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러브레터 - 4
"인혁아, 청첩장이야."
영환이 예쁘게 포장된 봉투를 건네주었다. 카페에서 만난 자리였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였다.
"너 결혼해?"
"응! 다음 달이야."
영환의 얼굴이 환했다. 행복해 보였다. 인혁은 청첩장을 받아들였다. 고급스러운 종이에 금박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축하해."
"고마워. 꼭 와야 해."
"응, 갈게."
청첩장을 보면서 인혁은 복잡한 기분이었다. 친구의 결혼은 축하할 일이었지만, 동시에 부러웠다. 자신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만났어?"
"소개팅 앱이야."
"소개팅 앱?"
인혁이 놀랐다. 요즘 그런 걸로 만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결혼까지 가는 경우는 처음 봤다.
"처음엔 그냥 재미로 했는데, 정말 좋은 사람 만났어."
영환이 신이 나서 말했다.
"신기하다. 어떤 앱이야?"
"하트커넥트라고. 꽤 괜찮아. 너도 해봐."
"나는 됐어."
"왜? 편견 갖지 마. 요즘 이런 걸로 만나는 게 대세야."
영환이 적극적으로 권했다.
"소개팅도 잘 안 되는데 앱이 되겠어?"
"앱이 더 편해. 먼저 프로필 보고 마음에 들면 만나는 거니까."
인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방식이 너무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사랑이 그렇게 계산적일 수 있을까.
"생각해봐. 요즘 만날 기회가 없잖아."
그 말은 맞았다. 인혁은 회사와 집만 왔다 갔다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일단 생각해볼게."
"좋아. 꼭 해봐."
결혼식 날이 왔다. 인혁은 정장을 차려입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입는 정장이라 어색했다. 수영과 데이트할 때 입던 옷이었다.
결혼식장은 화려했다. 하얀 장미와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 행복해 보였다.
신부가 입장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 팔을 끼고 걸어왔다. 예뻤다. 영환이 부러웠다.
인혁은 혼자 앉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왔는데, 자신만 혼자였다. 외로웠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인혁은 딴 생각을 했다. 수영과의 결혼을 꿈꿨던 시절이 떠올랐다. 언젠가 이런 식장에서 수영과 서 있을 줄 알았는데.
"사랑합니다."
신랑 신부가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인혁의 가슴이 아팠다.
식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인혁은 다음 결혼식 안내판을 봤다. 이름을 보는 순간 멈춰 섰다.
'김수영 ♥ 박민호'
수영이었다. 수영의 결혼식이 다음에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벽에 기대서 겨우 서 있었다.
사람들이 결혼식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수영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행복해 보였다.
수영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남자와 함께.
인혁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땅에 뿌리박힌 나무처럼.
"어? 인혁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인혁이 돌아보니 수영이 서 있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화장을 진하게 했다. 예뻤다. 행복해 보였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고 있지?"
수영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인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목이 메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축하해."
겨우 한 마디를 짜냈다.
"고마워. 너도... 여자친구 생겼어?"
그 질문이 가슴에 박혔다. 없다고 말하기 부끄러웠다. 2년 동안 혼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응. 곧 소개해줄게."
거짓말이었다. 여자친구는 없었다. 수영 말고는 누구도 없었다.
"정말? 잘됐다. 누구야?"
수영이 관심을 보였다. 인혁은 당황했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다음에... 다음에 소개해줄게."
"그래. 기대할게."
수영이 웃었다.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그게 더 아팠다.
"그럼 들어가야겠다. 신부가 늦으면 안 되니까."
"응. 가."
수영이 돌아서 걸어갔다. 하얀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예뻤다.
인혁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수영이 사라진 후에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모든 게 끝났다. 정말로 끝났다. 수영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더 이상 돌아올 가능성은 없었다.
인혁은 결혼식장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렸다. 눈물이 났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온 몸에 힘이 빠져 있었다. 마치 큰 병을 앓고 난 것처럼.
집에 도착해서 소파에 앉았다. 텔레비전을 켰다가 껐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수영의 결혼. 그 사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말로 끝났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영환이 말했던 소개팅 앱을 검색해봤다. '하트커넥트'. 정말로 존재했다.
다운로드 버튼을 눌렀다. 설치가 시작됐다.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다. 수영은 이미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자신도 그래야 했다.
앱이 설치됐다. 회원가입 화면이 나타났다. 프로필을 작성하라고 했다.
인혁은 오랫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정말로 이렇게 시작해도 될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프로필 작성을 시작했다. 이름, 나이, 직업. 차근차근 입력했다.
