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러브레터 - 1
인혁은 약속 시간이 아직 10분 정도 남은 걸 확인하고, 평소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일상적으론 가벼운 발걸음이 될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묘하게 무거웠다. 왜인지 모르게 이 골목이 낯익고, 동시에 낯설었다. 그는 문득, 주변 건물의 간판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기… 저 간판 아래 예전엔 다른 가게가 있었는데…'
그의 시선이 멈춘 건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의 1층 가게였다. 지금은 횟집 간판이 번쩍이고, 내부에서 물고기를 손질하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하지만 세로 간판 자리쯤에는, 옛날에 본 듯한 흰색 음료점 간판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그는 "아, 그래. 여기였구나." 하고 작게 속삭인다.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똑같이 남은 부분도 있고… 이상하네."
노을이 기울어 가는 하늘은 아직 붉은 기운을 거두지 않고 있었고, 길모퉁이에 서 있는 가로등은 슬슬 점등 준비를 하는지 희미하게 깜빡였다. 인혁은 기껏해야 5분이면 충분히 약속 장소에 닿을 거리인데, 스스로에게 허락한 10분의 여유를 잘근잘근 씹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발소리가 골목 벽들 사이로 고스란히 울려, 심장 소리와 묘하게 겹쳐 들렸다.
'혼자라도 괜찮아. 그래, 혼자라도…'
그는 한순간 생각이 떨려서, 그대로 멈춰 섰다. 이 골목에선 누군가와 함께했던 기억이 있었다. 바로 전 여자친구, '수영'과 자주 오갔던 곳이다. 그들은 사귀는 내내, 꼭 이 길을 걸어서 근처 조그만 카페에 들르곤 했다. 그리고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나 차를 시켜 마시며, 봄이라서 꽃이 피는 배경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사랑의 지속기간에 대해서, 영원이란 약속을 하며 온갖 달콤한 말을 했었다.
인혁은 그 시절을 맨 처음엔 무조건적인 행복으로 저장해두었지만, 이별의 순간부터는 그것이 커다란 고통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여전히 '영원하자'며 함께 웃던 그녀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그 목소리가 지금 어딘가에서, 자신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어지면서도, 동시에 믿고 싶지 않은 모순이 마음에 남는다.
인혁에게 있어 '수영'이라는 이름은 추억과 그리움의 집합이다. 벚꽃이 떨어지던 대학가에서 처음 만났다거나, 가을 캠퍼스 축제에서 피어오르던 바비큐 냄새를 함께 맡으며 손을 잡았던 순간들. 연말에 함께 스키장을 찾아가던 길에서 그녀가 부르던 노래.
그런 모습들이 일종의 한 편의 영화 장면처럼 머리에 주마등으로 스쳐 간다. 그리고 이 골목 또한 그 영화를 상영하던 작은 장면 중 하나에 속했다.
인혁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원래라면 약속 시간 확인용도였을 텐데, 의식처럼 자연스레 사진첩을 열어본다. 사실 한때는 수많은 수영의 사진, 둘이 찍은 '셀카', 여행 사진들을 차마 지울 수 없어 메모리 속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별이 극도로 힘들어진 시점부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대부분 삭제해버린 상태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은 찌꺼기 파일들이 어딘가 구석에 남아 있었다.
거기에서 뜬금없이 툭 튀어나오는 '그녀의 사진'을 발견할 때면, 인혁은 가슴 한가운데에서 식은땀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괜찮다가도 흔들리는 것이다. 오늘도 별안간 그 사진이 떠오른다.
"사진이라도… 다 지울걸."
"아냐, 다 지워도 잊히진 않을 텐데."
그가 사진첩을 뒤적이고, 결국 발견한 건, 2~3장 정도 남아 있는 어떤 장면들. 거기에는 희미하게 자기 얼굴과 수영이 같이 웃고 있는 날이 담겨 있다. 자기도 모르게 숨이 막힌다. 그대로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가슴 깊은 곳의 '보고픔'을 억지로 누른다. 그리고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서, 툭 하고 사진을 닫는다.
