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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꿍 Nov 12. 2020

반차

병원을 핑계로 오전 반차를 썼다. 팀의 막내라 남들보다 책임감은 덜하지만 해야 할 일은 남들 못지않게 많다. 불행히도 거래처는 내 사정을 알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아 온전히 쉬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지나 출근을 했다. 오전 동안 밀린 업무를 보고 있자니 선배들이 하나 둘 와서 말을 건넨다.

                               "면접은 잘 보고 왔어?"

연차를 쓰고 오면 누구든 피해 갈 수 없는 우리식 농담이다. 오늘은 이 농담에 마냥 웃고 넘길 수 없었다. 하필 어쩌다 한 번씩 찾아오는 마음도 몸도 우중충한 날이었다.


일이 바쁘면 잡생각이 안 든다. 평일의 나는 출근부터 퇴근까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집에 와서는 밥 지어먹고 쉴 마음만 가득하다. 책상 앞 벽에는 의지는 없이 토익 시험 일정만  덜렁 붙어있다. 쉬다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도 종종 회사에 출근해 있다. 그런 날은 하루 종일 피곤하다.


우리 회사는 중소기업이다. 출근 첫날 당당히 소감을 말했었다. 출근 시간이 빨라 일찍 마치니 마음에 든다고.

이 말이 얼마나 웃겼을지를 파악하는 데는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인터넷에서 보던 소위 사람 갈아먹는 회사였다. 입사를 할 때 근거 없는 기대가 있었다. 이전에 다녔던 회사는 스타트업이었고, 이 곳은 중소기업이지만 300명 규모의 상장사여서 더 그랬다. 출퇴근, 워라밸이 지켜지는 곳에서 일하다 보니 남들도 그렇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작은 세상에 살았었나 보다.


이 곳 역시 장점이 많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배울 수 있고, 어디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회사의 시스템을 익힌다.  무엇보다 수당을 포함하면 적지 않은 월급을  받는다. 요즘은 잘만 찾아보면 정부 지원 프로그램 등이 많아 이것저것 더하면 대기업 못지않다. 그래서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통장에 찍히는 월급을 핑계로 이 곳에 완전히 녹아들까 봐. 나는 헨젤과 그레텔에서 본 과자집을 상상한다. 그 안에서 달콤함에 취해 나중에는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장면을 상상한다.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선배들은 연차가 많이 차이나는 내게 뭐든 알려주려 한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맙고 또 미안하다. 확신이 없는데 확신에 찬 모습을 연기하고 당신들은 속을 테다. 지금의 삶에 익숙해질까 봐 두렵다.


삶이 참 얄궂다고 종종 생각한다. 오늘이 힘들어 이전에 가고 싶던 회사의 홈페이지를 검색했다. 과장 안 보태고 마침 공고 가 떠 있었고 오늘이 서류 마감일이다. 집에 도착하면 이력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우연의 해프닝일지 그렇게 될 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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