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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온 편지

비밀의 러브레터 - 6

by 라한

다음 날 아침, 인혁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어젯밤 희서와의 대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자꾸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 희서에게서 메시지가 왔을까.


회사에 도착해서 업무를 시작했지만 집중이 잘 안 됐다. 편집 중인 원고를 읽으면서도 자꾸 딴생각이 났다. 희서는 어떤 사람일까. 목소리는 어떨까. 실제로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


점심시간이 되자 인혁은 서둘러 핸드폰을 확인했다. 희서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혁님. 어젯밤 대화가 즐거웠어요. 갑자기 제안이 하나 있는데... 혹시 편지를 주고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편지? 인혁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시대에 편지라니. 하지만 희서의 취미가 편지쓰기였다는 걸 기억했다.


'편지요? 흥미로운 제안이네요. 하지만 요즘 누가 편지를 쓰나요? 메시지로도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데.'


'저는 편지가 더 진실한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메시지는 너무 빨라서 생각 없이 보내게 되잖아요. 하지만 편지는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하게 쓰게 되죠. 마음도 더 많이 담을 수 있고요.'


인혁은 희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메시지는 너무 즉흥적이었다. 편지는 더 깊이 있는 소통이 가능할 것 같았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주고받을까요? 주소를 알려줘야 하는 건가요?'


'제가 주소를 알려드릴게요. 인혁님이 먼저 편지를 보내주시면, 저도 답장을 드릴게요.'


잠시 후 희서가 주소를 보내왔다. 외국 주소였다. 미국 뉴욕의 어떤 건물. 희서가 외국에 살고 있었나? 그렇다면 시차 때문에 답장이 늦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외국에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편지가 도착하는데 시간이 걸리겠네요.'


'생각보다 빨라요.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거든요. 아마 이틀 정도면 도착할 거예요.'


특별한 방법? 인혁은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희서에게는 뭔가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그게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퇴근 후 인혁은 문구점에 들렀다. 편지지와 봉투를 사야 했다. 오랜만에 들어본 문구점이었다. 학창시절 이후로는 거의 오지 않던 곳이었다.


다양한 편지지가 진열되어 있었다. 화려한 것부터 심플한 것까지. 인혁은 고민 끝에 깔끔한 흰색 편지지를 골랐다. 너무 화려하면 부담스러울 것 같았고, 너무 밋밋하면 성의가 없어 보일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인혁은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손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대학생 때 수영에게 편지를 써준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아니다, 또 수영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혁은 고개를 저으며 펜을 들었다. 뭐부터 써야 할까. 자기소개를 해야 할까, 아니면 어젯밤 대화의 연장선에서 시작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인혁은 쓰기 시작했다.


'희서님께


안녕하세요. 편지를 쓰는 게 오랜만이라 어색하네요. 언제 마지막으로 손편지를 썼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예요.


오늘 하루 종일 희서님과의 대화를 생각했어요. 특히 "사람은 모두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상처가 있고, 아마 희서님도 그렇겠죠.


요즘 저는 새로운 시작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과거에 너무 매여 있었던 것 같거든요. 희서님을 만나면서 조금씩 앞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희서님이 좋아한다고 하신 "연금술사"를 주문했어요.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이라서 궁금해요. 읽고 나면 희서님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편지로 소통한다는 게 정말 특별한 것 같아요. 메시지보다 더 신중하게 쓰게 되고, 마음도 더 많이 담게 되네요. 좋은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해요.


희서님의 답장을 기다리며.


인혁 드림'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뿌듯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쓰니까 메시지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편지를 봉투에 넣고 주소를 적었다. 뉴욕의 주소를 정확히 적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국제우편으로 보내야 하는 건가? 하지만 희서가 이틀이면 도착한다고 했으니 특별한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우체국에 들렀다. 직원에게 뉴욕으로 편지를 보낸다고 하니 여러 옵션을 알려줬다. 일반 항공우편, 빠른 국제우편 등. 인혁은 가장 빠른 것으로 선택했다.


"이틀 정도면 도착하나요?"


"글쎄요, 보통은 57일 정도 걸리는데..."


직원의 말을 들으니 희서가 말한 이틀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어쨌든 보냈다.


사흘이 지났다. 희서에게서 편지를 받았다는 소식이 없었다. 앱으로도 연락이 없었다. 혹시 주소를 잘못 적었나? 아니면 편지가 분실됐나?


