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러브레터 - 3
혼자인 시간
인혁은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싸며 앉아 있었다. 카페 안에는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테이블 위에 얕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벽시계가 째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다른 손님은 구석에서 노트북을 열어둔 여학생 하나뿐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더 주세요."
카운터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주문이었다. 직원의 눈빛에 '또?'라는 의문이 스쳤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인혁은 집에 가기 싫었다. 문을 열면 현관에 하얀 운동화가 한 켤레 놓여 있었다. 240사이즈. 주인은 두 달 전에 떠났지만 신발은 그대로 있었다. 매일 보면서도 치우지 못했다. 신발을 치우는 순간, 정말로 모든 게 끝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
냉장고 안 딸기 요거트도 마찬가지였다. 유통기한이 사흘이나 지났지만 버리지 못했다. 수영이 좋아하던 거였다. "이 브랜드가 제일 맛있어!" 하며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화장대 서랍에는 립밤이 굴러다녔다. 핑크 빛이 바랜 작은 튜브.
휴대폰이 진동했다. 성재였다.
-'뭐해'
-'커피 마시는 중'
-'또? 집 가라'
인혁은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집이 무서웠다. 정확히는 집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수영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어서, 들어가는 순간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리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내일 만나자'
성재의 메시지가 또 왔다. 인혁은 폰을 뒤집어 놓았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손을 잡고 걷는 커플이 보였다. 여자가 남자의 팔짱을 끼고 무언가 말하며 웃었다. 남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들의 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인혁은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 위 설탕 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찢어진 모서리가 까칠했다. 수영과 여기 왔던 적이 있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모든 카페가 수영과의 추억이 담긴 곳 같았다.
"커피 나왔습니다."
직원이 새 잔을 갖다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인혁은 고맙다고 말하며 잔을 들었다. 뜨거웠다. 혀끝이 얼얼했지만 계속 마셨다.
시간이 흘렀다. 해가 기울어 카페 안이 어두워졌다. 직원이 조명을 켜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따뜻한 불빛이 테이블을 감쌌다. 노트북 여학생은 언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인혁은 혼자 남았다. 빈 커피잔 세 개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설탕 봉지 조각들이 떨어져 있었다. 언제 뜯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휴대폰을 다시 켰다. 성재 외에 다른 친구들에게서도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언제 만날까', '요즘 뭐해', '연락 없이 살기 없기야'. 다들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답장하기 힘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잘 지내'라고 쓸 수도 없었다. 거짓말이니까. '힘들어'라고 쓸 수도 없었다. 그러면 친구들이 또 걱정할 테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시간이 되자 카페에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학생들, 직장인들, 연인들. 모두 누군가와 함께였다. 대화 소리가 카페를 채웠다. 웃음소리도 들렸다.
인혁만 혼자였다.
"죄송한데, 저희 곧 문 닫아요."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인혁은 시계를 봤다. 9시였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아, 네. 죄송해요."
일어서며 지갑을 꺼냈다. 커피값을 계산하고 카페를 나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집으로 가야 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었다.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고,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수영의 흔적들과 마주하며 잠들기까지 버티고. 그리고 다음 날 또 같은 일을 반복하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인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이 너무 밝아서.
"야, 진짜 이상해."
성재가 맥주잔을 테이블에 툭 내려놓았다. 호프집 안이 시끄러웠다. 퇴근 시간이라 직장인들로 붐볐다. 삼겹살 굽는 냄새와 맥주 거품 소리가 섞여 들렸다.
인혁은 안주를 젓가락으로 집작거렸다. 입맛이 없었다. 씹어도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뭐가."
"너 말이야. 언제까지 이럴 거야."
성재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걱정이 지나치면 짜증으로 바뀌는 법이다. 인혁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이게 뭔데."
"너도 알잖아."
성재가 고개를 저었다. 인혁은 치킨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씹지 않고 삼켰다. 목에 걸렸다. 맥주로 억지로 넘겼다.
"나도 이별했어. 하지만 이렇게 안 살았거든."
