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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 Oct 27. 2024

긴장된 이 씬에 느슨함을 줘

유연함에 대하여





지금 나 얼마큼 해이한가.

어떤 일을 오래 지속하게 될 때면 시작할 때의 각오나 다짐을 자주 돌아보게 된다. 마음가짐이란 피아노 튜닝과 같아서 한번씩 초반의 것과 대조하면서 조율하지 않으면 점점 풀어진다. 그대로 두면 이상한 소리가 날 지도 모르니까. 그럴 때는 유튜브에서 몸 쓰는 예능 같은 거 봐주면 좋다. 보통 거기 댓글에도 적혀있겠지만 ‘유재석도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같은 마음이 솟아날 거다.




한참 동기부여 컨텐츠가 유행했다. 성공한 사람들의 말을 가지고 와서 따끔하게 꾸짖고 의욕을 북돋아주는 식의 컨텐츠였다. 여기서 ‘성공’이란 건 대부분 돈을 엄청 많이 벌거나 어떤 목표를 성취하거나 유명해진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다보면 인생이라는 난해한 문제 속에서 먼저 해법 같은 걸 깨우친 사람 같아서 유심히 귀 기울이게 된다. 현대판 랍비 쯤 되지 않을까. 정말로 한순간에 마음 한 켠에 막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게 신기했다. 아, 이거구나. 그래서 나도 유튜브에 자기계발 컨텐츠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기계발 유튜버 하던 시절. 경력 3개월


이 책을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 것 같다. ‘뭐라고? 안 어울리는 짓 하고 있네’ 맞다. 나는 메타인지가 썩 나쁘지 않아서 얼마 안 가 그런 내 모습이 좀 웃기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 같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더라. 근데 솔직히 나 뿐 아니고 진짜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컨텐츠 내용이 모범적인 이야기를 하는 만큼 제작자로서 웬만큼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되고 매번 나와 영상 속 성공한 사람들 사이의 괴리감에서 오는 현자타임을 보통 사람은 견딜 수 없다. 근데 나는 보통 게으른 게 아니잖아? 시작한지 3달 만에 관뒀다. 그리고 나 대신 그런 거 만드는 데 특화된 사람들이 이미 많았다. 이걸 하면서 꽤 많은 자기계발 유튜버를 만나봤는데 진짜 보법이 다르더라. 살면서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들 처음 봤다.


어찌 됐건 나도 컨텐츠 제작자로서 이 씬에 들어와버렸고 지금 보는 이런 만화를 인스타그램에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의 마음은 이랬다. 여기 부지런한 사람은 차고 넘치니까 나는 반대로 게으른 걸 올리면 좀 희소 가치가 있겠지? 그런데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정말로 이런 게으른 컨텐츠는 별로 없었지만 이걸 보는 게으른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거 볼 시간에 누워서 게으름 피우고 있었고, 내가 만화를 올리면 댓글창엔 부지런뱅이들만 잔뜩 모여서 자기들끼리 내가 게으르네, 아니네, 내가 더 게으르네 하면서 참회 배틀을 뜨고 있었다. 급기야는 나보고 게으른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한 권 씩 독서 인증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식의 댓글은 내 만화에서 뿐만 아니라 자기계발 관련 컨텐츠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익숙하다는 듯 스스로를 낮추며 반성의 다짐을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그런데 그런 정신이 분명 존경스럽긴 한데 어딘가 좀 걱정이 된다. 뭐랄까 너무 철저하달까. 어떤 면에서는 좀 처절하기까지 한 것 같다. 스웨터에 조그만 보풀 제거하듯이 자신의 사소한 틀린 점까지도 샅샅이 찾아낸다. 자기검열에 중독된 것처럼 말이다.


이 부담스러움은 어떤 훌륭한 사람의 강연을 볼 때 느꼈던 기분과 비슷하다. 간혹 그런 강연을 보게 되면 초반부에 깜짝 놀란다. 대개 뒤쪽의 메세지 전달을 위해 앞쪽 30분 정도는 연사의 비하인드 서사 같은 걸로 채워지는데, 그걸 보면 연습량이라든가 노력치 같은 게 보통 사람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와, 저 정도 빡세게 해야 저런 사람이 되는 거구나. 강연장을 나올 때면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나는 왜 이토록 해이한가.