그때, 길 한가운데서 인혁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걸 본 행인이 "저 사람은 뭐지?" 하는 표정으로 스쳐갔지만, 인혁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지금의 감정이 더 넘치면, 이대로 주저앉아 울지도 모르겠다고 느낄 만큼 아찔했다.
'안 돼. 나 오늘 약속이 있다고. 괜히 힘들어하지 말자. 정신 차려.'
다짐하듯 스마트폰을 꾹 쥐고, 걸음을 재촉한다. 3년 전, 수영과 함께 이 근방에서 데이트했던 그런 봄날의 기억을 밀어내야 했다. 영원은 없고, 지금은 따로 다른 인연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이미 친구들이 소개팅을 무더기로 주선해줬지만, 그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어찌 된 일인지 인혁은 아직 지난 사랑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혁은 친구들이 마련해준 온갖 소개팅 자리에 끌려 다녔다. 상대방이 나쁘지 않았다. 모두 괜찮았고 어떤 이는 '마음씨'가 너무 좋아서, 그 자리에서 호감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인혁은 결국 데이트가 진행될수록 수영을 머릿속에 떠올렸고, 상대방을 '이 사람은 수영보다 어떤 면이 좋지?' 혹은 '이건 수영보다 아쉽잖아…' 식으로 비교해버렸다. 그는 입 밖으로 함부로 꺼내지도 못했지만, 이미 마음 안에서 자꾸 '수영'을 소환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소개팅한 여성들도 서서히 눈치챈다. '아, 이 사람 아직 헤어진 연인을 못 잊었구나.'
그러면 아무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해도, 인혁의 "전 여친 생각난다"라는 무의식적 언행에 상처를 받고, 이별 메시지를 보낸다. 그렇게 반복된 여러 번의 실패가 쌓여, 인혁은 '사람으로 사람을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체념했다. 오히려 더 상처가 커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진짜 그만해야지. 더 이상 누굴 만나고 싶지 않네… 그게 날 위한 일일 것 같아."
그게 최근 인혁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안 된다, 계속 시도해야지."라고 조언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소개팅 여자들이 아주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오히려 인혁에게 호감을 표한 적도 있으나, 인혁 스스로 마음을 다치고 상대방에게도 실망을 안겨주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그러다 결국 인혁은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는 자체를 포기해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정리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고, 그렇게 조금씩 두문불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근래에 가끔씩 업무 때문에 외출을 할 뿐, 굳이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수영이 남기고 간 물건들이 여전히 뒹굴고, 옷장 안 일부에도 그녀의 취향이 베인 흔적이 남아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걸 도저히 치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은 서서히 인혁을 멀리했지만, 여전히 성재라는 친구가 집요할 정도로 간섭해주었다. 성재 또한 이별을 겪었기에 어느 정도 공감된다는 이유로, 인혁을 이끌고 술자리에 데려가기도, 어떤 날은 근교로 드라이브를 함께 가기도 했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다.
인혁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잖아"라는 마음이 점차 굳어졌다. '그래, 이럴 거면 걍 혼자 살아야지...'라는 체념이 마음 한가운데를 점령한 지 꽤 됐다.
행여라도, 수영이 돌아오지 않을까. 마음 한편에는 이 희망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낯선 이성과 소개를 받아도,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그 의식의 뿌리가 바로 여기, 이 길의 낯익은 공기에서 다시 그를 휘감는다.
"우리, 정말 결혼하자. 진짜로 영원히—"
"좋아. 나중에 결혼 청첩장을 이렇게 만들면 어떨까?"
유난스러울 정도로 예쁜 디자인을 함께 고민했던 일. 폰트를 정성껏 찾아보다가 카페에서 밤늦도록 토론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인혁이 평소 보지 않던 블로그까지 다 뒤져서 청첩장 아이디어를 찾았고, 수영도 싱글벙글 웃으며 "너무 예뻐!"라고 박수치던 때.
