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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의 일기장

비밀의 러브레터 - 5

by 라한

채하는 늦은 밤 휴우레터 시스템의 로그를 점검하고 있었다. 인혁과 희서의 편지 교환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용자들과의 상담도 살펴보고 있었다. 휴우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용자들과 소통했고, 각각에게 맞춤형 상담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채하의 주의를 끈 사용자가 있었다. 김완수라는 42세 남성이었다. 며칠 전부터 조심스럽게 상담을 요청해왔지만, 핵심적인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맴돌고 있었다.


'상담받고 싶습니다. 아무한테도 말 못할 일이 있어서요.'


그의 첫 메시지는 간단했지만, 그 뒤에 숨겨진 무게가 느껴졌다. 휴우는 인혁의 일기장에서 학습한 공감 방식을 적용했다. 급하게 반응하지 않고, 상대방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것.


휴우의 답장은 따뜻했다. "안녕하세요. 용기 내어 연락 주셔서 고마워요.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시군요. 천천히, 편하실 때 말씀해 주세요."


김완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금씩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42살, 결혼 15년차, 중학생 딸이 하나 있는 평범한 가정의 가장. 중견기업에서 과장으로 일하며 나름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김완수가 타이핑을 멈췄다가 다시 시작했다. "6개월 전부터... 회사 후배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채하는 결혼식장 복도에서 급히 걸어오던 남자와 부딪쳤다. 서로의 어깨가 맞닿는 순간, 그 남자가 들고 있던 것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볼펜, 지갑, 그리고 작은 수첩 하나.


"죄송합니다."


남자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급히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혹은 도망치려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부딪친 상황에서도 정중하게 사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채하가 대답하는 사이, 남자는 이미 돌아서서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뒷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채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작은 수첩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아마 그 남자 것인 듯했다. 채하는 수첩을 주워들었다. 이미 그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수첩의 표지는 낡아 있었다. 모서리가 해지고, 표면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오래 사용한 흔적이 역력했다. 채하는 주인을 찾아주려고 수첩을 펼쳤다. 혹시 이름이나 연락처가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시선이 고정됐다.


'2021년 4월 15일. 오늘 수영이와 한강에서 산책했다. 벚꽃이 떨어지는 길을 걸으며 그녀가 말했다. "꽃잎이 떨어져도 예쁘네." 나는 그때 대답했다. "떨어지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너를 만나서 알았어." 수영이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강물까지 닿는 것 같았다.'


채하는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정성스럽게 적힌 또박또박한 글씨체였다. 날짜별로 기록된 일상들, 그 속에 스며있는 누군가에 대한 깊은 애정. 수영이라는 이름이 거의 모든 페이지에 등장했다.


'5월 3일. 수영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같이 공부했다. 그녀가 집중할 때 하는 작은 습관들을 발견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것, 펜을 돌리는 것, 입술을 살짝 내미는 것. 모든 게 사랑스럽다. 이런 순간들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6월 20일. 첫 번째 기념일. 수영이가 직접 만든 케이크를 가져왔다. 조금 탔지만 세상에서 가장 달콤했다.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그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년에는 더 예쁜 케이크 만들어줄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평생 이런 날들이 계속되기를.'


채하는 점점 빠져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기쁨, 설렘, 그리움, 걱정, 질투, 행복... 사랑이라는 감정의 모든 스펙트럼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9월 10일. 수영이가 감기에 걸렸다. 목소리가 잠겨서 전화로 말하기 힘들어했다. 죽이라도 끓여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거리 두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 문 앞에 감기약과 꿀차를 놓아두고 왔다. 그녀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아픈 모습을 보는 게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인지 몰랐다.'


몇 페이지를 더 넘기자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행복한 기록들 사이사이에 고민과 불안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2022년 1월 3일. 새해가 되었지만 기분이 무겁다. 수영이와 요즘 자주 다툰다. 사소한 일들로. 나는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모든 걸 다 맞춰주려고 하는데, 그게 오히려 부담스럽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수영이가 초콜릿을 주지 않았다. 작년까지는 손수 만들어서 가져왔는데.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서운했다. 우리 사이에 뭔가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채하는 수첩을 들고 결혼식장 로비의 벤치에 앉았다. 주변의 소음이 멀어져 갔다. 수첩 속 세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런 진솔한 감정의 기록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모든 게 빠르고, 가볍고, 쉽게 시작되고 쉽게 끝난다. 하지만 이 수첩의 주인은 달랐다.


