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워야 샘이 열린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로 태어났다. 아기들은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아도 몸을 사용하여 감정을 표현하고 음의 높낮이를 조절한다. 좀 더 자라면 꼭 쥔 크레용으로 역동적인 선을 긋기 시작하고 동물이나 만화 주인공처럼 자신과 다른 존재를 유심히 관찰하여 그것을 흉내내며 논다. 음악이 없어도 땀을 뻘뻘 흘리며 신나게 춤을 춘다. 자기 몸이 어느 정도까지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것을 즐긴다. 또 말문이 트이고 인지가 발달하면서 아이는 문득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낸다. 상식에 메이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본다. 진심을 다해 사랑을 표현한다. 모든 아이는 탁월한 화가이자 배우, 무용가이자 뮤지션, 그리고 시인이라고 했던가. 나는 아이를 기르며 혼자만의 가설을 세워보았다. 만인예술가설.
큰아이가 네 살 때 갑자기 까닭모를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내가 방에 따라 들어가자,
"밖에 나가주면 좋겠어."
라고 하더니 한참을 꺼이꺼이 울었다. 그리고 시원한 얼굴로 나와 말했다.
"어른 세상에 할 말이 많아서 울음으로 대신 말했어요."
그때 울음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이의 말을 빌자면 일종의 퍼포먼스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속에 사는 흥얼이는 겁없이 무엇으로든 노래를 만들어 낸다. 나의 아이는 한 번 꽂힌 노래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해서 따라부르곤 하다 슬슬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기 시작했다. 인풋에 따라 아웃풋도 달라졌다. 동요를 들으면 동요풍의 노래를, 교회 다녀오면 찬양곡을 만들고, k-pop을 들으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어린이 뮤지컬 넘버들을 즐겨 듣더니 뮤지컬 스타일의 곡을 만들어 공연도 하고, 차를 타고 가다가 가족끼리 돌아가며 즉흥곡을 만들며 뮤지컬처럼 대화하기도 한다. 일일이 녹음하느라 음성 파일 수십 개가 쌓였지만 그래도 아이가 노래 짓기를 놀이로 삼는 모습이 좋았다.
아빠는 노래를 만드는 직업을 가졌고, 엄마에겐 노래 짓기가 삶의 일부이며, 엄마 아빠가 함께 팀을 이루어 음반을 발표하고 공연하는 모습을 보아온 아이는 스스럼없이 음악을, 내면의 흥얼이를 자기 삶에 받아들였다. 가끔 새로 만든 노래들을 아이에게 들려주곤 했더니, 아이는 낯선 곡을 들으면 꼭 이렇게 묻곤 했다.
"이거 엄마나 아빠가 만든 곡이에요?"
어느 날은 밥을 먹다 뜬금없이 선언하기도 했다.
"저 올해에는 꼭 앨범을 내고 싶어요."
“그…그럴까?”
글 쓰는 일을 한다고 하면 "나도 한때는..."이라며 문학도의 꿈을 고백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노래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만의 곡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막연하게나마 품고 살아온 분들도 많을 것이다. 필기구가 있으면 어디에든 무엇으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낙서하듯 메모하듯 노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다 프로가 될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노래 수업을 기획해보았다. 간단하게는 책에 나온 노랫말에 음을 붙이는 걸로 시작한다.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에 나오는 엄마의 자장가에 어울리는 가락을 붙여보고 책을 읽으며 그 부분이 나올 때마다 우리가 만든 멜로디로 함께 노래를 부른다.
책을 읽고 그와 관련된 생각을 적어 정리한 뒤 돌아가며 한 소절씩 멜로디를 붙여볼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그림책 <엄마는 해녀입니다>를 읽고 나서 해녀들의 삶을 관찰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감상한다. 제주 해녀들이 부르는 '이어도 사나'와 그것을 변주한 여러 장르의 곡들을 들어본다. (합창, 독창, 힙합 등 다양하다) 그렇게 감상이 모이면 돌아가면서 느낀 점을 말하고 화면에 문서창을 띄워 함께 정리한다. 여기까지 오면 거의 다 된 것이다. 나는 건반을 치면서 우리가 쓴 가사에 한 소절씩 가락을 붙이도록 유도한다. 용기 있는 아이들이 먼저 입을 열고 다함께 돌아가면서 가락을 붙여본다. 녹음도 하고 채보도 할 수 있다면 좋다. 정리한 노래를 다같이 다시 배워보고, 여러 번 합창하며 마무리 한다. 아이들 모두가 함께 만든 노래가 고요히 울려퍼질 때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노래 만들기 세미나를 이끌 때는 오래 생각해온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곡'이라고 하면 보통은 음악이론도 잘 알아야 하고 악기도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맞지만) 아마추어리즘 안에서 누구나 노래를 만들 수 있고 그 자체만으로 즐거워 할 수 있다고. 우리 모두에겐 '발견된 흥얼이' 혹은 '미지의 흥얼이'가 있다고 말이다.
물론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무작정 입을 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래서 먼저 무엇을 노래하고 싶은지를 생각해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오래 함께 해온 반려동물과 부부의 결혼 기념일, 망해버린 미용 시술, 돌아가신 부모님, 혼자만의 첫 여행 등 무엇이든 노래가 될 수 있다. 간단한 박자 개념을 익힌 후, 4분의 4박자 여덟 마디, 혹은 열 여섯 마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담아본다. 그리고 각자 흩어져 본격적으로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용기를 많이 드려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가락이 나오면 휴대 전화로 녹음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작곡은 끝난 것이다. 음악을 배우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강사이기 때문에 녹음을 들으며 악보를 딴다. 중간 중간 참가자와 의논하며 고쳐보기도 한다. 어울리는 코드를 넣어 간단히 편곡하고 완성본을 다시 한 번 녹음한다.