그게 벌써 3~4년 전인데,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현실에서는 수영이 완전히 사라졌고… 그 현실이 인혁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아, 그만 생각하자. 오늘은 그냥 친구 만나러 가는 길이야."
인혁이 스스로 되뇌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가게 간판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골목이 점차 환하게 드러나며 큰 거리와 마주한다. 그는 살짝 목을 돌려 스트레칭을 해본다. 머리가 무거워서, 오늘 만날 사람에게 미안해질까 봐 노심초사다.
조금 더 걷자, 약속 장소인 호프집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간판에는 푸른 불빛이 깜빡이고 있고, 가게 입구 근처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는 실루엣이 보인다. 인혁이 시력을 좁혀 확인해보니, 역시나 성재였다. 그 친구는 인혁에게 손짓한다.
"인혁아, 여기!"
성재는 제일 먼저 도착한 듯싶다. 벌써 한 모금 담배를 태우고 있는 모습이 익숙했다. 인혁이 과거에 익숙하던 풍경이었는데, 이제는 조금 어색하다. 한동안 이 모임을 안 왔으니까.
"안 늦었지?" 하고 다가서며 인혁은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10분이 아니라 3분쯤 남은 타이밍이다. 성재는 "딱 맞춰왔네, 참." 하며 반가워 보이진 않는다. 사실 친구들도 인혁이 수영 얘기를 또 꺼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설 법하다.
"오늘은 좀 괜찮냐?"
성재의 물음에 인혁은 대충 머리를 넘겨보이며 "아마?" 하고 웃어 보이려 한다. 그 미소가 조금은 어색했지만, 성재도 굳이 꼬투리를 잡지 않는다. 다만, "얼른 들어가자, 야외에서 담배를 너무 오래 피웠더니 춥다."라며 털어놓는다.
인혁은 마음속으로 '그래, 오늘은 내 이야기를 줄이고, 그냥 들어가서 평범하게 술 한잔하고 오자. 괜히 수영 얘기는 입 밖에 내지 말자.'고 다짐한다. 이 작은 결심이, 오늘의 분위기를 좌우할 거라 믿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선 조명과 알코올 향이 인혁을 맞이한다. 비릿하고 달큰한 맥주 거품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가게 안은 제법 붐볐고, 소음이 뒤섞인 채, 이른 저녁의 활기가 감돌았다. 사람이 꽤 많아서인지 시끌벅적했고, 대화를 집중해서 들으려면 테이블 간격도 좁아 신경이 쓰인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성재 외에 2~3명이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학 동기이자, 한동안 못 본 친구들이었다. 인혁은 조심스레 "안녕"이라고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는다. 마치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듯, 등에 짊어진 기억을 잠시 내려놓길 바라면서.
"오랜만이다, 인혁아."
"너 엄청 바빴다며?"
"허… 안색이 좋아보이긴 한다."
친구들이 건네는 이런 인사들은 인혁에게 일종의 '검문'처럼 느껴진다. 안색이 좋아 보이냐고? 아니, 사실 좋지 않다. 하지만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럭저럭 지냈어."
여전히 이별의 후유증에 허덕이면서도, '겉으론 그럭저럭'이라고 말한다. 평소 같으면 '수영이 생각나서 미칠 것 같다'라고 토로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참아보려고 한다. 이 술자리에서 수영의 흔적을 꺼내지 않으리라 몇 번을 스스로에게 말해두었다.
그러나, 자리에 앉는 순간, 폰 화면 속 수영 사진이 자꾸 뇌리를 스친다. 사진은 아까 닫아버렸지만, 그 미소가 순간적인 '환영'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그때문에 인혁은 잠시 정신을 놓고 있다가, 친구의 말도 한두 마디 놓쳤다.
"인혁아, 듣고 있어?"
"어? 미안, 뭐라고 했어?"