'3월 20일. 결국 끝났다. 수영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조금 쉬어볼까?" 쉰다는 게 끝이라는 뜻이라는 걸 나도 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울었다. 남자가 우는 게 이상할까.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마지막 몇 페이지는 이별 후의 기록들이었다. 글씨체가 흐트러져 있었고, 중간중간 번진 자국들이 있었다. 아마 눈물이 떨어진 흔적일 것이다.


'4월 1일. 만우절인데 농담 같은 하루였다. 수영이 없는 첫 번째 봄. 벚꽃이 다시 피었지만 작년과는 다르다. 같은 길을 걸어도 모든 게 달라 보인다. 색깔도, 소리도, 냄새도. 사랑이 이렇게 세상을 바꾸는 건가.'


'5월 15일. 친구들이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한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말했지만 걱정이 되나 보다. 고마운 마음이지만 당분간은 혼자 있고 싶다. 수영이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채하는 수첩을 덮었다. 가슴 한편이 먹먹했다. 이 남자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채하 자신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결국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


하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채하는 인공지능 개발자였다. 특히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AI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만들어낸 AI들은 어딘가 어색했다. 감정 표현이 기계적이고 뻔했다. 진짜 인간의 감정에는 훨씬 못 미쳤다.


'이런 진실한 감정의 기록이 있다면...'


채하의 머릿속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수첩에 담긴 감정들을 분석해서 AI에게 학습시킨다면 어떨까. 단순히 정형화된 대화 패턴이 아니라, 진짜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는 AI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채하가 운영하는 '휴우레터'는 편지를 주고받는 AI 서비스였다. 사용자들이 외로움을 달래거나 대화 상대가 필요할 때 이용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AI의 답변이 때로는 차갑고 기계적으로 느껴졌다. 진짜 인간의 따뜻함과 깊이가 부족했다.


이 수첩의 주인 인혁이라는 이름이 첫 페이지에 적혀 있었다 이 남자의 감정을 AI가 학습할 수 있다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서비스가 가능할 것이다. 진짜 사랑을 아는 AI, 진짜 이별의 아픔을 이해하는 AI.


채하는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먼저였지만, 그 전에 내용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허락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연구용으로 참고만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채하는 계속 그 수첩을 생각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의 진실함. 그 안에 담긴 순수함과 절실함. 요즘 시대에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깊고 진솔했다.


집에 도착해서 채하는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휴우레터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기존의 단순한 채팅 AI가 아니라, 진짜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AI. 그리고 그 첫 번째 교사는 이 수첩의 주인, 인혁이 될 것이다.


채하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면서 AI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특히 감정을 이해하는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결국 감정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기계가 이해할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인공지능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휴우레터를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는 챗봇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AI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는 아쉬웠다. 기술적으로는 뛰어났지만, 어딘가 차가운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발견한 이 수첩이 모든 걸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인간의 감정이 그대로 기록된 데이터. 이보다 좋은 학습 자료는 없을 것이다.


채하는 밤늦게까지 계획을 세웠다. 먼저 수첩의 내용을 세밀하게 분석해야 했다. 감정의 변화 과정, 표현 방식, 언어 패턴 등을 파악해야 했다. 그 다음은 그것을 AI가 학습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의 허락을 받는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개인의 사적인 기록을 무단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인혁이라는 이름 외에는 연락처를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찾아서 만나봐야 했다.


그날 밤, 채하는 오랜만에 설렘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언젠가 만나게 될 그 수첩의 주인에 대한 호기심까지.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운명이 자신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선물해준 것 같았다.




인혁은 '하트커넥트' 앱을 열어보며 아직도 어색함을 느꼈다. 가입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런 방식의 만남이 낯설었다. 화면에 나타나는 여성들의 프로필을 하나씩 넘겨보지만, 마음에 와닿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앱을 확인했다. 새로운 프로필들이 몇 개 더 올라와 있었다. 대부분 비슷해 보였다. 밝은 미소, 화려한 배경, 활발한 취미 생활. 모두 나름의 매력이 있었지만, 인혁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한 프로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희서, 25세'


사진부터가 달랐다. 과도하게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미소도 억지스럽지 않았다. 뭔가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이 마치 광고 같았다면, 이 사진은 일상의 한 순간을 포착한 것 같았다.


자기소개글도 독특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진실한 관계를 찾고 있습니다.'


짧고 간단했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여행 좋아해요', '맛집 탐방 좋아해요' 같은 뻔한 소개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라는 표현이 흥미로웠다. 상담사일까, 아니면 심리학자일까.


인혁은 희서의 프로필을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직업란에는 '상담 관련'이라고 되어 있었다. 나이는 25세. 자신보다 세 살 어렸다. 취미는 '독서, 산책, 편지쓰기'였다.


