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쩌다 보니 동화 쓰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도 글이 주는 밥을 먹으며 살지만 언젠가 내가 돌아갈 이야기가 있다고 늘 믿고 있다. 내가 동화를 쓰는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흔히 말하듯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는 것도 아니고, 반짝이는 깨달음을 던지고 싶은 맘도 별로 없다. 아무리 봐도 난 누구를 가르칠 입장은 못 된다.
내가 동화를 쓸 수 있는 건 그냥 내가 애 같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정말 하고 싶은 건 문학이다. 문학은 인간과 삶을 담는다. 여전히 치기 어린 나는 동화를 쓰며 문학을 흉내낸다. 아이들을 만나면 나도 아이가 되어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즐겁게 어울려 논다. 그걸 보고 혹자는 '애를 잘 본다'면서 좋아하더라.
2.
아이의 순수함을 아무리 긍정한다 해도 세살배기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과 고집, 욕심까지 다 옳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여전히 애 같다. 온 세상 어린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다른 단어를 생각해봐도 이보다 맞는 말이 없다. 만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다. 남과 나의 몫을 비교한다. 양보가 어렵다. 내 의견을 너무나도 주장하고 싶다. 칭찬만 받고 싶다.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게 훨씬 편하다. 일상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유치한 보복심은 또 어떻고.
우리 엄마는 계산은커녕 자신이 희생과 양보를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참으로 맑고 순수한 영혼이건만, 어찌하여 그 속에서 나온 나란 작자는 이리도 불완전하고 성마른가.
이런 유치하고 애 같은 모습이 싫었다. 그렇다고 섣부른 어른 흉내를 내면 쉬이 오만해지더라. 그렇지만 세살배기 아이를 대할 때는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참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부딪치던 정신도 조금씩 자랐던 것 같다.
3.
애 같다는 말은 어른스러움의 반대말처럼 부정적으로 쓰이곤 한다. 그 말 속엔 아이는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며 어른은 이치를 어느 정도 깨우쳐 성숙하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정말 그럴까?어른이 된다는 게 꼭 불완전에서 완전함으로 채워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래 맑고 밝은 감각과 생각, 가능성, 잠재력이 터질 듯 꽉 차 있던 영롱한 아이가, 어른이 되며 그 모든 빛을 조금씩 잃어가는 것이라고. 그 대가로 성숙을 얻는 거라고.
30대가 된 나는 빛깔도 희미해졌고 그렇다고 성숙에도 이르지 못한 지점에 서 있다. 아이들 앞에서 똑같은 아이처럼 굴기도 하고 때론 끔찍한 어른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이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때면 눈이 환하게 열리며 세상과 만물을 다 감각하려 하더라. 생각이란 게 우물과 같다면 나의 샘은 아주 맑고 시원한 물이 퐁퐁 솟아나길 꿈꿨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나는 날마다 성장하고 싶었으나, 성장이 꼭 성숙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걸. 자유로운 아이가 되는 것이 나에겐 성장이라는 걸.
4.
'예술가는 삶으로 실험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성숙을 배반하며 성장하는 실험을 하고 싶다. 이전에도 아이였으니 역시 아이가 됨으로 나는 자랄 수 있다. 편견 없는 눈, 맑고 투명한 감각, 무엇이든 실현할 수 있는 상상, 타고난 온정, 티없는 웃음, 거칠 것 없는 솔직함. 나는 이런 것을 지키려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다만, 이왕 아이로 산다면 사랑이 많은 아이가 되고 싶다. 빠르게 반성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그리고 금방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인생과 세상의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만져 본다. 때론 뭔가를 집어 쑥 잡아뽑고는 까르르 웃거나 깜짝 놀라기도 한다. 벌벌 떨다가 엉엉 울기도 하고 분노의 증기를 내뿜기도 한다. 춤추고 싶을 때는 춤을 춘다. 깊이 깊이 절망하기도 한다. 아이답게 살기로 한 이후 나는 자유를 조금씩 체화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그의 좋은 점을 신나게 격려하는 일이 점점 쉬워졌다.
서른이 넘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로서 충만하게 살아갈 것이다. 때묻지 않았다 하기엔 이미 때가 너무 많이 묻어 어쩔 수 없다면, 그런 대로 때 묻은 아이가 되면 된다. 아이다움의 빛과 그림자를 다 안고 살아도 괜찮다. 그러다 양달이 조금씩 더 넓어지면 그것이 성장이 아니겠는가.