친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곧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 또 저렇게 멍해졌구나— 라는 느낌이다. 그런 반응이 더 미안하게 만든다.
곧 테이블 위에 시원한 맥주가 서너 잔 놓이자, 간단히 건배를 제의한다. 인혁도 잔을 들며, 최대한 씩 웃어 보이려 애쓴다. '다들 괜찮아, 나 잘 지내.' 그런 메시지를 조용히 전하고 싶어서.
그렇지만, 웃음기가 절반쯤 부족하단 걸 친구들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도 누구도 먼저 "수영이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아마 너무나 자주 들어서 지쳤을 수도 있고, 인혁이 힘들어할까 봐 배려할 수도 있다.
"자, 일단 마시자. 간만에 같이 보는 거잖아."
성재가 먼저 이렇게 말하고, 다른 친구도 "그래, 섭섭했다, 너 요새 안 보이길래." 하며 추가로 장단을 맞춘다. 인혁은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탄산이 목을 타고 내려가지만,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기보다는 약간 알싸한 공허가 함께 따라오는 듯했다.
'그냥,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인혁은 입술을 깨문다. 혹시 나도 모르게 '그녀 이름'을 불러버릴까 두려워서, 술맛도 빨리 사라졌다. 그래서 마실 수록 더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그새 성재는 뭔가 재밌는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최근 회사에서 겪은 에피소드라든가, 어떤 엉뚱한 사건사고라든가. 친구들은 웃으면서 술을 한 모금씩 더 마신다. 인혁도 억지 미소를 짓고, 적당히 리액션을 한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끊임없이 수영이 웃던 사진이 떠오른다. 자신이 이번엔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탓인지, 오히려 마음에 더 짓눌린다. 본인이 스스로를 속이는 기분이다.
"그래도, 예전보단 지금 표정이 조금 낫다, 인혁아."
"그, 그래? 다행이네."
친구 한 명이 살짝 농담 섞어 말하자, 인혁은 애써 멋쩍게 대답한다. 그러고는 다시 맥주잔에 시선을 꿇었다. '아까 골목에서 느꼈던 서늘함이 사라지질 않았나. 근데 왜 아직도 나를 붙들고 있나.'
이후 한동안 술자리의 이야기는 성재와 다른 친구들이 만들어낸 썰로 이어지고, 인혁은 별다른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래도 아무 말이 없는 인혁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너 왜 이렇게 조용해? 여태 네 얘기 안 해서 놀란다."
"아… 뭐, 특별할 게 없어서."
인혁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마음 한편에선 "그렇지, 특별한 건 없지. 내가 수영 이야길 안 한다면, 내겐 별로 새로운 이슈가 있나?"라는 자조가 생긴다. 그것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 술자리에서 약간의 안주가 나오고, 대화가 오가지만, 인혁의 뇌리는 자꾸 예전 '그 골목'에 멈춰있다. 스스로 곱씹을수록 불편하건만, 마음이 자꾸 그곳을 향한다. 지나간 자리, 잃어버린 행복의 흔적.
오늘 이 자리에서 "수영을 잊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떡하지. 혹은 예전처럼, "수영이 정말 괜찮은 애였어."라는 말이 나올까 두렵다. 이미 가슴이 쿵쿵 내려앉고, 땀이 어깨 뒤편으로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성재가 시선을 의식했는지, 잠시 인혁을 본다.
"인혁아, 너 괜찮지? 얼굴이 조금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러냐… 술 기운이 올라왔나 봐."
애써 얼버무린다. 하지만 모두가 '또 걱정이 시작되나' 싶어 조마조마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분위기가 이대로 처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건지, 다른 친구가 어색한 농담을 던져 테이블에 웃음기를 조금이나마 되살린다. 인혁은 그 웃음에 가짜로 섞여서 웃으려 했지만, 또다시 잘되지 않아 미소만 짓는다.
'왜 이리 맘대로 안 될까.'