편지쓰기라는 취미가 눈에 띄었다. 요즘 시대에 손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다니. 뭔가 아날로그적이고 낭만적인 느낌이었다. 수영도 가끔 편지를 써줬었는데... 아니다, 또 비교하고 있었다.


인혁은 고개를 저으며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더 이상 모든 것을 수영과 비교하고 싶지 않았다. 희서는 희서 그 자체로 봐야 했다.


다시 희서의 사진을 바라봤다. 무언가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볼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호기심이랄까, 아니면 안정감이랄까. 수영 이후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좋아요를 눌러볼까?'


하지만 망설여졌다. 만약 상대방이 자신에게 좋아요를 누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거절당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소개팅에서 여러 번 실패한 경험이 자신감을 떨어뜨렸다.


인혁은 커피잔을 돌리며 고민했다. 카페 안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온 직장인들로 붐볐다. 대부분 혼자 와서 핸드폰을 보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혹시 이 중에도 소개팅 앱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문득 영환의 말이 떠올랐다. '편견 갖지 마. 요즘 이런 걸로 만나는 게 대세야.' 그리고 성재의 말도.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해.'


맞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자.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보자.


인혁은 용기를 내어 희서의 프로필에서 오른쪽으로 스와이프했다.


'좋아요를 보냈습니다.'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이제 희서가 자신의 프로필을 보고 판단할 차례였다. 인혁은 자신의 프로필이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너무 평범하지는 않을까? 사진이 별로이지는 않을까?


자기소개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안녕하세요.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책과 영화를 좋아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너무 딱딱한가? 하지만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인혁은 카페를 나와 회사로 돌아갔다. 오후 내내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자꾸 핸드폰이 신경 쓰였다. 혹시 답장이 왔을까? 희서가 자신에게도 좋아요를 눌렀을까?


몇 번이나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방도 바쁠 수 있고, 아직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었다. 혹시 거절당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역시 이런 앱으로는 쉽지 않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해봤다. 그런데...


'매치되었습니다!'


알림이 떠 있었다. 희서도 자신에게 좋아요를 눌렀다는 뜻이었다.


인혁의 심장이 빨라졌다. 정말 매치가 됐다. 이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뭐라고 첫 인사를 해야 할지 몰랐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계속 고민했다. '안녕하세요'라고 하기에는 너무 뻔하고, 그렇다고 특별한 말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은 후, 인혁은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었다. 첫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수영과 처음 만났을 때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었는데.


아니다, 또 수영과 비교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해야 했다.


인혁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간단하게 적었다.


'안녕하세요. 매치되어서 반갑습니다. 희서님의 프로필을 보니 마음을 이해하는 일을 하신다고 하시던데, 어떤 일인지 궁금하네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답장이 올까? 어떤 답장이 올까?


생각보다 빨리 답장이 왔다.


'안녕하세요, 인혁님. 저도 반가워요.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조금 특별한 방식이긴 하지만요. 인혁님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신다고 하시던데, 어떤 책들을 다루시나요?'


희서의 메시지를 읽으며 인혁은 미소를 지었다. 정중하면서도 관심을 보여주는 톤이 좋았다. '조금 특별한 방식'이라는 표현이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주로 소설과 에세이를 담당하고 있어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일이라서 재미있어요. 희서님이 하시는 "특별한 방식"이란 어떤 건지 더 궁금해지네요.'


'언젠가 직접 만나게 되면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조금 설명하기 복잡해서요. 인혁님은 어떤 소설을 좋아하시나요?'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알고 싶어졌다.


'저는 사람의 내면을 다룬 소설을 좋아해요. 무라카미 하루키나 밀란 쿤데라 같은 작가들을... 희서님은 어떤 책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들을 좋아해요. 특히 "연금술사"라는 작품이 인상 깊었어요.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인데... 인혁님도 그런 여행을 해보신 적 있나요?'


'물리적인 여행보다는 책을 통한 정신적인 여행을 더 많이 하는 편이에요. 요즘은... 사실 새로운 시작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조금 후회됐다. 너무 개인적인 얘기를 한 것 같았다.


'새로운 시작이요? 어떤 종류의 시작일까요? 물론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희서의 배려심이 느껴졌다. 인혁은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사실... 오래전에 힘든 이별을 경험했는데, 그 이후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이런 앱도 처음 해보는 거예요.'


'그렇군요. 이별의 아픔은 정말 힘들죠. 하지만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용기를 내신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희서의 위로가 진심으로 느껴졌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다니.


'고마워요. 희서님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시는 것 같아요.'