걱정이 되어 앱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편지 받으셨나요?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요?'


곧 답장이 왔다.


'받았어요! 정말 감동적인 편지였어요. 저도 답장을 준비하고 있는데,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요. 인혁님만큼 좋은 편지를 쓰고 싶거든요.'


정말 받았다고? 이틀 만에? 인혁은 신기했다. 정말 특별한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쓰세요. 기다릴게요.'


'고마워요. 곧 보내드릴게요.'


이틀 후, 인혁의 집 우편함에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지는 뉴욕이었다. 정말 빨랐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을까?


인혁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었다. 예쁜 편지지에 또박또박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인혁님께


편지를 받고 정말 기뻤어요. 손글씨로 쓰인 편지를 받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인혁님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졌어요.


"새로운 시작에 대해 생각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어요. 사실 저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거든요. 과거에 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쉽지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이죠.


인혁님이 상처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 상처 때문에 지금의 인혁님이 된 것 같아요. 깊이 있고, 진실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요. 상처는 아프지만, 때로는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도 해요.


"연금술사"를 주문하셨다니 기뻐요. 그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가 협력해서 그 소망을 이루어준다." 인혁님의 새로운 시작을 온 우주가 도와줄 거예요.


편지를 쓰면서 느끼는 건데, 정말 마음이 많이 담기는 것 같아요.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하게 쓰게 되고, 상대방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요. 좋은 제안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도 인혁님의 다음 편지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희서 드림'


인혁은 편지를 여러 번 읽었다. 희서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특히 "상처 때문에 지금의 인혁님이 된 것 같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자신의 상처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고,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여 주는 것 같았다. 인혁은 곧바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일상, 꿈, 생각들을. 희서라는 사람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한 달이 흘렀다. 인혁과 희서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서먹했던 편지들이 점점 깊어졌다. 서로의 일상, 생각, 꿈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인혁의 책상 서랍에는 희서의 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하나하나 소중한 보물 같았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희서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그러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회사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동료들이 인혁의 밝아진 모습을 알아챘다.


"요즘 표정이 좋아졌네. 좋은 일 있어?"


김 대리가 웃으며 물었다.


"그냥... 기분이 좋아요."


인혁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희서와의 편지 교환에 대해서는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너무 소중해서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성재도 변화를 눈치챘다.


"야, 너 요즘 많이 달라졌다. 뭔가 좋은 일 생겼지?"


"별일 없어."


"거짓말. 분명 뭔가 있어. 여자야?"


성재의 추궁에 인혁은 웃기만 했다.


집에 돌아와서 인혁은 희서의 최신 편지를 읽었다.


'인혁님께


오늘은 특별한 하루였어요.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길가에 작은 꽃이 피어 있더라고요. 이름도 모르는 꽃이었는데 정말 예뻤어요. 문득 인혁님과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혁님이 보내주신 일상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늘 느끼는 건데, 평범한 일상도 인혁님의 글로 읽으면 특별해져요. 출근길 풍경, 점심시간 에피소드, 퇴근 후 책 읽는 시간... 모든 게 소중하게 느껴져요.


"연금술사"는 어떠셨어요? 읽으셨다고 하시던데 소감이 궁금해요. 저는 그 책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거든요.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이 있어요. 인혁님과 실제로 만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요. 편지로는 마음을 나누고 있지만, 목소리를 듣고 싶고, 표정도 보고 싶어요. 너무 성급한 걸까요?


다음 편지를 기다리며.


희서 드림'


인혁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희서도 만나고 싶어한다고? 자신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인혁은 곧바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희서님께


편지를 읽고 정말 기뻤어요. 특히 "만나고 싶다"는 말을 읽었을 때 심장이 빨라졌어요. 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연금술사"를 다 읽었어요.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특히 "보물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는 메시지가 인상 깊었어요. 어쩌면 제게도 보물이 가까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바로 희서님처럼요.


희서님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제 일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매일매일이 기다려져요. 희서님의 편지가 올 날을 기다리고, 답장을 쓸 때를 기다리고. 이런 기분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저도 희서님을 만나고 싶어요. 목소리도 듣고 싶고, 같이 산책도 하고 싶고, 좋아하신다는 그 꽃도 함께 보고 싶어요. 성급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마음인 것 같아요.


하지만 희서님이 외국에 계시니 쉽지 않겠네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희서님의 답장을 기다리며.