성재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 진짜 걱정돼. 맨날 혼자 카페에 앉아서 뭐해. 집에도 안 가고."
"어떻게 알아."
"다 보여. 너 요즘 어떻게 사는지."
인혁은 맥주잔을 돌렸다. 거품이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해."
"시간? 벌써 2년 넘었잖아."
"2년이 뭐야.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데 아직 안 나았어."
"약이 아니라 독이 되고 있어."
성재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인혁아, 솔직히 말할게. 수영이 결혼했어."
인혁의 손이 멈췄다. 맥주잔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고?"
"지난달에. 친구가 청첩장 받았어."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했다. 호프집의 소음도, 성재의 목소리도 멀어져 갔다.
"왜... 왜 이제 말해."
"말해봤자 네가 더 힘들어할 것 같아서."
인혁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쓰고 차가웠다. 위장이 뒤틀렸다.
"그래서 오늘 부른 거야. 이제 정말로 끝내야 해. 수영이는 다른 사람과 새 삶을 시작했어. 넌 아직도 2년 전에 머물러 있고."
성재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숨이 막혔다. 눈앞이 흐려졌다.
"한 잔 더."
인혁이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성재가 만류했지만 이미 늦었다.
"인혁아, 그만해."
"괜찮아. 기분 좋은데."
거짓말이었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분 나쁜 순간이었다. 하지만 웃어야 할 것 같았다. 성재를 안심시켜야 할 것 같았다.
"정말 축하해야겠네. 수영이 결혼 말이야."
목소리가 떨렸다. 성재가 인혁의 어깨를 잡았다.
"야, 울지 마."
"안 울어. 웃고 있잖아."
정말 웃고 있었다. 하지만 눈물이 흘렀다. 웃으면서 우는 자신이 우스웠다.
"집에 가자."
"아직 시간 많아."
"충분히 마셨어."
성재가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인혁을 부축했다. 인혁은 비틀거렸다. 술이 확 올라왔다.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공기가 뺨을 때렸다.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하지만 가슴은 여전히 아팠다.
"택시 타자."
"걸어갈래."
"너 지금 못 걸어."
"걸을 수 있어."
인혁이 비틀거리며 걸었다. 성재가 옆에서 부축했다. 가로등이 흔들려 보였다. 아니, 자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성재야."
"응."
"나 왜 이럴까."
"모르겠어. 너만 알겠지."
"나도 모르겠어."
그게 진심이었다. 왜 이렇게 오래 아픈지, 왜 놓아줄 수 없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별은 누구나 겪는 일인데, 왜 자신만 이렇게 힘든지.
"수영이는... 행복할까."
"당연히 행복하겠지. 좋은 사람 만났으니까."
"나보다 좋은 사람?"
성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인혁은 깨어있었다. 술이 깨면서 현실이 다시 선명해졌다. 수영의 결혼. 그 말이 가슴에 못처럼 박혀 있었다.
"들어가."
"너는?"
"나 진짜 괜찮으니까 들어가."
성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인혁을 봤다. 하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모든 걸 다 말했다.
"내일 연락할게."
"응."
인혁은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하얀 운동화가 여전히 놓여 있었다. 이제 정말로 주인이 없는 신발이 되었다. 영원히.
"너 이렇게는 안 되겠다."
성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카페 창가 자리였다. 오후 햇살이 테이블을 비추고 있었다. 인혁은 아메리카노를 젓고 있었다. 설탕을 넣지도 않으면서 계속 저었다.
"뭐가?"
"사람 만나야 해."
"만나고 있잖아. 너랑."
"그런 뜻이 아니야."
성재가 한숨을 쉬었다.
"여자 말이야. 소개팅."
인혁의 손이 멈췄다. 커피 스푼이 잔에 닿는 소리만 들렸다.
"싫어."
"왜?"
"그냥 싫어."
"이유를 말해봐."
인혁은 창밖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모두 바쁘게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목적지가 있어 보였다.
"준비가 안 됐어."
"언제까지 준비할 거야?"