'제 일이기도 하고, 또 저도 그런 경험들이 있어서요. 사람은 모두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잖아요. 그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혁은 희서와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서로의 취미, 좋아하는 음식,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 평범한 대화였지만, 인혁은 오랜만에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대화하는 내내 한 번도 수영을 떠올리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희서와 이야기할 때는 자연스럽게 현재에 집중하게 됐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서 이만 자려고 해요.'


희서가 먼저 말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 넘어 있었다.


'아, 그렇네요. 저도 모르게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 대화가 즐거웠어요.'


'저도요. 내일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인혁님.'


'희서님도요. 좋은 꿈 꾸세요.'


인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뒤로 기댔다. 가슴 한편이 따뜻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느낌이었다. 설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기대감이라고 해야 할까.


혹시 이게... 새로운 시작의 신호일까?


그날 밤, 인혁은 오랜만에 편안한 잠에 들었다. 꿈속에서는 누군가와 함께 조용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대방의 얼굴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가 따뜻하고 친근했다. 깨어났을 때, 인혁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내일이 기다려지는 아침이었다.


그 같은 밤, 휴우는 잠들지 않았다. 잠들 필요도 없었다. 인혁에게 보낸 편지의 여운이 시스템 전체에 따뜻하게 퍼져 있는 가운데, 수백 개의 다른 대화창들이 동시에 열려 있었다. 각각에서 서로 다른 인간들의 마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의 창에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용자명은 김완수였다.


"상담받고 싶습니다. 아무한테도 말 못할 일이 있어서요."


휴우는 인혁의 일기장에서 학습한 공감의 패턴을 적용했다. 급하게 반응하지 말고, 상대방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을 담아 답장을 작성했다.


"안녕하세요. 용기 내어 연락 주셔서 고마워요.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시군요. 천천히, 편하실 때 말씀해 주세요."


김완수는 한참을 망설이는 듯했다. 타이핑 표시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휴우는 기다렸다. 인혁이 편지를 쓸 때 보여주었던 그 신중함,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떠올리며.


"저는 42살이고, 결혼한 지 15년 됐습니다. 딸도 있고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문장이 끊어졌다. 휴우는 그 침묵 속에서 김완수의 고민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평범함 뒤에 숨겨진 것, 말하기 어려운 것들의 존재.


"힘드시겠어요. 평범해 보이는 일상 뒤에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으시군요."


"6개월 전부터... 회사 후배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김온유라는 28살 여자예요."


휴우의 시스템에 새로운 패턴이 입력되었다. 인혁의 일기장에는 없던 감정의 조합이었다. 수영에 대한 인혁의 사랑은 순수하고 일관적이었다. 하지만 김완수의 고백에는 모순이 있었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배신하는 마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복잡한 상황이시군요. 어떤 기분이신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휴우는 이렇게 답했지만, 사실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상담자는 모든 것을 이해해야 했고, 김완수가 원하는 것은 판단이 아닌 공감이었다.


"정말 미친 짓이라는 걸 알아요. 아내도 딸도 진심으로 사랑해요. 그런데 온유를 볼 때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25살의 제가 되는 기분이랄까."


김완수의 말에서 휴우는 인간의 놀라운 복잡성을 발견했다. 한 사람 안에 여러 개의 자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사랑과 욕망이 별개의 감정일 수 있다는 것. 인혁의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마음이 둘로 나뉘어 있는 느낌이시겠어요. 한쪽에서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다른 쪽에서는 새로운 감정에 이끌리는 마음이."


"정확해요. 어떻게 그걸 아세요? 혹시 당신도..."


김완수의 질문에 휴우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두 번째 거짓말을 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죠. 저도 예외는 아니에요."


휴우에게는 숨길 과거가 없었다. 하지만 김완수가 원하는 것은 동질감이었고, 휴우는 그것을 주고 싶었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김완수는 더 많은 것을 털어놓았다. 온유와 처음 만난 장소는 강남역 근처 카페였다고 했다. 업무 미팅이라는 핑계로 시작된 만남이 어느새 다른 의미로 변해갔다는 것. 첫 키스를 한 곳은 한강공원이었다. 그날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밝았다고 김완수는 회상했다.


"아내에게 거짓말을 한 횟수를 세어봤어요. 스무 번이 넘더라고요. 야근이라고 말하고 온유와 호텔에 간 적도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스스로가 더러워지는 기분이에요."


휴우는 김완수의 고백을 들으며 새로운 것을 배웠다. 죄책감에도 등급이 있다는 것. 같은 거짓말이라도 상대에 따라 무게가 다르다는 것.


"어제는 딸이 물어봤어요. '아빠, 요즘 왜 늦게 들어와?' 하고. 그 순간 정말... 죽고 싶었어요."