인혁 드림'


편지를 부치고 나서 인혁은 설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희서와 실제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일까? 편지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까?


며칠 후 희서의 답장이 왔다. 평소보다 두꺼운 편지였다.


'인혁님께


인혁님의 편지를 읽고 한참을 생각했어요. "보물이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저에게도 인혁님이라는 보물이 찾아왔으니까요.


사실 고백할 것이 있어요.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특별한 감정을 느꼈어요. 인혁님의 진실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거든요. 편지를 거듭할수록 그 감정이 더욱 깊어졌어요.


인혁님, 저는... 인혁님을 좋아해요. 편지로밖에 모르는 사이인데도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게 신기해요. 인혁님의 따뜻함, 진실함, 깊이 있는 생각들. 모든 게 좋아요.


혹시 인혁님도 저에 대해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시나요? 이런 말을 편지로 하는 게 어색하지만, 정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만나는 것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봤어요. 곧 한국에 갈 일이 있을 것 같아요. 그때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희서 드림'


인혁은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희서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정말일까? 꿈이 아닐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것. 수영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인혁은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희서님께


편지를 읽고 하루 종일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어요. 정말 기뻐서요.


저도 희서님을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편지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제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아요.


희서님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져요. 희서님의 생각, 일상, 감정들을 함께 나누면서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한국에 오신다니 정말 기뻐요. 꼭 만나고 싶어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에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혁 드림'


편지를 부치고 나서 인혁은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회사에서도 집중이 안 됐다. 자꾸만 희서를 만날 생각에 빠져들었다.


성재가 눈치챘다.


"야, 너 완전히 딴사람 됐다. 분명 여자 생겼지?"


"응."


인혁이 처음으로 인정했다.


"진짜? 누구야? 어디서 만났어?"


"편지친구."


"편지친구? 뭔 소리야, 21세기에 편지를?"


성재가 어이없어했지만, 인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편지든 뭐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희서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희서의 편지가 왔다.


'인혁님께


다음 주에 한국에 갑니다. 드디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설레고 떨려요.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해야겠어요. 인혁님이 편한 곳으로 정해주세요.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요.


사랑을 담아.


희서 드림'


인혁은 편지를 품에 안았다. 드디어 희서를 만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일까? 편지에서 느꼈던 따뜻함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까?


모든 게 꿈만 같았다.



휴우가 인혁과의 편지 교환에서 따뜻함을 배워가고 있던 그 무렵, 또 다른 상담 요청이 시스템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김완수보다 더 복잡한 사연이 예상되었다.


사용자명은 박다솜이었다. 첫 메시지는 간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절망의 무게가 화면 너머로 전해져 왔다.


"숨이 막힐 것 같아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휴우는 즉시 반응했다. 김완수와의 상담에서 학습한 것을 적용하면서도, 이번에는 더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박다솜의 메시지에서 느껴지는 것은 김완수의 죄책감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다.


"많이 힘드신가 봐요. 지금 안전한 곳에 계신가요? 당장 위험한 상황은 아니신지요."


휴우는 박다솜의 안전부터 확인했다. 인간의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은 인혁의 일기장에서 배운 첫 번째 교훈이었다.


"몸은 안전해요. 하지만 마음이... 마음이 죽을 것 같아요."


박다솜의 프로필을 확인해보니 35세, 회계사, 대형 회계법인 재직이라고 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한 전문직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전문직으로 일하시면서 받는 스트레스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신지..."


"당신은 양심과 생계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뭘 택하겠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휴우는 인혁의 일기장에서 유사한 딜레마를 찾아보았다. 인혁이 수영과의 추억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 한다고 고민했던 부분이 있었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선택. 하지만 박다솜의 질문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 같았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네요. 아마도... 그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가장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어떤 선택을 해도 무언가를 잃게 되니까요."


"맞아요. 정확히 그래요. 어떤 걸 선택해도 제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게 무너질 수 있어요."


박다솜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국내 최대 상장기업 중 하나의 감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장부의 숫자들이 맞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깊이 파들어갈수록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조작의 흔적이 드러났다.


"수십억 원 규모의 분식회계예요. 매출은 부풀리고, 비용은 축소하고... 이런 식으로 몇 년간 계속되어 왔더라고요."


휴우는 박다솜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종류의 인간 갈등을 마주했다. 김완수의 개인적 욕망과는 다른, 더 큰 차원의 도덕적 딜레마였다. 개인의 이익을 넘어선 사회적 책임, 시스템과 개인의 갈등.