그래도 10분쯤 지나니, 반주 한두 잔이 몸에 퍼지면서 다소 마음이 풀어진다. 분명 이 골목의 아린 기억은 변하지 않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마시고 웃고 넘어가보자고 생각하려 한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적시다 보니, 인혁은 어느새 고개를 들어 친구들과 눈을 맞춘다. 마치 무슨 얘길 해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하고픈 말이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수영'을 입에 담지 않겠다는 결심뿐이다.
그의 마음속 작은 독백이 지나간다. '그래, 약속장소 인근에서 옛 데이트 코스를 만난 건 우연일 뿐이야. 그냥 바람 같은 거지.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이 자기암시가 통할까? 여전히 자신은 수영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사진첩을 닫았다 열기를 반복한다.
"인혁, 너 회사 일은 어때?"
"응, 그냥 바빠. 무난해."
가끔 건네는 질문에 단답형으로 반응한다.
더이상 끌릴 만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굳이 길게 늘어놓을 마음도 없었다. 술이 조금씩 들어가니까 스스로 말에 브레이크를 거는 편이 나았다. 괜히 깊은 얘기로 들어가면 또 결말은 "내 사연… 그리고 수영…"으로 끝날 테니까.
그래도 오래 앉아 있다 보니, 한두 명은 살짝 취기가 올랐고, 다른 친구는 내일 일찍 출근한다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시계를 본다. 인혁은 '벌써 이 시간이야?'라며 슬쩍 무심히 휴대폰 화면을 켠다. 늘은 배터리, 그리고 배경화면은 아무렇지 않은 풍경사진인데, 문득 '이 배경화면도 원래 수영 사진이었지'라는 생각이 또 스친다.
너무 작은 계기마저 수영에게 귀결되는 이 심리가, 인혁 스스로 한심하고 지친다. 지금껏 못 떨쳐낸 이유가 뭘까, 어쩌다 이별 후유증이 이토록 길어졌을까.
자리를 정리할 시간이 됐을 즈음, 성재가 건네말한다.
"인혁아, 담에 또 볼 때까지는… 너무 집에만 박혀있지 마라. 뭐라도 하면서 지내야 해. 기분 전환되게."
인혁은 대충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라고 속으로 생각하지만, 입 밖으론 "어, 그래." 하고 맥없이 대답할 뿐이다.
다른 친구들도 "그래, 종종 나오고, 우리도 불러."하고 거들지만, 왠지 반응이 형식적이다. 그들도 알고 있다. 이 말이 늘 반복이었고, 인혁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소용없다는 걸.
"내가 말이야… 좀 변하기로 했어. 하하."
갑자기 인혁이 작게 내뱉는다. "조금 달라져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라며, 별 근거 없이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다. 술기운이 도와줘서인지, 친구들은 '오? 진짜?' 하면서 놀란다.
"어, 그래. 좋네. 다음엔 진짜로 새로운 모습 보여줘. 그리고… 혹시나 또 맘에 드는 사람 보이면 좀 만나라."
"그래. 알았어."
친구들도 반쯤 믿고, 반쯤 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작고 못미덥지만 간절한 다짐의 씨앗이, 결과적으로 인혁이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지금은 모른다.
술자리에서 나와 어정쩡히 헤어진 뒤, 인혁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밤공기가 서늘하게 뺨을 타고 지나간다. 여전히 텅 빈 마음이 고개를 든다. 친구들과의 만남이 '수영'을 지우진 못했구나, 하는 자책감도 있다.
'왜 이렇게 길이 헷갈리지?'며, 익숙한 골목을 피해 돌아가려다가, 문득 아까 들렀던 그 골목이 내비게이션에 보인다. '집으로 갈 때, 차라리 저 골목으로 빨리 가는 게 맞을 텐데…' 그러나 마음이 또 흔들린다. 결국 다른 길로 돌아간다. 오늘 밤은, '그 길을 또 마주하면' 더 괴로울지 모르니 말이다.