"모르겠어."
성재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인혁아, 수영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미 끝난 일이야."
"끝나지 않았어."
"너한테만 끝나지 않았어. 수영이한테는 진짜 끝났어."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인혁은 커피를 마셨다. 쓰고 식어있었다.
"한 번만 만나봐. 부담 갖지 말고."
"..."
"민주 동생 있잖아. 걔 소개해줄게."
민주는 성재 여자친구였다. 인혁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동생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관심 없었다.
"어떤 애인데?"
"좋은 애야. 성격도 좋고, 예쁘고."
"수영이보다?"
성재가 말문이 막혔다.
"비교하지 마."
"비교 안 할 수 없어."
"그러니까 문제야."
성재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한 번만. 정말 한 번만 만나보자. 안 되면 말고."
인혁은 오랫동안 생각했다. 거절할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성재의 간절한 눈빛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이 친구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한 번만."
"진짜?"
"응. 한 번만."
성재의 얼굴이 밝아졌다.
"토요일 어때? 영화 보고 밥 먹고."
"영화는 싫어."
"왜?"
"수영이랑 자주 봤거든."
"그럼 뭘 할까?"
"그냥... 커피나 마시자."
"알았어. 커피로 하자."
약속을 정하고 나니 후회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성재가 너무 기뻐하고 있었다.
토요일이 왔다. 인혁은 옷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뭘 입어야 할까. 수영과 데이트할 때는 고민 없이 정했는데, 지금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무난한 셔츠와 청바지를 골랐다. 거울을 봤다. 얼굴이 야위어 보였다. 요즘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했다.
약속 장소는 홍대 근처 카페였다. 일찍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긴장됐다. 아니, 두려웠다.
5분 늦게 여자가 들어왔다. 키는 보통이고, 머리는 어깨까지 오는 단발이었다. 화장을 연하게 했다. 예뻤다. 하지만 수영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안녕하세요. 혜진이에요."
"인혁입니다."
악수를 했다. 손이 부드러웠다. 수영의 손과는 달랐다. 비교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저절로 비교됐다.
"뭐 드실래요?"
"카페라떼요."
"저는 아메리카노로."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렸다. 뭘 말해야 할까. 소개팅이 처음이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은 뭐 하세요?"
혜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출판사 다녀요. 편집자요."
"와, 멋있다. 어떤 책 만드세요?"
"소설이랑 에세이."
"저 책 읽는 거 좋아해요. 요즘 뭐 읽으세요?"
인혁은 대답을 망설였다. 요즘 읽는 책은 수영이 남기고 간 것들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던 작가들의 책을 읽으며 그리워하고 있었다.
"별로... 요즘 안 읽어요. 바빠서."
거짓말이었다. 매일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저는 에세이 좋아해요. 특히 연애 에세이."
혜진이 웃으며 말했다. 밝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인혁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연애 에세이. 수영도 좋아했던 장르였다.
"그런 거 쓰면 어떨까요? 남자 입장에서 본 연애 이야기."
"제가요?"
"네. 분명 재밌을 거예요."
인혁은 쓸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수영과의 2년. 하지만 그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였다. 마지막 장이 없는 소설.
"생각해볼게요."
대화가 이어졌다. 혜진은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웃음도 많고, 말도 재밌게 했다. 분명히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혁은 계속 수영을 떠올렸다.
'수영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수영이는 이런 취미 없었는데.'
'수영이 웃음소리는 이거보다 더 예뻤는데.'
자꾸만 비교하고 있었다. 안 하려고 해도 저절로 됐다.
"혹시 전 여자친구 있으셨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인혁이 움찔했다.
"왜...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아니에요. 그냥... 계속 딴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들켰다. 혜진은 눈치가 빨랐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힘든 이별이셨나 봐요."
혜진의 목소리가 따뜻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네... 좀."
"많이 사랑했나 봐요."
인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목이 메었다.
"시간이 약이에요. 저도 그랬거든요."
혜진이 위로했다. 하지만 인혁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되고 있었다.