“노래 완성됐어요!”
모든 과정을 마치면 참가자는 자기 노래가 담긴 파일과 악보를 갖고 돌아갈 수 있다.
음악을 공부해 본 적이 없다 해도 지금껏 들어온 노래들이 내면에 쌓여 있기 때문에 참가자가 적극적으로 전조나 리듬을 정해주기도 한다.
“혹시... 우리 어릴 때 봤던 만화영화 ‘외계소년 위제트’ 아세요?”
“오, 알아요!”
“그 주제가는 분위기가 막 바뀌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맞아요. 중간에 전혀 다른 곡이 나오잖아요. 머나먼 우주의 보랏빛 별에서~ 맞죠?”
(이해를 위해 각색한 대화입니다)
나의 수업 방식이 너무 규모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수업하는 건… 음, 전공자는 절대 못할 것 같아.” (하지만 그 역시 비전공자에 가깝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느낌에 의존해 즉흥적으로 흘러나온 걸 과연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는 의아했을 지도 모르겠다. 좋은 퀄리티의 음악을 꾸준히 듣고 또 만들어야 하는 직업인으로서 본인은 몇날 며칠 고민하며 곡을 쓰는데 나는 수업이랍시고 '당장 흥얼거리세요! 그게 작곡이에요!'라고 외치고 있으니 저게 맞나 싶었던 것 같다.
"프로라면 프로답게 해야겠지. 근데 아마추어는 즐기는 맛으로 하는 거야. 목소리가 이미 악기니까 쓰기만 하면 되잖아."
그렇게 흥얼이가 발견될 수 있다면, 그 과정이 즐겁다면 충분한 것이다. 온 세상 프로 음악가들의 처음도 이것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내가 속한 팀 싱잉앤츠는 일종의 음악협동조합과 비슷하다. 각 멤버가 원하는 음악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의 도움을 의지해 한 곡씩 완성하고 그 다른 스타일의 곡들을 하나의 서사에 맞춰 앨범에 정렬하는 방식으로 작업해왔다. 그렇게 정규 2집까지 발매할 수 있었다.
'일해서 돈 받으면 프로'라는 극히 단순한 통념에 따라 생각해보면 음반을 발매하는 것은 프로의 단계로 가겠다는 적극적인 의사 표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것은 놀이로서의 음악을 하고 싶다는 의지에 반하는 행동일까? 내가 써서 발표한 곡은 비전공 아마추어의 결과물인가?
음악가들이 인터뷰 할 때 어떤 곡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됐고 어떤 곡은 순식간에 써내려갔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곡마다 영감을 얻고 감응되는 방식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작곡자의 특징도 제각각이겠지만 때로는 급히 쓴 곡이 대 히트를 치기도 하고, 오래 빚어온 노래가 사랑 받기도 한다.
아마추어리즘은 내가 용기를 얻는 방식이다. 당장 대단한 결과물을 내지 않아도 되고, 빼어나게 잘하지 않아도 된다며 스스로 다독여야 샘이 열리는 기분이 든다. 그러면 가만히 음악의 수면에 몸을 기울이다 가락을 얻고 심상을 떠올린다. 이 과정 자체가 위로와 낙이 된다. 이렇게 채취한 사금같은 음률을 다듬고 빚어 하나의 곡을 완성한다. 수 없이 불러보고 녹음해서 들어보며 고치고 또 고친다. 동료들에게 들려주다 그들에게도 닿는 지점이 생기면 음원으로 제작하기도 한다. 내가 발표한 곡들은 놀이와 영감, 그리고 나름의 투지와 연구로 탄생한 것이다.
그러니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확 그어버릴 필요는 없다. 아마추어리즘이 누군가의 내면에서 음악을 깨운다면, 그래서 그가 삶의 낙을 찾았다면 그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거기서 용기를 내어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싶은 열망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탐미적인 학습자가 되고 그렇게 예술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시리즈를 쓰면서, 매일 밤새워 음악을 정련하는 유수한 뮤지션들에게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습하며 스스로 갈고 닦는지 알고 있다. 놀이로서의 음악이 그 노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어느 밤이 온다면 그때 당신에게도 이 놀이가 필요할지 모른다고, 당신도 그걸 이미 알고 있다는 걸 나도 알면서 해본 말이라며, 조용히 손 내밀고 싶다.
싱잉앤츠 앨범에서는 작사로 참여한 곡이 더 많지만
지금은 제가 작사+작곡한 곡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싱잉앤츠 정규 1집 수록 '초록이 되자'
제가 만들고 직접 부른 '젖은 밤'도 있고요
편곡의 힘으로 완성된 곡 '답장'
그렇지만 저희 밴드 노래들이 다 참 좋답니다. 정말요.
저는 가끔 듣는데요, 인생의 시기마다 와닿는 곡이 그때 그때 다른 것 같아요.
한 번 들어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싱잉앤츠 정규 1, 2집은 애플뮤직, 멜론, 지니, 벅스, 유튜브뮤직 등등 음원사이트에서 스트리밍 가능합니다.
혹시 기독교인이신 분이 계시다면 이것도 꼭 들어보셔요. 능력 있는 아티스트와 편곡자, 연주자를 만나서 날개를 달게 된 제 창작곡인데요, 누추한 음성 파일이 이렇게 완성도 있는 곡으로 변할 줄은 몰랐어요. 여러모로 감사하게 되는 노래입니다. 너무 좋아요.
김명선 낙헌제2집 '왕께서 나를 보시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