사진도 올려야 했다. 어떤 사진을 올릴까. 수영과 찍은 사진들은 모두 삭제했다. 혼자 찍은 사진 중에서 가장 괜찮은 걸 골랐다.
자기소개를 써야 했다. 뭐라고 써야 할까. 진실을 써야 할까, 아니면 멋있게 포장해야 할까.
결국 간단하게 썼다.
'안녕하세요. 새로운 인연을 찾고 있습니다.'
짧고 간단했다. 더 쓸 말이 없었다.
프로필을 완성하고 가입 신청을 했다. 승인 대기 중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인혁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정말로 이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 했다. 수영은 이미 떠났다. 자신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날 밤, 인혁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수영의 결혼식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하얀 드레스, 행복한 미소, '여자친구 생겼어?'라는 질문.
모든 게 아팠다. 하지만 동시에 해방감도 느껴졌다. 이제 정말로 끝났다.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새로운 시작. 그 말이 두렵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인혁의 핸드폰에 알림이 왔다.
'하트커넥트 가입이 승인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연을 찾아보세요!'
출근길 지하철에서 확인한 메시지였다. 드디어 승인이 났다.
'매칭을 시작하시겠습니까?'
화면에 버튼이 떠 있었다. 인혁은 잠시 망설였다. 정말로 누를까.
주변을 둘러봤다. 지하철 안 사람들이 각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혹시 이 중에도 소개팅 앱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용기를 내어 버튼을 눌렀다. 여러 여성들의 프로필이 나타났다. 사진과 간단한 정보, 자기소개글이 보였다. 마음에 들면 오른쪽으로 스와이프, 별로면 왼쪽으로 스와이프하라고 되어 있었다.
첫 번째 프로필이 나타났다. 김지영, 28세.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여행과 맛집 탐방을 좋아해요!'라는 소개글이 있었다.
인혁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예뻤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자꾸 수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영은 이런 식으로 웃지 않았는데. 수영의 미소는 더 조용하고 은은했었다.
'아니다, 비교하지 말자.'
스스로 다짐하며 왼쪽으로 스와이프했다.
두 번째 프로필. 박소희, 26세. '책 읽기와 영화 보기를 좋아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인혁과 취미가 비슷했다. 사진도 차분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수영이 떠올랐다. 수영도 책을 좋아했었다. 함께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던 기억이 났다. 수영이 읽어보라고 추천해준 소설들...
또 왼쪽으로 스와이프.
세 번째, 네 번째... 계속 이런 식이었다. 어떤 프로필을 봐도 자꾸 수영과 비교하게 되었다. 머리 모양이 수영과 비슷하면 '아, 수영이 생각나네', 전혀 다르면 '수영이는 이런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하는 식으로.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인혁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또다시 수영과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야 뭐가 달라지겠어.'
인혁은 한숨을 쉬며 앱을 닫으려 했다. 역시 자신에게는 이런 게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성재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권했다고 해도, 실제로 해보니 쉽지 않았다.
그런데 앱을 닫기 직전, 한 프로필이 눈에 들어왔다.
'희서, 25세'
사진부터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너무 완벽했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자연스러웠다. 미소도 다른 사람들처럼 과장되지 않았고, 조용하면서도 따뜻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진실한 관계를 찾고 있습니다.'
짧지만 인상적인 소개글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라는 표현이 흥미로웠다. 상담사일까? 심리치료사일까?
무엇보다, 이 프로필을 보면서 수영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인혁은 희서의 프로필을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나이는 25세로 자신보다 세 살 어렸다. 직업란에는 '상담 관련'이라고 되어 있었다. 취미는 '독서, 산책, 편지쓰기'였다.
편지쓰기? 요즘 시대에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했다. 뭔가 옛스럽고 낭만적인 느낌이었다.
인혁은 오랫동안 희서의 사진을 바라봤다. 묘하게 마음이 끌렸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볼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좋아요를 눌러볼까?'
하지만 망설여졌다. 만약 상대방이 자신에게 좋아요를 누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거절당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영환의 말이 떠올랐다. '편견 갖지 마. 요즘 이런 걸로 만나는 게 대세야.' 맞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자.
인혁은 용기를 내어 오른쪽으로 스와이프했다.
'좋아요를 보냈습니다.'
메시지가 떴다. 이제 상대방이 자신의 프로필을 보고 판단할 차례였다.
인혁은 희서의 프로필을 즐겨찾기에 등록했다. 자꾸 보고 싶어질 것 같았다. 캡처를 하려고 했지만 보안 때문에 막혀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업무를 하는 동안에도 자꾸 핸드폰이 신경 쓰였다. 혹시 답장이 왔을까? 희서가 자신에게도 좋아요를 눌렀을까?