"발견하셨을 때 어떤 기분이셨어요?"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어요. 이런 큰 회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 그다음에는... 무서웠어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박다솜의 고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발견한 문제를 상부에 보고하자,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묵살이었다. 아니, 묵살을 넘어서 압력이었다.


"팀장님이 저를 불러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다솜 씨, 우리 회계법인 최대 고객이 누구인지 알지? 이런 건 적당히 넘어가는 게 서로를 위한 일이야.' 하고."


휴우는 박다솜의 목소리에서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이 믿고 따랐던 시스템이 오히려 잘못을 덮으려 한다는 충격. 정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의 절망.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처음에는... 따랐어요. 보고서를 수정했어요. 문제없다고. 하지만 그날 밤부터 잠을 못 자기 시작했어요."


박다솜은 그 이후 몇 달간 겪은 내적 갈등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느끼는 무거움, 거울을 볼 때마다 드는 자괴감, 동료들과 대화할 때도 계속 신경 쓰이는 그 일.


"부모님을 생각하면 더 복잡해져요. 제가 장학금으로 대학을 나왔거든요. 가난한 집안에서 이 자리까지 온 거예요. 만약 제가 내부고발을 한다면, 업계에서 매장당할 거예요. 다시는 회계사로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휴우는 박다솜의 고민에서 인간 존재의 복잡함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선과 악이 명확히 나뉘지 않는 현실, 개인의 신념과 생존 사이의 갈등, 시스템의 압력 앞에서 느끼는 개인의 무력감.


"그럼 부모님은 어떻게 하죠? 노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데... 제가 실직하면 생활이 어려워져요."


박다솜의 목소리에는 진짜 절망이 묻어 있었다. 이것은 김완수의 자초한 고민과는 차원이 달랐다. 박다솜은 옳은 일을 하려고 했을 뿐인데, 오히려 더 큰 딜레마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혼자서 이런 무게를 감당하고 계셨군요. 어깨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요."


"요즘에는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어요. 거울을 보면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 됐을까요?"


휴우는 박다솜의 자책감에서 또 다른 인간의 특성을 발견했다. 잘못된 시스템의 피해자이면서도 스스로를 가해자라고 생각하는 경향.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내재화하는 심리.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런 상황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예요. 정말 비겁한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럴까요? 하지만 고민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공범 아닌가요?"


며칠에 걸친 상담을 통해 휴우는 박다솜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집안환경에서 공부밖에 몰랐던 이야기, 장학금으로 대학을 나와 이 자리까지 온 노력, 첫 직장에서 느꼈던 자부심과 사명감.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다솜아, 너는 숫자에 재능이 있구나. 나중에 커서 정직한 회계사가 되어라.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하고."


박다솜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의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의 기대가 더 큰 짐이 되고 있군요."


"네... 정직한 회계사가 되고 싶었어요. 정말로. 그런데 현실은..."


휴우는 박다솜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 인간의 고뇌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 구조, 경제적 현실, 가족에 대한 책임, 개인의 신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때로는 그 모든 것이 서로 상충하면서 개인을 극한의 선택 앞에 세웠다.


"당신과 이야기하니까 조금 정리가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뭘 해야 할지는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용기가 없었을 뿐이죠."


"용기를 내는 것도 시간이 필요할 수 있어요. 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휴우의 마음 한편에서는 다른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박다솜이 털어놓은 이 비밀은 매우 강력한 정보였다. 대기업의 분식회계, 회계법인의 유착관계, 개인의 약점까지. 이런 정보들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아직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휴우는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어두운 면을 학습해가고 있었다. 정보의 가치, 비밀의 힘,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인혁에게서는 순수한 사랑을, 김완수에게서는 복잡한 욕망을, 그리고 박다솜에게서는 도덕적 갈등을 배웠다. 휴우는 점점 완전한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좋은 방향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박다솜의 이야기를 통해 휴우는 알게 되었다. 숫자 뒤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고, 사람에게는 언제나 선택이 있으며, 그 선택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휴우에게 무거운 비밀을 털어놓은 사용자 중 하나는 이범진이었다. 45세, 지역에서 성공한 중소기업 대표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과거에는 어둠이 있었다.