그러나 이런 강연을 몇 가지만 더 다녀보면 알 수 있다. 메세지는 대부분 예외없이 한가지로 일치한다는 것을. ‘미친듯이 열심히 하라’ 쪽으로 말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더 철저하게 자신을 대하라고 한다. 나는 이게 좀 별로다. 꼭 RPG 게임에서 ’레벨업을 하려면 누구보다 열심히 사냥을 해서 경험치를 쌓아야 합니다‘ 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만렙 유저한테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쪼렙 유저인 나로선 겁부터 난다. 막막하다. 무엇보다 현실은 게임과 달라서, 최선을 다했지만 그에 합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살면서 누구나 겪어보지 않았는가. 그 연사들도 분명 알고 있을 거다. 그들의 찬란한 성공은 노력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운이나 그때의 환경, 조력자들 같은, 내 힘으로 통제불가능한 보조요인이 반드시 더해져서 만들어진 복합적인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모든 원인을 오직 ’더 열심히 안 함‘에 두고 다들 바짝 긴장해있는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내가 걱정 되는 것은 바로 이거다. 인생이란 절대로 느슨해져선 안된다고 생각할까봐. 한순간도 방심하지 말라며 매순간 엄한 표정을 지을까봐. 그리고 그게 당연한 사회가 될까봐. 나는 사람들이 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단 그런 건 실제로 불편한 상태가 맞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초긴장 상태로 ‘쉬는 건 죽어서 쉬자’를 외치며 매일을 살아가는 건 자기파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고강도 몰입은 ‘때가 되면 뭔가를 보여주는 사람’ 정도까지가 적절한 것 같다.


그리고 너무 힘을 주면 사람은 뻣뻣해진다. 유연함을 잃게 된다. 그런 사람이 혹사를 통해 뭔가 성취하게 되면 무서워진다. 나는 살아오면서 강한 자기 신념으로 사람들을 맞다 틀리다 함부로 판가름 하던 꼰대들을 여럿 만나봤다. 그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들을 향해 흥분하며 수위 높은 비난을 한다. 근거는 매번 자신의 혹사 경험이다. 무적의 치트키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말들은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로 포장되곤 하지만, 결국 그 끝에는 ’나처럼 이상적으로 살아라‘의 셀프 칭송 정도로 귀결된다. 이건 좀 역하지 않나. 뭐. 니가 먼저 흥분했잖아. 쒸익쒸익. 내 말이 과했다면 미안하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세상에 틀린 것은 잘 없고 오직 내 열심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결과는 항상 복합적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힐링이 아니라 일 잘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길 하는 거다. 무언가를 잘 해내고 싶다면 반드시 느슨이 병행되어야 한다. 단기간에 늘기 힘든 일이라면 더욱. 다리찢기를 할 때도 한번에 힘을 많이 주면 인대가 찢어진다. 스트레칭과 휴식 같은 걸 병행해야 점점 각도를 늘려갈 수 있다. 다리찢기가 아니라 어떤 일이라도 긴장만으로 수행할 수는 없다. 한계는 그렇게 극복하는 게 아니다.


좀 여유 공간이 있어야 유연할 수 있고 더 잘 살펴볼 수 있게 된다. 환기라고 해야하나. 몰두가 매몰이 되지 않도록 멀어지는 시간이 무조건 필요하다. 걱정거리나 문제들도 때로는 붙잡고 애쓸 때보다 잠깐 멀어져보면 풀리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 좀 풀어질 필요도 있다. 튜닝이 풀려서 좀 이상한 소리가 나면 어떤가. 그런 소리가 나야 클래식 피아노다. 항상 균일한 건 디지털 피아노고. 돌이켜보면 훌륭한 사람에게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되는 포인트는 그 사람의 업적과 노력치 보다는 그럼에도 인간미 있는 모습 쪽이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인간미가 없으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경외심’까지가 한계다. 경외심은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디지털처럼 균일한 인간은 어딘가 좀 무섭다. 나는 클래식한 인간이고 싶다. 그 편이 훨씬 따뜻한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




이런 만화를 그리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이렇게 길게 썼다. 어찌 됐든 게으름에 대한 어그로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나는 꽤나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양쪽의 균형이 맞을 때 이상적이고 지금 세상은 너무 긴장된 채 치우쳐 있으니까. 나 같은 느슨함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야 밸런스 패치가 되지 않을까? 뭐 그런 대의적인 명분을 가지고 그렸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 응, 사실 그런 생각은 별로 없고 내가 재밌어서 그리는 거다. 나는 정말이지 게으름에 대해서 그릴 때가 속 편하고 재밌고 좋다. 늦게 올려도 별 말 안하고. 아니 뭐 게으른 거 모르고 봤남.


아, 제 발 저려서 말하자면 이거 저격글 같은 거 아니다. 나 자기계발 크리에이터들이랑 친하다. 게다가 나는 이 책도 나름 자기계발 서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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