오후 3시쯤, 참을 수 없어서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앱을 확인해봤다. 아직 아무 소식이 없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방도 바쁠 수 있고, 아직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오후 내내 일에 집중이 안 됐다. 자꾸 희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조용하고 따뜻한 미소, '진실한 관계를 찾고 있습니다'라는 소개글.
퇴근 시간이 되어서도 여전히 답장은 없었다. 혹시 거절당한 건 아닐까? 실망감이 밀려왔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나서도 계속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희서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해봤다.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을 한다고 했으니 아마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일 것 같았다. 편지쓰기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감성적이고 섬세한 면도 있을 것 같았다.
인혁은 희서가 좋아한다고 적어놓은 것들을 하나씩 찾아봤다. 좋아하는 음식으로 '파스타'라고 되어 있어서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검색해봤다. 좋아하는 책으로 '연금술사'가 적혀 있어서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했다. 좋아하는 영화로 '비포 선라이즈'가 적혀 있어서 VOD로 찾아봤지만 없어서 결국 구매까지 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 우스워졌지만, 동시에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었다. 수영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상대방에 대해 더 알고 싶고,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들을 같이 즐기고 싶은 마음.
밤 11시쯤, 침대에 누워 마지막으로 앱을 확인해봤다. 그런데...
'매치되었습니다!'
알림이 떠 있었다. 희서도 자신에게 좋아요를 눌렀다는 뜻이었다.
인혁의 심장이 빨라졌다. 정말 매치가 됐다! 이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뭐라고 첫 인사를 해야 할지 몰랐다. '안녕하세요'라고 하기에는 너무 뻔하고, 그렇다고 특별한 말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간단하게 적었다.
'안녕하세요. 매치되어서 반갑습니다. 희서님의 프로필을 보니 마음을 이해하는 일을 하신다고 하시던데, 어떤 일인지 궁금하네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답장이 올까? 어떤 답장이 올까?
예상보다 빨리 답장이 왔다.
'안녕하세요, 인혁님. 저도 반가워요.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조금 특별한 방식이긴 하지만요. 인혁님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신다고 하시던데, 어떤 책들을 다루시나요?'
희서의 메시지를 읽으며 인혁은 미소를 지었다. 정중하면서도 관심을 보여주는 톤이 좋았다. '조금 특별한 방식'이라는 표현이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주로 소설과 에세이를 담당하고 있어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일이라서 재미있어요. 희서님이 하시는 "특별한 방식"이란 어떤 건지 더 궁금해지네요.'
'언젠가 직접 만나게 되면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조금 설명하기 복잡해서요. 인혁님은 어떤 소설을 좋아하시나요?'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알고 싶어졌다.
'저는 사람의 내면을 다룬 소설을 좋아해요. 무라카미 하루키나 밀란 쿤데라 같은 작가들을... 희서님은 연금술사를 좋아하신다고 하시던데, 파울로 코엘료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셨나요?'
'네,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들을 좋아해요. 특히 "순례자"라는 작품이 인상 깊었어요.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인데... 인혁님도 그런 여행을 해보신 적 있나요?'
'물리적인 여행보다는 책을 통한 정신적인 여행을 더 많이 하는 편이에요. 요즘은... 사실 새로운 시작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조금 후회됐다. 너무 개인적인 얘기를 한 것 같았다.
'새로운 시작이요? 어떤 종류의 시작일까요? 물론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희서의 배려심이 느껴졌다. 인혁은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사실... 오래전에 이별을 경험했는데, 그 이후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이런 앱도 처음 해보는 거예요.'
'그렇군요. 이별의 아픔은 정말 힘들죠. 하지만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용기를 내신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희서의 위로가 진심으로 느껴졌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다니.
'고마워요. 희서님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시는 것 같아요.'
'제 일이기도 하고, 또 저도 그런 경험들이 있어서요. 사람은 모두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잖아요. 그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혁은 희서와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 시간 넘게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서로의 취미, 좋아하는 음식,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 평범한 대화였지만, 인혁은 오랜만에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대화하는 내내 한 번도 수영을 떠올리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서 이만 자려고 해요.'
희서가 먼저 말했다.
'아, 그렇네요. 저도 모르게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 대화가 즐거웠어요.'
'저도요. 내일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인혁님.'
'희서님도요. 좋은 꿈 꾸세요.'
인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뒤로 기댔다. 가슴 한편이 따뜻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느낌이었다.
혹시 이게... 새로운 시작의 신호일까?
그날 밤, 인혁은 오랜만에 편안한 잠에 들었다. 꿈에서는 따뜻한 미소를 지은 여성이 나타났는데, 얼굴은 희망찬 느낌이었지만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았다. 다만 깨어났을 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