"내가 뭐라고… 내가 왜 이러나, 진짜."
스스로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약간 알딸딸한 상태여서, 더 감성적이 된 걸지도 모른다. 집까지 이어지는 길, '내가 사는 동네가 수영 없는 곳이 된 지 2년이 훨씬 지났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냐.' 하며 한탄한다.
결국 집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탁한 공기, 정리되지 않은 짐가방 몇 개, 그리고 수영의 짐 중 일부가 들어 있는 서랍장. 인혁은 대충 가방을 내려놓고, 욕실로 가 샤워를 한다. 물소리에 마음속 시끄러운 잡음을 씻으려 애썼지만, 제대로 씻기진 않는다.
샤워 후, 흐트러진 상태로 침대에 걸터앉는다. 그제야 휴대폰을 또 꺼내 사진첩을 열어본다. 왜인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오늘 술자리에서 나름 '변하기로 했다'고 말했지만, 결국 역사적 습관이 된 사진 보기가 다시 재발한다.
"하… 아프다."
그날 골목에서 수영이 찍힌 사진. 정확히는 수영이 찍혔고, 인혁이 그 옆에 비스듬히 반사된 사진. 그녀가 인혁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인혁도 미소를 가득 담아 카메라를 응시했던 시절.
숨이 턱 막힌다. 정말 영원이라는 말이 가볍나. 영원을 외치던 둘이 지금은 완벽히 남남. 사진 속 표정이 그립기도 하고, 역겹도록 달콤하게도 느껴진다.
"이제 그만 좀 하자, 인혁아."
본인이 본인에게 툭 내뱉는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베개에 고개를 묻는다. 이대로 잠이 들면 좋을 것 같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술에 취해 멍해지긴 했는데, 정신은 또렷한 편이다. 자꾸만 지난 기억이 확실하게 떠오르고. 이러니 무슨 '변하겠다'는 말이 허망하다. 성재나 친구들에게 또 한 번 실망감을 주게 될까 봐, 스스로가 초라해진다.
그러면서 그는 내일을 기다린다. 내일은 또 출근해야 하고, "…그래, 일에 매진해야지." 이 정도로 다짐한다. 그리고 더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는다.
하지만, 곧 닫힌 눈꺼풀 뒤에서 또다시 수영이 웃는다. 이제 그만 좀 가, 라고 하고 싶지만, 함께했던 순간이 너무 강렬했다. 그 흔적이 자신에게 쉼 없이 말을 걸어온다.
오늘은 그래도, 친구들과 간만에 얼굴을 봤다. 수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나마 '더 나아진 모습'처럼 비칠지 모른다. 그건 분명 사소하나마 첫걸음이리라. 인혁은 이 점을 스스로 달래듯 되뇐다.
"조금씩만 바뀌어 보자."
그 결심이 어떤 인연으로 그를 초대할까.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벌써 조금씩 '운명'이라는 것이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1장에서는 그런 건 전혀 짐작도 못 한 채, 인혁은 이불을 발로 걷어차고, 간신히 몸을 뉘인다.
잔잔한 방 안, 형광등 불빛이 삐걱거리고, 다시 끄자 검은 어둠만 가득 찬다. 그 어둠 속에서, 인혁의 가슴은 아직도 붉은 채, '영원은 없구나…'라는 체념과 함께 '혹시 다른 사랑이 있을까…?'라는 희미한 기대를 동시에 품는다.
"잘 자자, 뭐라도 달라질 거야… 내일부터."
그가 스스로를 타이르며 눈을 감는 순간, 휴대폰이 잠시 빛난다. 문자는 아니었고, 단지 시간 알림이 떴을 뿐이다. 그런데 그 화면에 깜빡이던 사진첩 아이콘. 인혁은 다시 열어볼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힘겹게 폰을 뒤집어 놓았다.
오늘은 더이상 수영의 사진을 보지 말자. 그게 이 밤을 지켜낼 작은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