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상 May 18. 2024

산책

 꽃

5월의 따듯한 날씨에 힘 얻어 산책을 갔다. 짧게 스쳐오는 바람은 시원했고 하늘 아래의 분위기는 따뜻했다. 

세시쯤이었다.


걸음걸이는 점점 빨라졌다. 나는 종종 바닥을 보면서 걷는데, 주로 발의 리듬을 느끼기 위해서다. 속도가 빨라지면 신발 끝을 주로 살핀다. 살짝 떠 있는 끝이 길을 안내해 주는 것만 같다. 걸음이 느려지면 신발 안쪽을 본다. 촘촘히 메어진 신발 끈들 사이의 구멍을 보고 길쭉한 벌레가 얼굴을 내미는 게 아닌가 어린아이 같은 상상을 한다. 그러는 사이에 내 눈은 눈칫밥 먹은 염치 있는 거지 마냥 앞도 슬쩍슬쩍 살핀다. 만약의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예방 역할이다. 사실 앞을 보지 않고 걷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고개를 숙여도, 상상을 해도, 정신의 한편은 앞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걷는다는 것이 형성된다.


혹자는 고개를 숙이고 걷는 것이 나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소심한 성격이 지금의 걸음걸이를 형성했다고. 맞는 말이다. 어렸을 때의 나는 소심했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살짝 힘들었고 무서운 형, 누나들의 눈을 피해 땅과 머리의 각도를 줄였었다. 일종의 생존전략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걷는 것을 좋아했다. 혼자서 시골 마을 길을 걸었고 가보지 않은 곳을 살피며 이곳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마음의 지도를 그렸다. 나에게 걷는 것은 일종의 취미이자 하나의 만족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거북목아 심해지고 바른 자세가 세월이 압박이 되어 강제되자 고쳐나갔지만 말이다. 그래서 앞 문단에 '종종'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지금도 내가 종종 고개를 숙이며 걷는 것은 내면의 상상이 즐거워서도 있지만 고개를 들어 앞을 봤을 때 기존에 봤던 것들이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 아스팔트 도로 중앙의 노란 선, 구릉의 형태, 해의 빛줄기, 달의 진중함이나 별의 아기자기함 모두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출발하였을 때 봤고 비슷한 형태지만 나만이 오늘인 것 같고 그것들은 내일에 있는 것만 같다. 고개를 숙이다가 앞을 봤을 때 모든 것은 새롭게 치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특히 5월의 풍경과 걸음은 다른 계절보다 더욱 살갑고 친하며 잘 어울린다.


5월의 초는 냉과 열이 합쳐진 미온수 같다. 짜증이나 질투, 불만은 적고 사랑은 따듯한 연애 초의 풋풋함과 비슷하다. 그 분위기가 기분과 감정을 달구어 준다.


점점 빨라지는 걸음 속에서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옆을 보았다. 꽃이 있었는데, 출발점에서 봤던 꽃과 같은 종류였다. 하얀 꽃잎과 노란 암술과 수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데이지라 불리는 꽃이었다.


 꽃은 '예쁘다"는 세 글자를 자연스럽게 말하게 했다. 마치 그 말을 듣기 위해 그곳에 피어난 것처럼 매력적인 자태였다. 나의 묘한 감정이 꽃을 향했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심정, 이대로 그냥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실물만큼은 아니지만 모방품으로는 훌륭했다. 나의 사진 실력이 떨어져 빛이 바래겠지만 모델이 훌륭하니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꽃을 봤다. 지긋이 쳐다보면서 몸이 당겨지자 거리도 가까워졌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는데도 꽃은 불편한 티를 내지 않았다. 참 성격 좋은 꽃이어서 일부러 부담을 숨기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문득 요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요즘은 기술이 발전해 매력적인 이미지를 수없이 만들어 내는 세상이다. 예술가들이 설치해 놓은 장식물들이 실제보다 실제 같은 경우도 있고 풍경 사진이라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니 AI 이미지였던 일도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본 꽃들이 누군가가 만들어낸 장식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예쁘다'라는 꽃이 내게 준 감정의 격랑을 쉽게 잠재울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연과 모방품은 다르다. 인공적인 것이 신기하다면 자연은 신비롭다. 인공적인 것은 자연을, 진짜를 비슷하게 담을 수 있기에 신기하다. 반면에 자연은 잠시 고개를 숙이다 다시 바라보는 것만으로 전과는 다른 신선하고 색다른 매력을 줄 수 있기에 신비롭다. 이것이 한순간에 들었던  이상한 생각의 정체였다.


그렇다면 걷다가 고개를 들어 다시 봤을 때 새롭게 생긴 자연의 신선함은 내 발걸음에 연유한 것이 아니라 다채롭게 변하는 자연의 신비로움에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 걸음 습관은 자연의 신비함을 만나기 위한 하나의 준비동작이었던 것이다.


걸을 수 있었던 순간부터 계속 걸어왔던 삶이었지만 오랜 습관의 가치를 지금이 되어서야 알게 됐다. 물론 이건 내가 체험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각자는 다른 방식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깨닫게 해 준 꽃의 아름다움과 발걸음에 감사한다.  다시 느끼려면 걸을 수밖에,  이제야 감정의 격랑이 잠잠해진다. 신발 끈의 구멍에서 꽃들이 얼굴을 내밀고 산책을 재촉하는 것만 같다. 



작가의 이전글  브레이킹 배드 : 악의 합리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