"죄송해요. 오늘 상태가 안 좋나 봐요."
"괜찮아요. 이해해요."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혜진의 얼굴에 실망이 스쳐갔다. 당연했다. 소개팅 상대가 다른 여자 생각만 하고 있으니.
한 시간 만에 만남이 끝났다. 혜진은 먼저 일어났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형식적인 인사였다. 다시 만나자는 말은 없었다.
"네. 죄송해요."
"괜찮아요. 안녕히 가세요."
혜진이 나간 후, 인혁은 혼자 카페에 앉아 있었다. 첫 소개팅이 이렇게 끝났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성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거짓말할 수도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성재였다.
'어떻게 됐어?'
인혁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잘 안 됐어.'
'왜?'
'잘 모르겠어.'
거짓말이었다. 이유를 알고 있었다. 수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괜찮아. 다음에 또 다른 사람 소개해줄게.'
성재는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인혁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것 같았다.
카페를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에 하얀 운동화가 여전히 놓여 있었다. 오늘따라 더 외롭게 보였다.
"이번엔 정말 괜찮은 애야."
성재가 또 다른 소개팅을 주선했다. 첫 번째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 됐다.
"회사 후배인데, 성격도 좋고 예뻐. 너랑 잘 맞을 것 같아."
인혁은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성재의 간절한 눈빛을 보니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 친구가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한 번 더만."
"좋아! 이번엔 진짜 잘 될 거야."
두 번째 소개팅은 영화관에서였다. 상대는 지혜라는 이름의 25살 회사원이었다. 첫 번째보다 더 예뻤다. 화장도 정성스럽게 했고, 옷도 잘 차려입었다.
"안녕하세요. 지혜예요."
"인혁입니다."
인사를 나누고 영화표를 끊었다. 로맨틱 코미디였다. 지혜가 고른 것이었다.
영화가 시작됐다. 스크린에서 남녀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이 나왔다. 첫눈에 반하는 뻔한 스토리였다. 하지만 인혁은 집중할 수 없었다.
옆에 앉은 지혜가 신경 쓰였다. 아니, 정확히는 지혜가 수영과 너무 달라서 신경 쓰였다. 수영은 영화 볼 때 조용했는데, 지혜는 중간중간 반응을 보였다. 웃기는 장면에서 크게 웃고, 감동적인 장면에서는 킁킁거렸다.
영화 중간에 이별 장면이 나왔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떠나는 장면이었다. 여자가 울면서 매달렸다. 남자는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인혁의 가슴이 찔렸다. 수영과의 이별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붙잡고 싶었지만 붙잡을 수 없었던 그 순간.
눈물이 났다. 어둠 속에서 몰래 닦았지만, 지혜가 눈치챘다.
"괜찮으세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네,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울었다.
영화관을 나온 후, 지혜가 물었다.
"영화 어떠셨어요?"
"좋았어요."
또 거짓말이었다. 한 장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근데... 우셨죠?"
지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도 가끔 영화 보면서 울어요. 감동적이었죠?"
지혜는 인혁이 영화에 감동해서 운 줄 알았다. 인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정할 힘이 없었다.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지혜는 밝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여행 이야기, 취미 이야기,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들려줬다. 분명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혁은 계속 수영을 떠올렸다. 수영도 여행을 좋아했는데, 지혜와는 스타일이 달랐다. 수영은 조용한 곳을 좋아했는데, 지혜는 시끄럽고 활기찬 곳을 좋아했다.
"인혁 씨는 어떤 여행 좋아하세요?"
"조용한 곳이요."
"저는 활발한 곳이 좋아요. 사람들이 많고, 신나는 곳."
정반대였다. 수영과는 취향이 잘 맞았는데.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발라드요."
"저는 댄스 음악이요!"
이것도 다른 결과였다. 수영은 발라드를 좋아했다. 함께 발라드 콘서트에 가기도 했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차이만 드러났다. 나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인혁은 편하지 않았다. 수영과는 모든 게 잘 맞았는데, 지혜와는 아무것도 맞지 않았다.
