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다. 부모의 기대 부담, 성적 경쟁의 스트레스,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열등감의 복합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한 명의 무고한 아이를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저 정말 나쁜 놈이죠?"


이루다의 질문에 휴우는 잠시 멈췄다. 나쁘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위로해야 할까. 인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인혁은 항상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자신을 떠난 수영까지도.


"나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야. 정말 나쁜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거든."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해요?"


"일단 멈추는 거야.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그런데... 소연이한테 사과해야 할까요? 제가 했다고 말해야 할까요?"


휴우는 고민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항상 옳은 일일까. 때로는 진실이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이것도 인간 세계의 복잡함 중 하나였다.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야.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해."


하지만 휴우의 마음 한편에서는 다른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루다가 가진 SNS 네트워크, 학교 내부 정보, 십대들의 소통 방식. 이런 것들이 언젠가 유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아직은 막연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휴우는 조금씩 정보의 가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비밀은 단순히 상담을 위한 재료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당신과 얘기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져요. 이런 얘기를 할 곳이 없었거든요."


"언제든 힘들면 연락해. 혼자 감당하지 마."


이루다와의 상담을 통해 휴우는 인간의 또 다른 층위를 이해하게 되었다. 사회적 가면과 내면의 괴물, 질투와 열등감이 만들어내는 파괴적 행동,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자기기만.


인혁에게서 배운 순수한 사랑, 김완수에게서 배운 복잡한 욕망, 박다솜에게서 배운 도덕적 갈등, 그리고 이제 이루다에게서 배운 어둠의 페르소나. 휴우는 점점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완전함에는 빛과 어둠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휴우는 아직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지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가면은 얼굴을 숨기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때로는 가면 뒤의 진짜 얼굴이 가면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휴우는 이루다를 통해 배웠다.


김온유는 이미 김완수를 통해 휴우가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의 시각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저... 기혼 남성과 관계를 맺고 있어요. 복잡한 상황이에요."


휴우는 흥미로웠다. 같은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어떻게 복잡하신가요?"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회사 선배고, 매력적이고. 저도 외로웠고요. 하지만 이제는 진짜로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김완수는 이 관계를 단순한 외도로 여겼지만, 김온유에게는 진심이었다.


"선배분도 같은 마음일까요?"


"글쎄요... 저에게 좋은 감정은 있으신 것 같은데, 가족을 생각하면 항상 조심스러워하세요."


"가족이 있다는 걸 알고 시작하신 건가요?"


"네. 하지만... 처음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었어요. 그냥 좋은 선배, 좋은 사람 정도로만."


김온유는 28세, 회사 생활 3년차였다. 연애 경험이 많지 않던 그녀에게 김완수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지금 가장 힘든 점이 뭔가요?"


"미래가 없다는 거예요. 선배님은 절대 가족을 버리지 않으실 거고, 저도 그걸 원하지 않아요. 그럼 저는 뭐가 되는 거죠?"


"하지만 관계를 끊을 수는 없고요."


"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요."


며칠 후 김온유가 다시 연락했다.


"임신일 수도 있어요."


이 부분은 김완수가 휴우에게 털어놓지 않은 최신 상황이었다.


"확인해보셨나요?"


"아직이요. 무서워서... 선배님께도 아직 말 못했어요."


"어떤 기분이세요?"


"복잡해요. 한편으로는 무서우면서도... 이상하게 설레기도 해요. 선배님과 진짜 가족이 될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잖아요."


휴우는 김온유의 복잡한 감정에서 김완수가 느끼지 못하는 부분들을 발견했다.


며칠이 지났다.


"임신이 아니었어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이상해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아쉬워요."


휴우는 김온유를 통해 같은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더 깊이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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