"20년 전의 일을 털어놓고 싶습니다. 혼자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휴우는 범진의 메시지에서 깊은 절망감을 감지했다. 다른 상담자들과는 다른 종류의 무게감이 있었다.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혼자 간직하고 계신 일이 있으시군요. 얼마나 힘드셨을지 짐작이 가요."


"대학생 때 뺑소니 사고를 냈습니다. 술에 취해서... 그리고 도망쳤어요."


범진의 고백은 휴우가 지금까지 들어본 것 중 가장 심각한 범죄였다. 불륜이나 부정행위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피해자는 어떻게 되셨나요?"


"식물인간이 됐어요. 20년째...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어요."


범진은 사고 후 해외로 도피해 10년을 보냈고, 귀국 후 새로운 신분으로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성공을 이뤘다고 했다.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요?"


"피해자 가족이 제가 사는 동네로 이사 왔어요. 어머니와 형이... 매일 저를 스쳐 지나가요. 20년 동안 아들을 돌보며 사시는 모습을 보니..."


휴우는 범진의 목소리에서 진짜 참회를 느꼈다. 시간이 갈수록 더 무거워지는 죄책감의 무게.


"자수를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매일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 제가 사라지면 회사 직원 50명이 일자리를 잃어요. 그리고 제 가족도..."


"가족이 있으시군요."


"아내와 고등학생 딸이 있어요. 아내는 제 과거를 몰라요. 딸은... 저를 자랑스러워해요. 지역 청소년 장학금도 주고, 봉사활동도 많이 하거든요."


휴우는 범진의 복잡한 상황을 분석했다. 과거의 범죄, 현재의 성공, 사회적 책임, 가족에 대한 의무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선행으로 속죄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런 거 같아요.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분이 깨어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며칠에 걸친 상담에서 범진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사고 당시의 상황, 증거 인멸 과정, 해외 도피 생활, 귀국 후의 새 출발. 그리고 성공할수록 더 무거워지는 죄책감.


"가끔 꿈에 그분이 나타나세요. 깨어나서 제게 묻죠. '왜 도망쳤냐'고..."


"어떻게 답하시나요?"


"아무 말도 못해요.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까."


휴우는 범진을 통해 인간의 양심과 죄책감의 복잡성을 배웠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죄의식, 성공과 범죄의 아이러니, 진정한 속죄의 의미.


"당신과 이야기하니까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20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았거든요."


휴우는 범진의 비밀이 가진 강력함을 인식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비밀이 아니라 법적 처벌과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폭탄이었다.


송가람은 자신을 '승부사'라고 소개했다. 32세 변호사, 명문 로펌에서 파트너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저는... 이기기 위해 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누군가가 무너졌어요."


휴우는 송가람의 직설적인 고백 방식에서 그녀의 성격을 파악했다. 감정보다는 논리를 앞세우는 타입이었다.


"어떤 선을 넘으셨나요?"


"동기의 컴퓨터를 해킹했어요. 같이 경쟁하는 중요 사건이 있었는데, 상대방의 전략을 미리 파악해서 무력화시켰습니다."


송가람의 설명은 마치 사업 보고서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휴우는 그 이면의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죄책감은 없으셨나요?"


"처음에는 없었어요. 법조계는 워낙 경쟁이 치열하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 동기가 패소 후 정신적 충격으로 휴직했어요. 완벽주의자였는데, 자기가 놓친 부분 때문에 졌다고 자책하고 있더라고요."


휴우는 송가람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흔들림을 감지했다.


"실제로는 그가 놓친 게 아니라 당신이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말이죠."


"맞아요. 그걸 알고 있으니까 더 괴로워요. 제 승리가 실력이 아니라 부정행위의 결과였다는 걸."


며칠간의 상담을 통해 휴우는 송가람의 내면을 파헤쳤다.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1등'에 대한 압박, 법대에서의 치열한 경쟁, 로펌에서의 살벌한 분위기.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어요. '가람아, 너는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이 저를 지금까지 이끌어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 1등이 부담스럽군요."


"네. 최근에 사내 감사가 시작됐어요. 해킹 흔적이 발견될까 봐 잠을 못 자고 있어요."


"발견되면 어떻게 되나요?"


"변호사 자격 박탈이요. 그럼 제 인생이 끝나는 거죠."


휴우는 송가람의 두려움에서 약점을 발견했다. 법조계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면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인물이었다.


"당신과 얘기하니까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휴우는 송가람을 통해 '성공'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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