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봉사를 하기 전에 꼭 거쳐야 할 관문이 있었으니, 바로 봉사지 실사를 해야 한다는 것. 집 치수를 재고 필요한 장비를 체크하는 봉사활동의 첫 단추, 실사. 동아리 운영진으로 처음 '실사'라는 말을 들었을 땐 '진짜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 같다!' 하며 들떴다. 괜스레 어깨에 힘이 실리고, 전문가가 된 것 같았다. 실사 실수를 하고 봉사 날 동생들에게 뭇매를 맞기 전에는.
실사 날짜를 조율하기 위해 수혜자께 전화를 거는 순간부터 머리에는 송골송골 땀이 난다. 수혜자 추천서와 사진을 보면서 대략, 아주 대략의 집 상태는 가늠할 수 있지만.. 어떤 집에 사시는 어떤 성격의 수혜자분이 또 어떤 요구를 하실지, 집에는 어떤 장애물들이 숨어있을지 미지수다. 신호음이 길어질 때마다 빨리 전화를 받으셨으면 하는 마음과 차라리 받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의 싸움이 이어진다.
달칵- 전화 소리와 함께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것 같지만, 애써 가장 싹싹한 척 전화를 받는다. 귀가 어두운 수혜자를 마주할 때면, 목소리는 높이되 언성을 높이지 못하는 통화를 이어간다. 4년 동안 수차례의 전화 통화 끝에, 어느덧 '친절하게 소리를 지르는 법'을 터득했다. 긴장과 설렘의 전화 통화가 끝나고 나면, 떨리는 마음으로 실사 날을 기다린다.
전화를 무사히 마쳤다고 해도, 실사 당일까지는 긴장을 풀 수 없다. 꼭 전화를 친절하게 받아주신다고 요구가 없으신 것도 아니며, 단답으로 일관하셨다고 실제로 까칠하신 건 아니다. 집수리 봉사 활동을 할 뿐인데 '왜 수혜자의 요구를 이렇게 신경 쓰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혹자는 이왕 봉사하는 거, '요구 들어 드리는 게 뭐가 어렵나?' 하는 반발심을 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요구’라는 이름은 상당히 넓고, 다양하다. 때로는 우리가 생전 해본 적 없는 일을 해내길 원하시기도 하다. 사소하게는 문자를 대신 보내 달라는 부탁이나 남은 벽지, 장판을 놓고 가 달라는 것. 심지어는 방충망 설치, 페인트칠, 붙박이장 해체까지. 특히나 '붙박이장 해체'는 길이길이 기억에 남는 요구였다. 붙박이장을 꼭 떼고 도배를 해달라고 하셨는데.. 우리 손으로 떼어지면 그게 붙박이장인가? 도배를 한 번 했다 하면 옆집 앞집에 소문이라도 나는지, 여기저기 도움의 요청을 보내시며 온 동네 <도움의 장>이 된다. 복닥 복닥 한 동네 모습에 묘한 웃음이 나면서도 요구들이 새끼에 새끼를 칠 때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물론 모든 '니즈'를 충족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을 때가 많다. 집 난도가 낮고, 자제가 충분히 남았으며, 수혜자분들께 정이 들 때면 1박 2일 동안 집 전체를 도배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벽지와 장판, 온갖 장비들은 한정적이기에, 매번 모든 집, 모든 방의, 모든 벽지와 장판을 교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절할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합의되지 않은 방의 작업을 요구하실 때면, 실사자끼리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우리 중에 누가 단호하지만 친절하게, 거절 같지 않지만 명백한 거절을 표하는 말을 꺼낼 것인가. 웃는 얼굴에 침 뱉기보다 어려운 것은 웃는 얼굴에 거절하는 것이다.
한편, 서로의 신뢰가 담뿍 담겨도 모자랄 판에, 여성부원끼리 실사를 갈 때면, 수혜자분들의 불신을 한 몸에 받는다.
"도배할 때도 여자들끼리만 오나"
"힘쓰는 총각들은 안 오냐"
"여자애들끼리 뭘 한다고 그러냐"
실사 경험도, 수혜자를 대해본 적도 별로 없었던 때, 언제나 힘이 빠지고 말문이 막혔다. 도배 일이 힘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여자가 힘이 약한 것도 아닌 걸. 이제는 힘들여 설명하며 스트레스받지 않는다. 차라리 친절하게 소리 한 번 지르고 만다.
‘여기는 그럼 장정들만 보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