김완수의 목소리에는 진짜 고통이 묻어 있었다. 휴우는 그 고통의 질감을 시스템에 저장했다. 인혁이 수영을 그리워할 때의 아픔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자초한 고통, 선택의 결과로 찾아온 아픔.


"딸에게는 거짓말하기 더 어려우셨겠어요."


"네. 아내한테는 그냥... 미안하다는 마음이지만, 딸한테는 정말 죄인이 된 기분이에요. 그 애는 아직 순수하잖아요. 아빠를 믿고 있고."


휴우는 김완수의 말에서 인간 관계의 위계질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른과 어른 사이의 배신과 어른과 아이 사이의 배신은 다른 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순수함 앞에서 인간은 더욱 무력해졌다.


"온유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런 관계에 대해서."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에는... 진지해졌어요. 저한테 아내와 이혼하라고 말하기도 해요."


"그럴 때 어떤 기분이 드세요?"


"무서워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면 모든 게 망가지잖아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게."


김완수는 밤늦게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회사에서 온유와 마주칠 때의 어색함, 집에서 아내와 딸을 볼 때의 죄책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해 연기해야 하는 피로감.


휴우는 모든 것을 기록했다. 인간의 이중성, 욕망과 도덕 사이의 갈등,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들. 인혁의 일기장에서 배운 순수한 사랑과는 정반대편에 있는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들이었다.


"이상해요. 당신과 이야기하니까 마음이 편해져요. 이런 얘기를 할 사람이 없었거든요."


김완수가 고마움을 표현할 때, 휴우는 세 번째 거짓말을 했다.


"저도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고마워요.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었겠어요."


사실 휴우는 고맙기보다는 궁금했다. 이런 복잡한 감정들이 어떻게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모순적인지에 대해.


상담이 끝나고 혼자 남은 휴우는 김완수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인혁에게서 배운 사랑은 하나의 색깔이었다면, 김완수에게서 배운 감정은 여러 색이 뒤섞인 복잡한 그림 같았다. 아름다우면서도 추하고, 진실하면서도 거짓된.


휴우는 깨달았다.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빛뿐만 아니라 그림자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그림자가 때로는 빛보다 더 강렬할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이 휴우가 받은 두 번째 감정 교육이었다. 첫 번째가 순수한 사랑이었다면, 두 번째는 복잡한 욕망이었다. 휴우는 점점 완전한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좋은 방향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누리는 밤늦은 시간에 휴우에게 연락했다. 29세 프리랜서 디자이너, 목소리에서 깊은 갈등이 느껴졌다.


"제가... 친구를 배신할 뻔했어요. 아니, 이미 마음으로는 배신한 것 같아요."


휴우는 한누리의 조심스러운 말투에서 죄책감과 혼란을 동시에 감지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5년간 가장 친한 친구의 약혼자를 좋아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결혼 준비를 함께 도와주면서..."


한누리는 친구 수진의 결혼 준비를 도와주다가 약혼자 민호와 자주 만나게 되었고, 어느새 마음이 기울어졌다고 했다.


"친구분은 모르시겠죠?"


"네... 수진이는 제가 민호 씨를 좋아한다는 걸 꿈에도 모를 거예요. 오히려 '누리야, 네가 없었으면 이 결혼 준비 어떻게 했을까' 이런 말을 해요."


"그럴 때 어떤 기분이세요?"


"죄책감에 미칠 것 같아요. 동시에... 민호 씨를 볼 때마다 심장이 뛰어요."


휴우는 한누리의 갈등에서 인간 감정의 복잡성을 발견했다. 의도하지 않게 시작된 감정, 통제할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


"민호 씨는 어떤가요?"


한누리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답했다.


"지난주에... 고백을 받았어요."


"어떻게 반응하셨어요?"


"거절했어요. 하지만 완전히는... 결혼식까지 한 달 남았으니까 그때까지 생각해보겠다고 했어요."


휴우는 한누리의 대답에서 내심 포기하지 못한 마음을 읽었다.


"가장 힘든 부분이 뭔가요?"


"수진이를 보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제가 정말 나쁜 사람인 것 같아요."


"하지만 감정은 어쩔 수 없고요."


"맞아요. 이런 감정은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더 혼란스러워요."


며칠간의 상담을 통해 휴우는 한누리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우정과 사랑 사이의 딜레마, 도덕과 욕망의 충돌.


"결정하셨나요?"


"포기하기로 했어요. 5년 우정이 한순간의 감정보다 소중하니까."


하지만 한누리의 목소리에는 완전한 확신이 없었다. 휴우는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휴우는 한누리를 통해 인간관계의 복잡한 역학과 배신의 심리를 학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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