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랑의 방법
네가 내 전부였던 적도 있었다.
나를 지우고 네 생존에 투신하던 시절이었다. 네가 울면 나는 자다가도 일어나고, 네가 원할 때면 어떤 상황이든 널 먹여주었다. 사랑했지만 거기에서 더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네 감정의 높낮이에 마음이 쉽게 흔들리지 않도록 훈련했다. 네가 짜증을 내고 억지를 부려도 웃으며 타이를 수 있는 기술을 익혔다. 너와 단 둘이 있을 때 무너지지 않도록 내 감정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실패할 때도 많지만 이것이 사랑이라 생각했다. 너에게 안정적인 엄마가 되고 싶었다.
너는 사랑스럽다. 아침에 일어나서 환한 얼굴로 나타나 안기고, 숟가락으로 열심히 밥을 퍼서 오물오물 먹으며 나를 쳐다본다. 이것이 좋고 저것은 싫다고 요목조목 말하는 너, 목욕하기 싫다고 낄낄 웃으며 도망가는 너, 동물이나 공룡이 나오는 책을 뚫어져라 보는 너, 아는 단어가 들릴 때 크게 반응하는 너, 아직까지도 까꿍놀이를 가장 즐거워하는 너, 나도 잘 모르는 공룡 이름을 발음하는 너. 자녀를 키우는 행복이 뭔지 너를 보며 알아가고 있다.
너의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려 한다. 네가 가장 처음 말한 색깔 이름은 '보라색'이고 처음 부른 노래는 '작은 별'이었다. 동물 그림은 정말 좋아하지만 커다란 동물 인형은 무서워한다. 고기를 구워서 작게 잘라주면 거들떠도 보지 않고 엄마 아빠의 고기 조각을 입에 우겨넣는다. 놀다가 넘어지면 스스로에게 “괜찮니?”라고 묻는다. 돌아오지 않을 작고 예쁜 시절이 금세 가버릴까봐 나는 매일 아쉽다.
네가 잠들면 갑자기 더 보고싶고, 아침에 일어나 마주하면 더 반갑다. 하원할 때도 꼭 안아주며 몇 번이고 입을 맞춘다. 네가 계단을 오르내리며 느릿느릿 장난쳐도 웃어넘길 수 있다. 삼복더위에도 네가 먹을 반찬과 국을 만든다.
나의 모든 것으로 너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너는 나의 전부인가.
스스로 자주 질문했다. 아무래도 너는 내 전부가 아닌 것 같아서.
아찔할 만큼 사랑한다고 해서 너로 가득 찬 것은 아니었다. 너의 모든 이슈에 관심이 있지만 그렇다고 네가 내 삶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너를 위해 대신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나의 최우선순위가 너일 수는 없었다. 이 점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내게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엄마의 사례가 별로 없었다. 엄마라면 인생을 걸고 자녀를 키워야 한다고 은연중 믿고 있었다. 아이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 똑똑하고 헌신적인 엄마. 그들이 자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는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엄마에 대한 판에 박힌 서사들 덕분인지 나도 어느새 '좋은 엄마'의 무지개를 잡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이의 정서 안정과 건강한 신체 발달, 식생활, 영상 시청, 놀이와 학습의 비중 등으로 스스로 점수 매기면서. 아이와 간격을 유지하다가 애착 형성의 중요한 순간이나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지 염려한다.
엄마라면 맹목적이거나 헌신적이거나 인내심 깊은 사랑만 있다는 듯 세상은 말한다. 나는 그 사이에서 이 편도 저 편도 가지 못한 채 의심하기만 했다. 엄마로만 살기 싫다고 하면서도 내가 제대로 된 엄마가 맞는지 걱정하는 것이다. 너는 너로, 나는 나로 살자. 이것이 사랑이 맞을까.
자신의 길을 개척한 여성을 굳이 꼭 엄마로서 평가하고 마는 기사 제목들이 낯설지 않다. 아무리 유능하고 비전이 있으며 큰 성취를 보여도 그 사람이 자녀를 키우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확인하는 것 같다. 여자가 이렇게 큰 일을 해냈다니! 그럼 애는 누가 본 거지? 하면서. 아무리 뛰어나도 그래봤자 '애엄마'라고.
남성은 자아실현과 아빠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긴 할까? 큰 성취를 거둔 남성에 대해 '강인한 아빠'라고 수식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나? 일로 바쁜 엄마는 무책임한 것처럼, 육아에 전념하는 엄마는 게으른 것처럼 묘사하는 말들을 익숙하게 들으며 살았다. 희생과 헌신은 아름답게 포장되어 모든 엄마에게 강요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오로지 자녀에게서 삶의 목적과 기쁨을 찾아야만 할 상황이 되고만다. 완전히 희생하면서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 사는 것이 가능할까? 자녀 양육에 삶을 다 바쳤는데 자녀에게서 조금이라도 보상을 바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마음으로 아이에게서 독립해야 했다. 아이가 아직 어릴 때부터 조금씩 시도해보기로 한다. 아이를 내 삶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 것도 사랑의 한 종류일 거라 믿는다.
가끔, 네가 낯설다. 이전에 없었던 제3의 존재. 알게 된 지 갓 2년이 넘은 사이. 네 눈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너는 누구일까. 자녀란 무엇일까. 넌 어디에서 왔을까. 그러다보면 서늘한 깨달음에 번뜩 정신이 든다.
너는 타인이다.
내 몸에서 나왔지만 나와는 완전히 다른 인격. 너는 나의 소유도 작품도 아니다. 내 삶을 맴도는 위성도 아니다. 너는 사랑스럽지만 분명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며 판단하는 사람. 이 당연한 사실을 까무룩 잊을 때가 많다. 태어난 날부터 너를 지켜봤으니 너에 대해 다 안다고 착각하고, 또 알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나는 아마 영원히 너를 모를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너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앞으로도 나는 너에 관한 집요한 궁금증을 내려놓도록 연습할 것이다.
부모이기 때문에 스스로 사고할 때까지 네게 '올바름'을 보여줘야 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올바름'에 대해 토론할 수 있겠지. 네가 너의 세상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나는 내 세상에서 스크린 보듯 바라봐야 하겠지. 너의 확신을 내가 의심하게 된다면 그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너와 나는 가족을 넘어 '알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지인'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가족이라는 낡은 끈에 엮여 끊지도 묶지도 못할 사이가 될까.
너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오래 사랑하고 싶다.
내 질문의 답을 네게서 찾지 않고, 네 삶을 내 성적표로 삼지도 않겠다. 너는 내가 될 수 없다는 걸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