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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꿍 Jan 02. 2020

9. 서른 즈음에, 내 남은 날들에

feat. 고양이, Masanja

  연말이다. 이 즈음만 되면 매번 행하는 일이 있다. 근처의 문고를 찾아 유효기간 두 달짜리 플래너를 살지 말지 고만하고, 저무는 해를 돌아보며 그간 삶의 투쟁을 위로한답시고 간을 혹사시키는 모종의 의식이 있다. 새해에는 보람차게 살려고 온갖 계획을 늘어놓지만 막상 당일 아침엔 늘 술병으로 골골거린다. 올해는 예외이고.


올해 연말은 플래너를 사지도, 간을 혹사시키지도 않았다. 그릇이 중요한 게 아닌 걸 깨달아 쓰던 수첩을 사용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면 생각도 지겹다. 단지 쉼이 필요했다. 올해 마지막 출근을 해 짧은 수업 후 기관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버스로 8시간 떨어진 지역에서 온 학생이 혼자 기숙사에 있어 저녁에 집으로 초대했다. 지방 사람 마음은 지방 사람만 안다고, 나 또한 적적하지 않아 환영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반가운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미와 얼마 전에 태어난 아기 고양이

녀석들은 호시탐탐 우리 집에 들어오기를 노린다. 의지할까 봐 먹을 것을 잘 주지 않는데 문 앞에서 울면 나는 또 마음이 누그러든다. 한바탕 놀아주다 빨래를 마치니 피곤해 낮잠을 택했고(세탁기가 없어 손빨래를 하고 나면 늘 잠이 쏟아진다), 일어나 찜닭을 준비했다. 다른 사람에게 요리해주는 걸 좋아해 한때 진지하게 진로 고민까지 한 적이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 정말이지 부침이 없다.

어서와, 한국음식은 처음이지?

남동생과 나이가 같아 괜히 더 손이 가는 학생 Masanja와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일찍이 헤어졌다. 별을 볼 수 있을까 싶어 나간 밤하늘은 흐릿했고 다가오는 해를 알리는 음악소리만 경쾌해 집에 돌아왔다. 설거지와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2020년을 기다렸다.


스물아홉이 된다. 어릴 적에 듣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지금에서야 메아리가 울린다. 그야 그때는 서른보다 스물이 가까웠으니. 이십 대의 대부분을 스무 살처럼 살아왔다.

젊게 생각했고 도전했고 두려워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어리게 굴었고 찌질했으며 많은 날 울며 헤매고 방황했다.

절반은 탄자니아에서, 나머지 절반은 한국에서 보낼 스물아홉은 또 정신없이 흘러가겠지만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길 욕심내 본다.


12시가 되니 여기저기서 축제의 분위기가 밀려왔고, 불을 끄고 침대에 올랐다. 혼자 맞는 새해도 나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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