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같은 프로가 되자
우리는 밴드가 되기로 했다. 각각 생업은 따로 있지만 틈틈이 노래를 만든다는 공통점을 살려 밴드명을 지었다.
싱잉앤츠 어때? 노래하는 개미들.
K의 제안에 나머지 셋도 동의했다. 그후 우리는 서로를 개미라고 부르곤 했다.
밴드 이름만 정해놓고 아무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는 K와 이따금 동네에서 만나 수다를 떨었다. 영문학을 전공하던 그는 휴학을 하고 갑자기 생산직 노동자로 공장에 들어가더니 긴 시간을 버티다 홀연히 퇴사를 했다. 음악이 너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여름도 왔으니 어디 가서 머리를 식히고 오고 싶단다.
여행이나 가자.
다른 개미들에게 연락했다. S개미도 오케이. M개미는 전역하고 막 이사를 와서 정리하느라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결국 나와 K와 S 이렇게 셋이서 여름 휴가를 떠났다. 다 커서 가면 그렇게나 좋다는 경주로.
우리의 명분은 분명했다. 음악 여행을 가자! 가서 곡을 쓰자!
우리는 한 게스트하우스에 숙소를 잡고 앞마당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나와 슬그머니 물었다.
"우와, 음악하시나봐요?"
우리는 멋적게 웃었다.
"아니요. 그냥 취미로 하는 거예요."
행랑객들이 이따금 지나가며 물었다.
"어머! 뮤지션이세요?"
그럼 우린 또 부끄러워 했다.
"아니요. 저희는 각자 일을 하는데 그냥 음악도 좋아하는 거예요."
자기 입으로 말하기엔 좀 쑥스러운 일들이 있는데, 밴드도 그랬다. 사실 자신이 없었다. 아무 노래도, 앨범도, 활동도 없었으니까.
다음 날, 경주를 여행하며 얻은 각자의 심상을 나누었다. 세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 하나의 곡을 완성하기로 했다. 마침 내게는 예전에 혼자 멜로디와 코드만 대강 지어놓은 곡이 있었다. 여행을 기념하며 그 노래에 가사를 담기로 했다. 나는 우리가 함께 나눈 이야기를 정리해 멜로디에 맞게 가사를 붙여보았다.
<초록이 되자>
바삐 걷는 거리의 사람들
하루가 채 부족한 사람들
꽃이 되길 잊은 사람들
꽃잎을 다 접은 사람들
여기 모여 초록이 되자
욕심 없는 친구들과 함께
낮은 하늘 손 뻗어 보자
우린 원래 꽃이었으니까
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마지막 날 밤에는 제대로 놀자며 돗자리 챙겨서 게스트하우스 옥상에 올라갔다. 이미 꽤 많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놀았다. 우리 셋 다 술을 안 좋아했기 때문에 음악만이 유일한 유흥이었다. 그렇게 기타를 치다 치다 지쳐서 셋이 120도 간격으로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그때였다.
저기, 혹시...밴드하세요?
옆쪽 무리에서 한 여성분이 다가와 말했다. 살짝 취기가 오른 듯 했지만 분명한 음성이었다. 우리는 깜짝 놀라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얼떨결에 대답했다.
자신없는 일을 시작하면 괜히 남의 확인을 받고 싶다. 그게 맞다는 확인. 그날 한 사람이 우리를 불렀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밴드가 되었다. 어제는 부끄러워 움찔움찔거렸지만 이제는 인정한 것이다. 그래. 우리는 밴드다!
"어머! 그럼 노래 불러주세요!"
옥상에서 술 마시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노래를 불러달라니. 뭘 하지?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데 K가 먼저 용감하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싱잉앤츠라는 밴드입니다. 노래하는 개미들이란 뜻이죠."
그날 첫 공연을 했다. 별빛처럼 눈을 반짝이는 이십 명 정도의 관객들과 함께.
바로 전날 완성된 <초록이 되자>를 처음 불렀는데 모두들 즐겁게 들으며 후렴구 떼창까지 함께 해주었다. K는 평소 연습했던 제이슨므라즈와 이적의 곡을 근사하게 커버했다. S는 사랑스러운 가사의 자작곡을 불렀다. 살짝 취기가 오른 관객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빵빵 터지고, 어떤 노래에도 최고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여행지의 밤에는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다던데. 그날 우리는 난생 처음 뮤지션으로서 사랑을 받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토록 너그러운 관객들은 이후에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용기를 얻은 우리는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비를 모아 첫 앨범을 만들었다.
2년 뒤, 모든 멤버가 결혼을 했고 그와 동시에 정규 1집을 발매했다. 일부러 맞춘 건 아니었는데 공교롭게 그렇게 됐다.
각자 첫 아이를 출산했을 때 정규 2집을 발매했다. 이것도 일부러 맞춘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노래를 만들고 이따금 공연을 한다. 생업들이 있으니 연습을 자주 못하게 되고,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 것 같다. 그럴 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못하는 게 컨셉이야."
그러면 긴장감이 풀어지며 조급함도 사그러든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설 때, 지금 내가 즐거운지 점검해본다. 명곡을 만들지는 못해도 현재의 나를 깊이 있게 담고픈 진심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음악이 있어서 행복하다. 그거면 됐다.
<초록이 되자> 싱잉앤츠 정규 1집에 수록되었습니다. 많관부…
https://youtu.be/UyPeJ3JLgEs
2014 싱잉앤츠 정규 1집 <우주의 먼지, 그러나 사랑 받았네>
2017 싱잉앤츠 정규 2집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겠지요>
애플뮤직을 비롯한 모든 음원사이트와 유튜브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