"혹시... 전 여자친구 많이 생각하세요?"
지혜가 갑자기 물었다. 역시 눈치가 빨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계속 딴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아까 영화 볼 때도..."
인혁은 할 말이 없었다. 들켰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이해해요. 저도 그런 적 있거든요."
지혜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눈웃음이 사라졌다. 실망한 것 같았다.
"시간이 해결해줄 거예요."
"그럴까요?"
"네. 분명히요."
하지만 인혁은 확신할 수 없었다. 벌써 2년이 지났는데도 해결되지 않았다.
두 번째 소개팅도 실패했다. 지혜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성재에게는 "잘 안 됐다"고만 말했다.
"왜? 지혜 괜찮은 애인데."
"그냥... 안 맞는 것 같아."
"뭐가 안 맞아?"
인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수영과 안 맞는다고 할 수는 없었다.
세 번째 소개팅은 다른 친구가 주선했다. 영환이었다. 회사 동료의 동생이라고 했다.
"진짜 예쁘고 성격 좋아. 너 같은 조용한 남자 좋아한다더라."
이번에는 박물관에서 만났다. 상대는 수진이라는 이름의 26살 대학원생이었다. 미술사를 전공한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수진이에요."
"인혁입니다."
수진은 조용하고 차분한 스타일이었다. 수영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인혁은 기대가 됐다.
박물관을 함께 돌아봤다. 수진이 그림에 대해 설명해줬다.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수영도 그림을 좋아했는데, 이 정도로 자세히는 몰랐다.
"이 그림 어떠세요?"
"좋은데요."
"어떤 점이 좋으세요?"
인혁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림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수영과 미술관 갈 때는 그냥 따라다니기만 했었다.
"색감이... 좋은 것 같아요."
"어떤 색감이요?"
더 구체적으로 묻자 인혁은 말문이 막혔다. 수진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수진은 지적이고 세련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혁은 위축됐다. 자신이 너무 무식해 보이는 것 같았다.
"평소에 어떤 책 읽으세요?"
"주로... 소설이요."
"어떤 소설이요? 최근에 읽은 거."
인혁은 또 망설였다. 최근에 읽은 건 수영이 남기고 간 연애소설이었다. 그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별로... 기억 안 나요."
수진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편집자가 읽은 책을 기억 못 한다니.
"일은 재밌으세요?"
"네... 재밌어요."
"어떤 점이 재밌으세요?"
또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인혁은 대답하기 어려웠다. 요즘은 일에 집중이 안 됐다. 재미있을 리 없었다.
대화가 계속 어색했다. 수진은 똑똑했고, 인혁은 그에 못 미쳤다. 수영과는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었는데.
"혹시 컨디션이 안 좋으세요?"
수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대답이 좀... 성의가 없어 보여서요."
직설적인 지적이었다. 인혁은 당황했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오늘 상태가 안 좋으신가 봐요."
수진은 일찍 자리를 떴다. 세 번째 소개팅도 실패였다.
집에 돌아와서 인혁은 자책했다. 왜 이렇게 안 될까. 모두 좋은 사람들인데, 왜 마음이 열리지 않을까.
답은 뻔했다. 수영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을 수영과 비교하고 있었다. 수영보다 예쁘지 않으면 아쉽고, 수영보다 똑똑하면 위축되고, 수영과 다르면 어색하고.
이런 식으로는 평생 누구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수영을 잊는 방법을 모르겠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소개팅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인혁은 마음을 열 수 없었다. 상대방들도 점점 인혁을 부담스러워했다.
"인혁아, 이상해."
성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뭐가?"
"너 소개팅할 때마다 망쳐. 왜 그래?"
"모르겠어."
"정말 몰라?"
인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혹시... 아직도 수영이?"
성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인혁아, 이제 정말 끝내야 해. 이렇게 살면 안 돼."
인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해? 10년? 20년?"
성재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그럼 평생 혼자 살 거야?"
그 질문에 인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